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인 (양장) 소설Y
천선란 지음 / 창비 / 2021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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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느 날, 식물들의 목소리가 들리기 시작했다.”

 

문을 닫은 사료 공장은 땅 속 깊이 폐기물을 묻은 상태로 죽은 땅이 되었다. 공장이 철거된 후에도 땅은 살아나지 못했고, 사람들이 몰래 쓰레기를 버리는 땅으로 남았다. 어느 날 한 여자가 풀 한 포기도 자라지 않는 죽은 땅을 사서 화원을 하겠다고 나타난다. 한 달 넘게 땅에서 폐기물을 파고 또 파는 과정을 거친 후 사람들의 걱정과는 다르게 땅은 살아났다.

 

한 곳에 정착하지 않고 정처 없이 떠돌던 지모는 선연시에서 십칠 년 동안 살고 있다. 그 이유를 묻는 나인에게 너를 위해서라 답한다. 어느 날부터 소리가 들리기 시작하고, 손가락 끝에서 새싹이 돋아나면서 나인은 혼란스러워한다. 원인을 알 수 없어 걱정하던 나인 앞에 한 소년이 나타난다. 소년 해승택은 나인과 자신이 누브족이고 지구인이 아닌 진화한 식물이라 말한다. 화원의 흙이 파랗게 빛나는 이유는 나인이 그렇게 만든 것이라 말하면서 나인이 식물이기 때문에 식물들의 소리를 듣기 시작했다고 말한다. 나인은 지모에게서 자신이 생명의 씨앗으로부터 태어난 아이라는 사실을 알게 된다. 나인은 지구인이 아닌 외계인이라는 비밀 앞에서 정체성의 혼란을 겪는다.

 

초거성 리겔 근처에 있던 지구만 한 행성, 그곳에 살았던 식물처럼 땅에서 자라는 종족 누브는 수명을 다한 행성을 떠나 그 일부가 지구에 도착했다. 지모와 나인은 누브인의 후손이다. 승택은 지모를 통해 누브 행성이 멸망하기 전 이주단계에서 대량 학살이 있었다는 충격적인 사실을 알게 된다. 무사히 행성을 탈출한 두 대의 우주선도 식량이 부족해지면서 한 대의 우주선은 약탈당하고 식량을 빼앗겨 결국 지구에 도착한 우주선은 한 대 뿐이었다. 이러한 사실을 숨기기 위해 누브 대표들은 누브의 역사를 기록한 책들을 없앴다. 지모는 누브 지도자들이 숨긴 추악한 진실을 나인이 모른 채 지구에서 나인이 행복하게 살아갈 수 있기를 바랬다. 나인의 힘을 이용하려는 누브인들로부터 나인을 보호하기 위해 지모는 나인의 곁을 떠난다.

 

사실을 알고 난 후 산으로 간 나인은 푸른빛으로 식물들에게 에너지를 나누어 주던 순간 또 다른 존재의 소리를 듣게 된다. 죽기 전 살아 있는 상태로 나무와 한 몸이 된 금옥이라는 존재가 나인에게 말을 걸어온다. 일제시대 때 총에 맞아 사망한 금옥은 살아 있는 순간 나무와 하나가 되어 영혼이 나무 안에 갇혔다. 자신의 말을 알아듣는 나인에게 어떤 존재냐 묻는 금옥에게 나인은 자신이 하늘에서 왔다고 말한다. 금옥은 사람과 같은 모양을 하고 있으면 됐다고, 복잡하게 생각할 필요 없다고 대답한다. 나인은 금옥에게서 실종된 원우가 산에 묻혔다는 사실을 알게 된다. 원우의 일을 알게 된 나인은 아무도 믿어주지 않을 것이라는 사실 앞에서 절망에 빠져 고민한다.

긁어 부스럼을 만든다’(213페이지)

외계인이라는 사실을 밝힐 수 없어 원우의 이야기를 외면해야 한다고 생각했지만, 2년이 넘도록 아들을 찾기 위해 전단지를 붙이러 다니는 원우 아버지를 보면서 나인은 진실을 밝히기로 마음먹는다. 승택은 나인에게 엮이면 피곤해지니 모르는 척해야 한다고 말한다. 나인은 답답하게 사는 것보다 피곤하게 사는 쪽을 선택하겠다고 답한다. 승택은 죽은 원우의 일에 끼어드는 나인을 이해할 수 없었다. 가만히 있어도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는데 굳이 끼어들어 긁어 부스럼을 내고 있다고 생각했다. 나인은 산의 소리를 들을 수 있게 된 후 원우에게 일어난 모든 일을 알게 되고, 원우의 죽음에 책임이 있는 도현과 도현의 주변을 조사하기 시작한다. 처음에는 나인을 말리던 승택도 나인을 도와 진실을 밝히기 위해 함께 한다. 나인이 파란 빛을 뿜는 순간을 목격한 미래와 현재에게 나인의 정체를 밝히고, 친구들도 나인의 말을 믿고 나인을 돕기 시작한다.

 

이건 아이인 적 없다는 듯이 구는 어른들이, 단 한 번도 동화를 믿어 본 적 없다고 착각하는 어른들이, 환상을 꿈꿔 본 적 없다고 믿는 우매한 어른들이 만든 끔찍한 이야기’(353페이지)

권도현의 엄마는 외계인을 믿는다는 원우가 아들과 어울리는 것을 원치 않았다. 외계인을 믿는다는 사실보다 원우가 가난한 동네에 살고 있다는 것이 더 마음에 들지 않았다. 아들과 원우가 계속 어울리는 것이 싫었던 도현의 엄마는 원우에 대한 나쁜 소문을 퍼트려 불쌍하고 이상한 아이로 만들어버린다. 사람들이 원우가 이상한 아이라고 말하기 시작하면서 도현도 원우와 거리를 두기 시작한다. 그 모든 것이 쌓이고 쌓여 도현은 원우에게 화를 내고 원우를 밀쳐 죽음에 이르게 만들었다. 우매한 어른이 만든 끔찍한 이야기는 현실에서 끔찍한 결말로 끝이 났다.

 

죄책감의 유효한 마지막 기간’(388페이지)

지모는 죗값을 무를 수 있는 유효 기간을 점이 지대라 말한다. 이 기간이 지난 후 죄를 지은 사람은 더 이상 아무런 죄책감을 느끼지 않고 같은 짓을 반복하는 악마가 된다고 말한다. ‘원우를 죽게 한 도현과 원우의 죽음을 숨긴 도현의 부모, 원우의 죽음을 통해 이득을 챙긴 사람들, 누브족의 만행을 숨기기 위해 모든 것을 은폐하고 자신들의 이익을 위해 힘을 가진 아이를 희생하려는 승택의 아버지는 모두가 점이 지대에 있는 사람들이다. 죄책감을 느낄 수 있는 마지막 기간인 점이 지대를 넘어가면 이들은 자신들의 행동이 죄라는 생각도 못한 채 더 많은 죄를 짓게 된다. 도현은 점이 지대를 넘기 직전에 이른다. 도현의 직접적인 진술이 필요하다는 것을 깨닫고 도현과 산에서 만날 약속을 한 나인은 도현을 만나 파란빛을 보여주면서 외계인이 존재한다는 것을 알려준다. 도현은 사고 당시 원우가 살이 있었다는 것과 원우의 말처럼 외계인이 존재한다는 것을 알고 난 후 충격에 빠지고, 직접 경찰서를 찾아가 죄를 자백하고 용서를 구한다. 도현의 죄를 숨기고 그를 이용했던 이들의 죄도 모두 밝혀져 벌을 받는다.

 

가슴이 먹먹해지면서 눈물이 흐른다.

돌아오지 않는 아들을 기다리는 원우의 아빠와 원우의 비밀을 알게 된 나인, 나인을 지키기 위해 비밀을 지키려는 지모를 보면서 그들의 감정이 가슴 깊이 와닿아 울컥했다. 이야기를 읽을수록 가슴이 묵직하게 짓눌리는 느낌이 들었다. 이러한 감정을 공감하면서도 내가 나인처럼 용기 있게 행동할 수 있을지는 자신할 수 없었다. ‘인간들은 거대한 슬픔 앞에 한 발 물러났다(340페이지)’라는 말은 너무나 거대한 슬픔 앞에 서면 무엇을 어찌해야 할지 알 수 없기 때문에 물러나는 것이 아닐까 생각한다. 슬픔의 크기도 감당할 수 있어야 견디고 위로하고 해결하려는 의지가 생기는 것 같다. 거대한 슬픔 앞에 인간은 무력하다. 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거대한 슬픔을 외면하지 않고 도우려는 나인과 같은 이들도 존재한다. ‘나인은 타인의 아픔과 슬픔을 공감하고 그 슬픔을 외면하지 않고 도우려고 노력하는 아이다.

나는 나인이야. 아홉 개의 새싹 중에 가장 늦게 핀 마지막 싹이라 나인이 됐어.

더는 생명이 태어날 수 없는 척박한 땅에서 나는 가장 마지막에 눈을 떴어.

그러니까 나인은, 기적이라는 뜻이야.’(477페이지)

척박한 땅에서 기적처럼 피어난 나인은 사람들 모두가 외면했던 진실을 따뜻한 마음과 용기를 가지고 세상에 알렸다. 실종된 아들을 찾기 위해 전단지를 붙이러 다니는 준우 아버지의 모습을 지나치지 못하고 전단지를 받아와 화원을 방문한 손님들에게 나눠준다. 나무와 영혼이 합쳐진 금옥과 식물들의 소리를 듣고, 준우가 아버지 곁으로 돌아갈 수 있도록 노력했다. 진실을 밝히려는 나인을 보면서 원우의 일을 그냥 덮기를 원했던 승택도 나인을 돕기 시작하고, 미래와 현재의 마음도 움직인다. 그렇기에 나인은 기적이다. 나인의 마음은 식물과 산의 마음까지 움직이게 만들고, 사람들의 마음까지도 움직이게 하는 힘이 있다.

 

누군가의 말 한마디가 한 사람의 인생을 존재하게 한다.’(476페이지)

나인은 자신의 존재가 지구인이 아닌 외계인이라는 사실을 알고도 자신을 믿어준 미래와 현재가 있었기 때문에 지구에서 살아갈 의미를 찾는다. 나인은 돌아오지 않는 지모를 기다리지만 지모는 돌아오지 않고, 지모가 보냈다는 라현이 찾아오고, 함께 가자는 라현의 손을 잡는다. 어쩌면 지모를 만날 수 도 있다는 기대감을 안고서. 나인의 앞에 어떤 일들이 기다리고 있을지는 알 수 없지만, 나인은 사랑하는 친구들과 지모가 있기에 자신의 존재를 믿고 미래로 나아갈 수 있을 것이다. 나를 믿어주는 존재는 살아가는 데 가장 강력한 힘이 되어준다. 그렇게 우리는 존재의 의미를 찾는다.

 

나인은 외계의 존재가 등장하는 판타지 소설이지만, 지금 현재를 살아가는 이들의 모습을 담았다. 누군가의 슬픔을 공감하지 못하고 외면하는 사람들과 자신의 이기적인 욕심을 채우기 위해 죄를 숨기려는 이들의 모습은 우리가 외면하고 싶은 우리들의 모습일 수도 있다. 나인을 읽으면서 다르다는 이유로 우리는 얼마나 많은 이들을 외계의 존재로 분류하고 외면하고 있는가에 대해 생각했다. ‘외계’, 우리는 선을 긋고, 선 밖의 존재들을 밀어내고 있는 건 아닐까? 지금 우리는 어떤 선을 긋고, 어떤 이들을 외계로 밀어내고 있을까? ‘나인은 우리에게 나와 우리, 그리고 자연과 모두가 연결되어 있다는 것을 알게 한다. 살아 있는 모든 것은 귀하고 소중한 존재다. 나인은 우리에게 가장 기본적인 진실을 일깨워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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