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울 준비는 되어 있다
에쿠니 가오리 지음, 김난주 옮김 / (주)태일소담출판사 / 2004년 5월
평점 :
구판절판
국내에 소개된 에쿠니 가오리의 책들 중, 첫번째로 읽은 책이었고 내가 읽은 가오리의 책들(이 책 이외에, 웨하스 의자, 냉정과 열정사이, 낙하하는 저녁, 당신의 주말은 몇개입니까, 반짝반짝 빛나는) 중 가장 마음에 드는 책이다.
결혼이라는 큰 테두리안에서 여러 형태의 모습을 보여준다. 가오리의 말처럼 일종의 종합선물세트라고 할까. 이 종합선물세트안의 과자들은 모두 다른 모양과 맛을 보여주면서도 어딘지 모르게 비슷한 끝맛을 남긴다. 왠지 씁쓸하면서도 또 찾게 되는 그러한 맛이다.
한번 마음에 들면, 질릴 정도로 반복해서 읽는 습관이 있는 나는 작년에 이 책을 사서 읽은 이후 거의 1주일동안 이 책만 읽었다.(그리 두껍지 않은 책이고 반복해서 읽다보면 읽을수록 속도가 붙기 때문에 그 1주일동안 적어도 10번은 읽었을 것이다.) 요즘에도 문득 생각이 나면 아무 페이지나 펼쳐서 읽는다. 어차피 줄거리때문에 읽는 것이 아니기 때문에 마음대로 읽다가 그냥 덮어버리고 또 나중에 다시 아무 페이지나 펼쳐서 읽고...
아직 미혼인 나는 결코 행복한 결혼의 모습이라고 할 수 없는 이 책의 이야기들을 읽으면서 처음에는, "맞아, 맞아. 결혼해봐야 결국 혼자일 뿐이지." 혹은, "이럴 바에야 그냥 이혼하지. 뭐하러 같이 사나." 하는 말초적인 반응을 보였었다. 그러다가 계속 반복해서 읽으면서 이 책의 이야기들이 결혼이라는 형식을 빌려 사람들 사이의 감정과 소통의 문제를 드러내고자 했던 것이 아닐까 하는 생각을 하게 되었다.
이 사람이 아니면 절대 안될 거 같이 안달하고 숨이 멎을 듯이 벅차 오르던 감정도, 이런 저런 시간들을 거치면서 무디어지고, 남는 것은 그 당시의 생기발랄했던 기억들... 이 책에 나오는 인물들은 그런 과정들 중 하나를 겪고 있다. 그래서 각기 다른 이야기, 다른 상황, 다른 인물들인데도 마치 하나의 큰 이야기속의 하나라는 느낌을 주나보다. 이 책을 반복해서 읽을 때마다 내가 마치 이 책 속의 한 인물이 된 듯, "지금은 이렇게 열정적이지만/ 상대가 밉지만/ 아무 느낌조차 없지만 그래도 예전에는/앞으로는..."하는 기분이 들면서 쓸쓸해지는 한편 왠지 모르게 안도하게 된다.
얼마전 큰 인기를 끌었던 TV 드라마에서처럼, 반짝반짝 빛나던 감정이 언젠가 빛이 바래 아무렇지 않게 되더라도 사랑을 향해 나아가야 한다. 사람이 죽을 걸 알면서도 사는 것처럼. 다만 이 책의 제목처럼 '울 준비는 되어'있어야 그 과정을 다 경험할 수 있지 않을까.
오늘처럼 비가 추적추적 오는 저녁에는, 혼자 집에 틀여박혀 이 책을 집어들고 아무 페이지나 펼쳐지는 대로 다시 한번 읽고 싶어진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