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호수의 일 (양장)
이현 지음 / 창비 / 2022년 1월
평점 :
‘사람은 어째서 자신의 마음을 모를까. 그 무엇보다 온전한 제 것인데.’(287페이지)
지금 나는 내 마음을 모두 안다고 자신 있게 말할 수 있을까? 마음은 온전한 내 것일까? 마음은 단순하지만 또한 복잡하다. 내가 내 마음을 다 안다고 생각했지만 우리는 자신의 마음을 완벽하게 알 수 없다. 알지 못했던 마음을 시간이 지난 후 알게 되기도 한다. 왜 우리는 자신의 마음을 완벽하게 알지 못할까? 내 마음을 정확하게 들여다보려면 어떻게 해야 할까?
‘마음은 호수와 같아.’(350페이지)
나의 마음 속 호수에는 무엇이 잠겨 있을까? 수면 위로 떠오른 것은 눈에 보이지만 수면 아래 깊은 곳에 가라앉은 것들은 눈에 보이지 않는다. 잔잔한 호수를 보면서 아무 일도 없다고 착각하게 되는 이유다. 마음 속 깊이 가라앉은 상처를 누군가 강제로 끌어올리려 한다면 나는 거부감이 들 것 같다. 나 스스로 마음 속 상처를 끄집어내 수면 위로 올릴 용기가 생길 때 마음 속 상처를 치유할 수 있다. 얼어붙은 아이의 마음 속 호수가 조금씩 녹기 시작하고 상처가 수면 위로 떠오른다. 깊고 깊은 호수에 잠긴 내 마음을 들여다보듯 열일곱 살 호정이의 마음 속 호수를 들여다본다.
‘어째서 지나간 일들이 지나가지지 않는 걸까.
어째서 끝난 일들이 끝나지 않는 걸까.
어째서 나는 지나간 일에 엎어져서 울고 있는 걸까.’(221페이지)
사업 실패로 모든 것을 잃은 호정의 부모는 아이를 돌볼 수 없었다. 바쁜 부모 대신 할머니가 호정을 키웠다. 부모의 보살핌을 받지 못했던 어린 호정은 어른들이 무심코 내뱉은 말과 행동에 깊은 상처를 받았다. 어린 시절의 트라우마는 고등학생이 되어서도 영향을 미쳤다. 아무에게도 말하지 못한 상처는 안에서 곪아갔고, 가족들에 대한 마음의 문을 완전히 닫게 만들었다. 곪아가는 상처를 홀로 떠안고 아무에게도 말하지 못하면서 호정의 상처는 더 깊어져갔다. 다친 마음을 숨긴 채 홀로 앓았던 호정의 상처는 숨기려고 해도 조금씩 밖으로 나오기 시작한다. 마음을 닫아버린 호정으로 인해 작은 마찰이 생기면서 호정과 가족 모두가 힘든 시간을 보낸다. 아이의 마음을 알지 못한 부모는 사춘기와 입시로 스트레스를 받아 예민하다고만 생각했다. 호정과 부모 사이에 감정의 골은 더 깊어졌다. 지나간 일들은 기억 속에서 잊혀 지지 않고 진득하게 들러붙어 호정을 가족들과 더 멀어지게 만들었다.
‘레스페베르’
(스웨덴 말로, 여행이 시작되기 전 긴장과 기대로 심장이 뛰는 소리라는 뜻, 123페이지)
어느 날 은기라는 아이가 전학을 온다. 친구 나래 덕분에 가까워진 은기와 호정은 함께 시간을 보내면서 서로에 대해 조금씩 알게 된다. 작은 호기심으로 시작된 은기에 대한 궁금증은 날이 갈수록 하나씩 더 늘어갔다. 자신의 모습을 내보이지 않는 은기를 보면서 호정은 동질감을 느끼고, 은기에게 관심을 갖게 된다. 은기와 호정이 서로에게 마음을 열어가고 있을 때, 가정폭력 피해자였던 은기가 폭력을 휘두르는 아버지를 죽였다는 사실이 알려지면서 학교를 떠나게 된다. 호정은 모든 것이 자신 때문이라는 죄책감에 괴로워한다. 긴장과 기대로 서로에게 호감을 가지기 시작했던 은기와 호정의 만남은 서로에게 큰 상처를 남기고 끝이 났다. 만약 은기의 비밀이 알려지지 않았다면 은기와 호정은 더 가까운 사이가 될 수 있었을까? 답은 알 수 없다. 사람의 감정이란 단순하면서도 복잡해 둘의 마음이 어떤 방향으로 나아갔을지 알 수 없기 때문이다. 여행을 시작하기 전의 설렘과 여행 후의 마음이 꼭 같을 수는 없을 것이다. 하지만 서로에 대한 풋풋한 마음의 싹이 너무 빨리 잘려 나간 것 같아 안타깝다.
‘좀 아팠어. 그치만 괜찮아지고 있어. 괜찮아지려고 해.’(345페이지)
은기가 떠난 후 친구들의 과도한 관심과 배려는 호정을 더 힘들게 했다. 혼자만의 시간이 필요했던 호정이 화를 낸 후 친구들과 사이가 벌어진다. 호정은 자신과 은기를 괴롭혔던 곽근이 친구 나래까지도 힘들게 하고 있다는 사실을 듣게 된다. 수업 시간에 앞자리에 앉은 곽근을 책으로 내리치고 교실을 나간 호정은 은기가 놓고 간 자전거를 가지고 은기의 집을 찾아 무작정 길을 나선다. 집을 찾지 못한 채 호정은 허름한 가게 앞에서 잠이 든다. 저체온증으로 의식이 없는 상태로 발견된 후 병원에서 의식을 찾는다. 우울증과 영양실조 진단을 받고 상담치료를 받은 후 퇴원해 집으로 돌아온다. 치료를 받은 후 닫혔던 마음을 조금씩 열기 시작하면서 가족을 조금은 편하게 대하게 되었고, 친구 나래와도 만나 화해한다. 호정은 선생님과 이야기를 하면서 알게 된 정보를 가지고 은기를 찾아간다. 다시 만난 은기에게 미안하다는 말과 아팠지만 괜찮아지려고 한다는 말을 하면서 은기에게도 ‘그랬으면 좋겠다’는 말을 전한다. 은기에 대한 기억을 마음속에 담은 채 호정은 작별 인사를 하고 돌아선다. 몸과 마음이 성장해가는 사춘기 아이들이 감당하기에 너무나 묵직하고 큰 시련이지만 은기와 호정은 시련을 이겨내기 위해 노력했다. 두 아이의 성장은 혼자만의 노력으로 되지 않았다. 가족과 친구, 선생님의 도움으로 두 아이는 힘든 시기를 잘 이겨낼 수 있었다. 앞으로 두 아이가 어떻게 성장할 수는 알 수 없지만 아픔을 이겨내고 자신을 지켜낸 아이들이 멋진 어른으로 성장할 수 있을 것이라 생각한다. 지금 우리의 아이들은 어떤 아픔을 안고 지금 현재를 버티고 있을까? 어른의 시선으로만 아이들을 바라본다면 아이의 아픔을 제대로 볼 수 없다. 얼어붙은 아이의 마음을 녹이기 위해서는 어른들의 노력이 필요하다. 조심스럽게 아이에게 손을 내밀어 본다. 내 아이가 그 손을 잡아주기를 간절히 바래본다.
『호수의 일』은 열일곱 살 호정과 열여덟 살 은기를 통해 사춘기 고등학생들의 마음 속 상처를 치유해가는 모습을 보여준다. 가족은 서로에게 상처를 주기도 하지만, 또한 상처를 보듬어주고 치유해주기도 한다. 호정은 어린 시절 가족들에게 받은 상처로 인해 마음의 문을 닫았지만, 크게 아픈 후에 가족들과의 행복했던 순간들을 기억하면서 가족에게 마음을 열어간다. 자신을 보호하기 위해 꽁꽁 얼렸던 마음의 호수가 조금씩 녹아가기 시작했다. 은기는 가족인 엄마를 지키기 위해 가족인 아빠를 죽게 만든 가정폭력의 피해자다. 은기에게 가족은 가장 큰 상처를 주는 존재이면서 가장 의지하고 지켜야 하는 존재였다. 가족은 가장 가까운 존재이면서 가장 큰 상처를 주기도 한다. 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가족은 가장 의지가 되고 위안이 되어주기도 한다. 처음 책을 읽을 때는 단순히 사춘기 여고생의 성장 스토리라고만 생각했었는데 읽으면서 계속 가족의 의미에 대해 생각하게 됐다. 가족이라는 프레임이 강력하게 작용한 우리 사회에서 가족에 의한 폭력에 노출된 아이들은 제대로 보호받지 못했다. 더 이상 가족이라는 이유로 폭력이 용서되어서는 안 된다. 가정 폭력 피해자들을 보호할 수 있는 정책이 만들어져야 한다. 라진 샘 카톡 프로필에 ‘끝내 하지 못한 말들’과 ‘미안하다와 사랑이라는 꽃말을 가지고 있는 보라색 히아신스’는 어쩌면 가정폭력으로 고통 받는 이들을 외면한 이들에게 하고 싶은 작가의 메시지가 아닌가 생각한다. 용기를 내서 다시 세상으로 나온 은기와 같은 피해자들이 밝은 햇살 아래 활짝 웃을 수 있는 세상을 꿈꿔본다. 그렇게 되기 위해서 가정 폭력 피해자를 보호할 수 있는 더 강력한 법적 제도가 만들어져야 한다. 더 이상 고통 받는 이들이 없는 세상이 될 수 있기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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