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가 처음 인주를 보았던 날 그녀는 방과 후의 텅 빈 운동장 트랙을 달리고 있었다. 나보다 한 살이 많은 인주는 열네 살이었고, 나중에 그림을 그리게 될 거라고는 아무도 생각 못했던 단거리 육상 선수였다. 그녀는 초등학교 6학년 때 서울 대표로 소년체전에 나가 은메달을 받았다고 했다. 큰 키에 뚜렷하고 중성적인 이목구비의 인주는여러 아이들의 동경을 받았다. - P53
삶이 제공하는 당근과 채찍에 철저히 회유되고 협박당한 사람의 얼굴로 어머니는 작은 방에서 늙어가고 있었다. 따뜻한 아랫목에서 어머니의 살비늘 냄새를 맡고 있으면, 그녀에게 삶이 폭력이었다는 느낌을 지우기 어려웠다. 그녀는 어떤 희망에 그토록 교묘하게 회유당했을까. 가정의 평화, 아들들의 출세, 딸의 행복한 결혼. 오순도순한 노부부의 말년. 종내에는 무릎을 무너뜨려 계단조차 오르내릴 수 없게 만든 삶을 그녀는 한번도 원망하지 않았다. - P55