후각과 환상 - 의학자가 걷고, 맡고, 기록한 세상의 냄새들
한태희 지음 / 중앙books(중앙북스) / 2021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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향기는 상상 속에서 완성된다······

향기는 자유다.”

(141페이지, 겔랑 수석조향사 티에리 바세)

 

어린 시절 맡았던 매화꽃 향기는 기억 속 깊이 자리하고 있다. 어른이 된 지금도 매화꽃을 보면 어린 시절 텃밭에 심어져 있던 매화나무가 떠오른다. 추운 겨울이 지나고 피어난 매화꽃 향은 추위를 싫어하는 나에게 따뜻한 봄이 왔다는 신호 같아 더 반가운 꽃이고 향이었다. 음식이나 옷, 수건 등을 먹거나 사용하기 전, 나는 항상 냄새를 맡는다. 어린 시절 엄마는 개도 아니고 왜 냄새를 맡느냐고 핀잔을 주시곤 하셨지만, 나는 지금도 이 습관을 고치지 못하고 있다. 매화꽃 향과 달리 인공적인 향은 후각을 너무 과하게 자극해 뇌와 감정에까지 영향을 미친다. 매니큐어의 향을 견디지 못해 매니큐어도 바르지 못하고, 바디워시나 샴푸, 로션도 향이 거의 없는 것을 사용한다. 장미향은 좋아하지만 장미향 향수나 바디워시, 로션 등은 싫어한다. 라일락, 쟈스민, 찔레꽃 등등의 꽃 향을 좋아하지만 역시나 이 향을 흉내 낸 제품의 향은 견디지 못한다. 왜 나는 자연의 향을 좋아하고, 인공의 향은 힘들어할까? 후각은 신기하다. 같은 향을 맡고도 사람들은 다른 반응을 보이고, 다른 향을 기억 속에 저장한다. 왜 사람마다 좋아하는 향과 기억하는 향은 다를까? 냄새가 향기가 되기도 하고, 악취가 되기도 하는 이유는 무엇일까? ‘의학자가 걷고, 맡고, 기록한 세상의 냄새들’(책 표지)의 기록 후각과 환상에서 답을 찾아보려 한다. 의학자이자 작가인 한태희는 의학자의 입장에서 후각과 기억, 감정의 생리적 연관성을 찾기 위해 여행을 떠났다. 저자는 후각과 환상을 통해 지구촌 곳곳의 삶이 고유의 냄새들을 만들어 가는 풍경, 냄새들이 그 지역을 특징지어 가는 과정’(241페이지)냄새와 후각이 주는 풍부한 상상력과 감성적 즐거움’(241페이지)을 함께 나누고 싶었다고 말한다. ‘후각이 주는 풍부한 상상력과 감성적 즐거움이란 어떤 것인지 궁금해 책을 읽기 시작한다.

 

<향의 기원>

중동과 북아프리카의 역사를 여행 중 경험한 향에 대한 이야기와 함께 적고 있다. 이집트 투탕카멘 왕의 무덤에서 발굴된 유물의 화려함은 사람들을 매료시켰다. 발굴된 유물 중에는 향수가 담긴 예쁜 항아리가 있었다. 무덤에서 발견된 향수는 3000년이 지났는데도 희미한 향기를 간직하고 있었다고 한다. 향수제조업자들은 투탕카멘의 향수라는 이름으로 고대 향수를 재현해 낸다. 창밖으로 피라미드가 보이는 카이로 교외의 호텔에 머무르던 저자는 호텔 근처 전통 향수가게를 찾아간다. 몇 대째 이어서 가게를 하고 있는 주인은 어디서 어떻게 살았는가, 무슨 걱정이 있는가, 건강은 어떤지 등에 대한 질문을 한다. 이렇게 20~30분간 대화를 한 후 주인은 향을 조합한다. 향수를 구매하는데 이런 질문을 왜 하는지 의문이 들 수도 있다. 하지만 어린 시절 향에 대한 기억에 위안을 받아 본 적이 있는 나는 향수 가게 주인이 향을 조합하기 전에 손님과 오랜 시간 대화를 나눈 이유를 알 것 같다. 주인은 손님에게 기억 속 추억을 떠올릴 수 있는 향을 만들어주고 싶었기 때문이라 짐작해본다.

 

아랍에서 발원한 커피는 유럽보다 이집트에 먼저 전파됐다. 카이로 거리마다 커피 하우스가 세워진 모습은 많은 카페들이 줄지어 있는 현대 우리나라 도시의 모습과 비슷해 보였다. 오만 내륙의 오아시스 니즈와를 여행한 저자는 커피 이야기를 한다. ‘커피콩을 볶아 우려내는 방식이 예멘에서 발전했다고 하는 부분을 읽는 순간 기억 속 커피 볶는 냄새가 떠올랐다. 집 근처에 있는 카페 중 가장 좋아하는 카페에서는 직접 커피를 볶는다. 카페에 들어갔을 때 커피 볶는 냄새를 맡는 순간 뇌는 커피를 갈망한다. 커피 향을 연상시키는 내용을 읽기만 했는데도 커피가 미친 듯이 마시고 싶다. ‘갓 볶은 커피의 원두를 갈 때, 날카롭게 신선한 향이 공기 중에 퍼지고’(40페이지), 그 순간 커피 향에 이끌려 카페에 발을 들인다. 침이 고이는 이 현상은 뭘까? 지금 나는 침이 고인다.

 

나의 버킷리스트 중 하나인 이스탄불 아야 소피아(성 소피아 대사원)’는 처음에는 그리스 정교회 성당으로 건설되었지만 전쟁으로 이슬람 왕조가 들어서면서 이슬람 모스크 사원이 된다. 사원에서 박물관으로 바뀌었다가 현재는 모스크로 용도 변경되어 사용되고 있다. 사람이 바뀌고 나라는 바뀌어도 아야 소피아는 그 자리에 존재하면서 모든 것을 지켜봤을 것이다. 아야 소피아를 스쳐 지나갔을 수많은 사람들 중 한 사람인 저자는 이스탄불의 한 전통 음식점을 방문한다. 저자가 주문한 고기의 향과 향신료의 조화가 일품’(64~65페이지)이라는 가지 케밥의 향과 맛이 궁금하다. 전통디저트와 터키 커피를 마시는 것으로 식사를 마친 저자는 깊고 진한 향이 오랜 여운을 남긴다고 말한다. 저자에게 이 향은 이스탄불을 떠올리게 하는 향으로 기억될 것이다. 한 공간을 흐르는 향은 우리의 뇌에 각인되어 다른 장소에서 같은 향을 맡았을 때 연상 작용을 일으키기도 한다. 인간의 감각과 기억은 신비롭다.

 

<향의 진화>

유럽 여행으로 이야기를 이어간다. 중동과 아프리카에서 전해져 온 향은 유럽으로 건너와 전 세계로 퍼져나간다. 유럽인들은 향을 어떻게 활용하고 즐겼을까? 향은 유럽 역사에 어떤 영향을 미쳤을까? 유럽인들은 십자군 전쟁으로 동양의 향료와 목욕 문화를 접하게 된다. 공공위생과 하수 시설이 제대로 갖춰지지 않은 파리와 같은 대도시는 사람들이 몰려들면서 악취를 심하게 풍겼다. 개인의 청결과 목욕을 동양의 이단적이고 퇴폐적인 문화로 여겼던 유럽인들은 청결하지 않은 몸의 강한 체취를 자연스러운 것으로 생각했다. 향수를 사용했던 귀족들은 체취를 강조하기 위해 사향과 같은 동물성 향으로 유혹적 분위기를 연출한다. 이러한 생활습관으로 인해 도시에 전염병이 발생하면서 많은 사람들이 목숨을 잃었다. 이때부터 세균학과 보건 위생이 중요해지기 시작한다. 육체의 청결함이 강조되면서 사향과 같은 동물성 향수를 사용하는 사람들이 줄어들기 시작했다. 십자군 원정대가 동양의 향수와 제조법을 가져가면서 유럽인들은 이국적 향기에 빠져든다. 동양의 향수 문화를 접한 조향사들은 은은한 꽃, 식물 향을 사용해 향수를 만들기 시작한다. 포도주 증류과정에서 나오는 알코올과 향료를 함께 사용해 향이 오랫동안 지속되는 향수를 만들어 낸다. 이것이 유럽 최초의 향수다. 허브 로즈메리와 타임에 브랜디를 섞은 헝가리 워터라 불리게 된 향수는 헝가리 엘리자베스 여왕에게 헌정된다. 헝가리 워터는 프랑스로 전해지고, 1709년 최초의 오드 콜롱이 출시된다.

 

전쟁은 많은 사람을 죽게 만드는 끔찍한 것이지만 전쟁을 통해 다양한 문화의 교류가 이뤄진다. 십자군 전쟁은 동양의 향수 문화를 서양에 전파해 서양의 향수 문화를 변화시켰다. 다양한 향신료와 식재료들도 전파되면서 새로운 식문화가 만들어지고 또 하나의 문화로 자리 잡는다. 대표적인 사례로 헝가리 파프리카는 중세 시대 오스만 제국으로부터 전파되어 헝가리를 대표하는 식재료 중 하나가 되었다. 고기와 채소에 파프리카를 넣어 끓인 굴라시는 얼큰한 육개장 냄새를 풍긴다는 저자의 글을 읽으면서 엄마의 육개장 냄새가 생각났다. 우리는 맛과 함께 향을 통해 음식을 기억하게 된다. 시간이 지난 후 길을 걷다 기억 속 음식 냄새가 후각을 자극하면 나도 모르게 허기가 지고 침이 고인다.

 

책을 읽는 동안 향에 대한 이야기보다 음식에 대한 이야기를 더 집중해서 읽게 된다. 세비야를 방문한 저자가 커피와 오렌지커스터드 케이크를 먹으면서 입안에 퍼지는 상큼한 향을 음미했다고 할 때는 오렌지의 향을 떠올렸다. 오렌지, 레몬, 라임, 자몽 등 감귤류 나무의 꽃과 열매로 에션셜 오일을 추출해 향수의 상쾌한 초기 향(톱 노트)을 형성하는 주재료로 사용한다는 내용을 읽을 때도 향수의 향보다 감귤류 오일로 만든 음료의 향이 더 궁금했다. 오스티아에서 맞이하는 아침에 카페테리아의 빵 굽는 냄새를 맡으면서 커피와 레몬 크루아상, 티라미수를 음미하고 있는 저자의 모습은 상상하는 것만으로도 허기가 진다. 음식에 대한 평을 읽기만 해도 음식 냄새를 상상하게 된다는 것이 신기하다. ‘아는 맛이 무섭다라는 말을 아는 냄새가 무섭다로 바꿔도 될 정도로 먹어본 음식을 뇌는 냄새와 맛으로 기억한다. 빵 굽는 냄새라는 글을 읽고 나의 뇌는 고소하고 부드러운 빵 맛을 생각함과 동시에 먹고 싶다는 신호를 보낸다.

<향과 나>

아시아로 이야기를 잇는다. 저자는 바다 속 정어리 떼를 보다가 맡아지지 않는 정어리 냄새를 맡았다는 생각을 한다. 저자가 경험한 후각적 연상이나 환상은 감각의 왜곡으로 임산부의 후각 변화가 가장 대표적인 사례라고 한다. 임신을 했을 때 밥을 할 때 나오는 증기에서 비린내가 맡아져 한동안 힘들었던 경험이 있다. 이것도 내 후각이 왜곡되어 인식된 것일까? 강원도 곰배령을 향하는 길을 가던 저자가 양치식물이 무성하다’(160페이지)라고 했을 때, 어린 시절 맡았던 고사리 냄새가 떠올랐다. 엄마가 밭에 갈 때마다 따라가 밭 옆 야산에 올라 고사리를 끊을 때면 스트레스가 확 풀리는 느낌이 들어 자주 갔었다. 나무와 꽃의 향을 맡으면서 한참을 고사리를 끊다가 엄마가 부르는 소리를 듣고 산을 내려왔었다. ‘양치식물이란 단어에 고사리 냄새를 연상해낸 것도 후각적 왜곡 현상 중 하나일까? 후각과 환상은 무의식 속에 자리한 후각과 관련된 기억을 끄집어내게 한다. 하지만 기억을 떠올리게 했던 냄새는 곧 맡아지지 않게 된다. 냄새를 감지해낸 후 예민해진 후각은 후각 피로에 빠져 더 이상 냄새를 맡지 못하게 된다고 한다. 어떤 장소에 들어갔을 때 처음에 맡아졌던 냄새들이 익숙해져 맡아지지 않는다고 생각했었는데 그 이유가 후각 피로 때문이라는 것을 알게 됐다. 우리가 몸과 마음을 혹사시킬 때 피로감을 느끼는 것처럼 감각도 피로를 느낀다는 것이 신기하다.

 

사람들이 냄새를 맡고 악취와 향기를 나누는 기준은 무엇일까? 악취와 향기가 인간이 만든 개념일 뿐이라면 사람들마다 악취와 향기를 나누는 기준이 있을 것이다. 이러한 기준은 개인의 기준도 있지만 사회문화적 기준의 영향도 있다고 생각한다. 살고 있는 지역의 기후와 관습에 따라 음식문화가 만들어진다. 다른 문화권에 사는 사람들에게는 악취를 풍기는 음식이지만 그 음식을 자주 먹고 익숙한 사람들에게는 향기로운 음식일 것이다. 그렇다면 악취와 향기를 나누는 기준은 주관적인 것일까, 객관적인 것일까? 나는 주관적이라 생각한다. 하지만 이 질문에 대한 답은 사람과 상황에 따라 달라진 것이라 생각한다.

 

후각과 환상은 도시의 역사, 향의 역사, 음식의 역사, 건축, 미술, 문학, 의학, 과학 등등 모든 장르가 한 권의 책 안에 들어 있다. 책을 읽고 난 후 한태희작가가 궁금해지기 시작했다. 역사공부와 답사 여행을 좋아하는 의학자이자 작가인 한태희 작가는 어려울 수 있는 역사를 기행문 형식으로 독자가 더 쉽게 이해할 수 있도록 설명한다. 만약 책에서 소개된 여행지를 여행하게 된다면 나는 이 책을 꼭 챙겨갈 것이다. 책에서 소개된 장소를 방문하고, 소개된 음식들을 모두 먹어 보고 싶다. 후각과 환상을 읽는 동안 가상의 후각이 발동하는 경험을 했다. 이것도 저자가 말한 감각의 왜곡 중 하나일 것이라 생각된다. 시각을 통해 들어온 글이 후각을 자극하는 생소한 경험은 낯설었지만 흥미로운 경험이었다. 후각과 환상을 읽고 난 후 여행은 보는 것만이 다가 아닌 맡아지는 것도 함께 한다는 것을 깨달았다. 후각이라는 감각을 다양한 시각에서 바라보게 하는 책이다. 감각하는 모든 이들과 함께 읽고 이야기를 나눠보고 싶다. 한태희 작가의 또 다른 이야기들도 읽고 싶다. 후각과 환상 2도 출간될 수 있기를 희망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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