291쪽
물병은 냇물로 채워지면서도 냇물로 둘러싸여, 한편으로는 단단해진 물처럼 허리가 투명한 ‘그릇‘인 동시에, 흐르는 액체 수정이라는 큰 그릇에 잠긴 ‘내용물‘이기도 해서, 물병 형태 그대로 식탁에 나왔을 때보다 더 감미롭고 더 자극적인 방식으로 청량감을 불러 일으켰는데, 그 청량감이 손으로 잡을 수 없는 단단하지 않은 물과, 혀로는 음미할 수 없는 액체성 없는 유리 사이에서지속적으로 분배되며 흘러나왔기 때문이다.  - P291

295쪽
뱃사공이 노를 놓고, 배 바닥에 등을 대고 머리를 아래쪽에 두고 반듯이 누워, 배를 물결치듯 흘러가게 내버려두고는, 머리위로 천천히 흐르는 하늘을 바라보며 얼굴엔 행복과 평화가어린 모습을 나는 얼마나 여러 번 보았으며, 또 나도 먼 훗날내 마음대로 자유롭게 살 수 있다면 얼마나 그처럼 되고 싶었던가! - P295

296쪽
그녀의 체념한 모습을 통해 우리는 그녀가 사랑하는 남자의 모습이 우연히 눈에 띌지도 모르는 곳을 스스로 떠나, 두번 다시는 그를 만나지 못할 곳으로 왔다는 걸 느낄 수 있었다. 나는 그녀를 바라보았다. 사랑하던 남자가 결코 지나가지않으리라는 걸 아는 길을 산책하고 돌아온 그녀는, 공허하고도 우아한 몸짓으로 모든 것을 체념한 손에서 긴 장갑을 벗고있었다. - P296

300쪽
그때 나는 내가 다른 사람들과같은 식으로 존재하며, 그들처럼 늙어 가고 그들처럼 죽어 갈것이며, 그들 가운데서도 특히 글에 대한 재능이 전혀 없는 사람일 뿐이라고 생각했다. 이처럼 절망에 빠진 나는 블로크의격려에도 불구하고 문학을 영원히 단념하기로 했다. 내 사유의 공허함에 대한 이런 절박한 내면 감정은, 사람들이 내게 해줄 수 있는 갖가지 듣기 좋은 말보다 더 우세해졌는데, 마치선행을 했다고 칭찬을 받을 때 악인이 느끼는 양심의 가책도 같았다. - P3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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