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백만 광년의 고독 속에서 한 줄의 시를 읽다 - 류시화의 하이쿠 읽기
류시화 지음 / 연금술사 / 2014년 6월
평점 :
류시화의 “백만 광년의 고독 속에서 한 줄의 시를 읽다”
먼저 책의 두께가 장난이 아니다. 시라는 것은 한줄 한줄 커피의 향기처럼 코로 들이마시고 뇌로 전달했다가 다시 우리의 온몸으로 느껴야만 하는 아름다운 대상이기에 언제 다 읽나 라는 고민이 먼저 나를 사로잡게 되었다.
류시화? 상처, 고독, 방황 등 우리가 별로 느끼고 싶지 않은 단어들의 꾸러미를 항상 주머니에 가지고 다니는 시인! “유명하다.” 아니 “유명하지?” 이게 더 좋겠다. 본인은 그렇게 생각하지 않는다. 그렇죠?. 류시화가 “하이쿠”를 번역하여 해석한 책이라기에 꼭 보고 싶었다.
“하이쿠”는 일본 전통의 짧고 간결한 시로 “반쯤 열린 문”으로 표현할 수 있다..
우리는 어떤 사물을 바라볼 때 활짝 열린 문으로 보는 것 보다 반쯤 열린 문으로 볼 때 더 신비롭고 함축적이며 강렬한 감정을 느끼게 된다. 사람에게서도 물론 그렇지만!
시라는 것은 과연 무엇일까? 인간과 사물과의 관계를 확인하고 느끼면서 언어로 영원한 생명력을 부여할 수 있는 살아 숨 쉬는 예술행위로 표현 할 수 있지 않을까?
하이쿠의 언어는 의미보다는 소리, 움직임, 시간, 풍경 등에서 영원속의 순간을 포착하고 그 순간 속에서 영원을 발견하는 짧고 간결하고 함축적인 문학이다.
예전에 셰익스피어가 쓴 “소네트 집”을 읽은 적이 있다. “소네트 집”은 고정된 틀과 형식을 벗어나지 않고 자연에 빗대어 영원한 사랑을 노래하고 시간을 초월한 아름다움을 여인에게 부여하는 멋진 사랑의 세레나데들로 구성되어 있다.
나는 충격을 금하지 않을 수 없었다. “소네트 집”처럼 아름답고 운율적인 시를 본적이 없었기에 말이다. 하이쿠의 시들은 나에게 더 충격적으로 다가왔다.
릴케의 “젊은 시인에게 보내는 편지”에 보면 시인은 자연을 다른 관점에서 독특하게 바라볼 수 있는 안목을 키워야 한다고 언급한다.
우리가 감히 인간이 창조한 언어로 자연을 표현한다는 사실이 무례가 될지도 모르나, 우리는 인간이기에, 자연의 아름다움과 신비로움을 느낄 수 있도록 누군가가 다리를 놓아주어야 하지 않을까? 그렇기에 바로 시인이 존재하고 시인은 항상 자연과 언어로 싸워야만 하는 고독한 존재이지 않을까?
“백만 광년의 고독~~”이란 책 제목만 보더라도 우리가 감히 가늠할 수 없는 하이쿠 시인들의 극한의 고독이 떠오르지 않는가?
하급무사의 아들로 태어나 인간세상에 회의를 느껴 방랑 시인의 길을 걷는 “마쓰오 바쇼”, 스무살 무렵에 시를 배운 뒤 바쇼의 발자취를 짚어 동북 지방을 여행한 “이가 요사 부손”, 누구보다 불우한 삶을 살았지만 하이쿠에서 만큼은 유머와 인간미를 잃지 않았던 “고바야시 잇사”, 스무살에 폐결핵에 걸려 서른다섯에 짧은 생을 마감할 때까지 잊혀져 가는 하이쿠의 세계를 세상에 알리는 일에 혼과 열정을 바쳤던 “마사오카 시키”
방랑과 고독과 삶의 극한의 고통을 느끼며 자연과 일치가 되었던 시인들, 그들은 왜 이렇게 방황하고 유랑해야만 했을까? 비록 자신은 유한한 존재이지만 끝내는 한 줌의 흙이 되어 자연의 영속성으로 스며들기를 원하지 않았을까?
바쇼는 인간과 대비되는 자연의 성스러움을 다음과 같이 표현했다.
“나비 한 마리 절의 종에 내려앉아 잠들어 있다”
언젠가는 종이 울릴 수밖에 없는 위태위태한 곳에 앉아 있는 나비! 하지만 어떤 상황에서도 분별심을 버리고 걱정과 번민과 의혹으로부터 자유로운 절대 믿음과 두려움 없는 생을 누리고 있다. 과연 우리도 이렇게 모든 걱정과 고민으로부터 모든 것을 초월한 삶을 살 수 있을까? 나는 이 시를 읽고 자연의 경이로움에 대해 경탄을 금치 못했다. 그런 안목을 평소에 가질 수 없는 초라한 존재라는 것을 다시 한 번 느끼게 되었다.
그래서 시의 힘은 “세상과 사물에 대해 새로운 것이 아닌 새로운 눈을 뜨게 해주는데 있다.” 라고 하지 않는가?
항상 강자를 선호하는 사회!, 하지만 고바야시 잇사는 개구리처럼 약하고 천대받는 존재를 향한 동정심과 연대감을 개구리에 비유하여 다음과 같이 표현하기도 했다.
“여윈 개구리 지지 마라 잇사가 여기에 있다”
자연은 영원하다. 우리의 삶과 죽음은 서로 분리될 수 없는 영원함의 일부분에 지나지 않는다. 인간사에서의 이별, 헤어짐에 연연할 필요가 없다. 자연은 항상 우리 곁에 머물지 않는가?
“떠나는 내게 머무는 그대에게 가을이 두 개” 인 것처럼 말이다.
아무것도 아닌 일에 의미를 느끼지 못하면 죽을 때까지 세상은 거의 아무것도 아닌 일의 연속으로 지나가게 된다. “이름 몰라도 모든 풀마다 꽃들 애틋하여라.(산푸)”
우리는 앞모습을 진짜라고 생각하지만 뒷모습이 실상을 더 잘 보여 줄 때가 있다. 뒷모습은 앞모습이 숨기고 있는 허무와 좌절까지 보여주기도 하지! “나팔꽃의 뒷면을 보여주네 바람의 가을(교리쿠)”
인간은 자연과 달리 이기적인 존재다. 우리가 스스로 부정하더라도 자연의 스스러움을 평생을 두고 습득한다고 해도. 그래서 인간의 행위에 의해 자연의 존재를 노예화하고 이에 인간의 불행은 시작되고 그 순수한 기쁨은 사라지지 않을까?
“오늘이라는 바로 이날 이 꽃의 따스함이여”
이 가을 오늘이라는 바로 이날의 따스함을 “백만 광년의 고독 속에서 한 줄의 시를 읽다”로 느껴보기 바란다. 가을바람이 더 새롭게 우리의 귀와 몸을 따스하게 스치게 될 것이다.
하이쿠를 아름답게 해석해 주신 류시화 시인님 감사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