금기어가 된 조선 유학자, 윤휴 - 왕과 사대부, 그리고 사관마저 지우려 했던 조선 최초의 자유로운 사상가
이덕일 지음 / 다산초당(다산북스) / 2021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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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는 시대의 금기가 되었다.’(12페이지)

 

청나라가 혼란스러운 시기 효종은 북벌을 논의한다. 하지만 얼굴에 난 종기가 원인이 되어 급서하면서 북벌 계획은 무산된다. 효종의 뒤를 이은 현종은 북벌에 적극적으로 나서지 않았다. 윤휴는 <대의소>를 올려 선왕(효종)의 뜻을 받들어 북벌을 해야 한다고 주장한다. 청나라에 반란을 일으킨 세력과 연합해 청나라에 대항해야 한다는 것이다. 당시 서인들은 북벌 논의 자체를 금기시했다. 명나라를 받드는 것을 대의명분으로 내세워 임금을 폐위시킨 서인들은 왜 북벌 논의를 금기시했을까?

 

병자년 후금이 청으로 개칭한 후 정묘년에 맺은 형제 관계를 군신관계로 바꾸자 요구한다. 정묘호란을 겪은 조선은 9년이 지났음에도 아무런 대책을 세우지 못했다. 윤휴는 강화도로 들어가는 방안만을 가지고 있는 대청 정책을 지적하는 상소를 적지만 어린 나이에 말을 삼가야 한다며 말리는 모친의 말을 듣고 올리지 못했다. 병자호란으로 인조가 청에 항복했다는 소식을 들은 윤휴는 통곡하면서 과거에 응시하지 않겠다 말한다. 만약 벼슬을 하더라도 이 치욕을 잊지 않겠다 다짐한다. 이후 윤휴는 경서를 읽고 또 읽으면서 공자와 맹자 등을 스승 삼아 학문을 탐구하고, 학문 실력을 듣고 찾아온 사대부들과 학문과 시사를 논하기도 한다. 효종의 북벌 의지는 양병보다 백성들을 살리는 양민이 중요하다’(85페이지)는 이유로 효종의 군비 강화책을 반대하는 서인들에 의해 가로막힌다. 효종은 북벌을 주장하는 윤휴를 등용하기 위해 벼슬을 제안하지만 윤휴는 계속 효종의 제안을 거절하고 조정에 나서지 않는다. 효종의 갑작스러운 죽음으로 북벌은 더 이상 논의되지 못한다. 효종의 죽음을 둘러싸고 인조의 계비 자의대비 조씨의 상복 착용 기간을 놓고 예송논쟁이 벌어진다. 송시열을 중심으로 한 서인들은 효종이 둘째 아들이라는 이유로 자의대비의 상복 착용 기간을 1년복(기년복)으로 주장한다. 이에 윤휴는 왕실의 법도는 사가의 법도와 다르기 때문에 3년복이 맞다는 의견을 내놓는다. 예송논쟁이 격해지자 현종은 예송에 대한 논쟁을 금지시킨다. 서인들은 자신과 견해가 다른 사람을 맹렬하게 공격하고 이들과 교류하는 사람들까지도 공격했다. 서인들이 3년복설을 주장하는 인물들을 죽이거나 귀양 보내고 그들을 고립시키려 하는 상황에서도 왕조의 정통성에 대한 문제였기 때문에 윤휴는 이 주장을 꺾을 생각이 없었다. 서인들의 세력이 왕보다 더 컸던 시대를 살아가는 윤휴에게 유일하게 위안이 되는 것은 학문이었다. 1차 예송논쟁 이후 현종 15년에 현종의 모후 인선왕후 장씨가 승하한다. 인조의 계비 자의대비 조씨의 상복 착용 문제가 다시 논쟁거리로 떠오른다. 15년 전 1차 예송논쟁이 함께 공론화되기 시작한다. 현종은 신료들에게 1차 예송과 2차 예송의 근거를 말하라 지시했지만, 이들이 든 근거는 논리적으로 앞뒤가 맞지 않았다. 분노한 현종은 왕보다 자신들이 속한 당을 우선시 하는 관료들을 대거 물갈이한다. 이 시기 현종의 건강이 갑자기 나빠지기 시작해 결국 현종은 승하한다.

 

열네 살에 즉위한 숙종은 1차 예송 논쟁으로 인해 쫓겨났던 남인들을 불러들인다. 허목과 함께 윤휴에게도 관직을 제수하지만 윤휴는 늙고 병들었다는 이유로 사양한다. 윤휴는 숙종의 부름을 여러 번 거절하다 북벌을 위해, 그리고 왕의 부름에 계속 거절하기 힘들어 조정에 출사한다. 윤휴는 북벌을 위해 백성들이 함께 하기를 원했다. 이를 위해 다양한 정책을 제안한다. 첫째, 신분에 따라 다른 재질로 호패를 가지고 다녔던 호패제를, 모두가 종이로 된 지패를 가지고 다니는 지패제로 바꾸는 정책을 시행한다. 윤휴는 지패법과 함께 양반들도 군포를 부담해야 한다는 호포법 시행을 주장한다. 하지만 양반들의 강한 반발로 인해 호포법은 시행되지 못했다. 둘째, 서자들에 대한 차별 철폐를 주장한다. 적자와 서자를 막론하고 사대부가의 자제들은 총부에 소속시켜 군역 의무를 부과하는 것과 우수한 자들을 관리로 등용할 것을 제안한다. 하지만 이 또한 사대부들의 반발에 가로막혀 시행되지 못한다. 셋째, 북벌을 위해 전차 제작을 주장한다. 기병 중심의 청나라 군대를 이기기 위해서는 전차가 필요하다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하지만 이 또한 조정 신료들의 반대에 부딪혀 무산되고 만다. 넷째, 만과를 실시해 신분과 관계없이 무과시험에 응시할 수 있게 해야 한다고 주장한다. 윤휴가 제안한 만과는 북벌 인재를 구하는 핵심 사업으로 추진한 것이다. 윤휴가 제안하는 대부분의 정책은 북벌을 추진하기 위한 정책들이었다. 하지만 이러한 윤휴의 제안들은 서인과 남인 탁남의 반대에 가로막히고, 북벌에 소극적인 자세를 보이는 숙종으로 인해 제대로 시행되지 못했다. 자신이 제안한 정책들이 받아들여지지 않거나 시행 후 중단되는 일이 반복되면서 윤휴는 자신의 역할이 끝났다는 생각을 하게 된다.

 

서인들은 남인에게 뺐긴 권력을 되찾기 위해 남인 허적과 윤휴를 공격하기 시작한다. 허적의 서자 허견을 모함해 허적을 끌어내리려 했다 실패하고, 윤휴가 금송을 베어 집을 지었다는 혐의를 씌우지만 입증하지 못해 무혐의로 마무리된다. 하지만 숙종의 마음은 남인에게서 조금씩 멀어지기 시작하고 있었다. 오삼계의 난은 오삼계의 죽음으로 인해 와해되기 시작한다. 이때 조선에서는 소현세자의 후손을 왕으로 추대하려한다는 흉서가 올라오고, 송시열의 문인 송상민은 송시열을 옹호하고 남인을 비난하는 상소를 올린다. 흉서의 장본인 이유정과 그 가족은 사형을 당한다. 이유정의 흉서의 책임을 송시열에게 묻고 처벌하려 했지만 숙종은 이를 받아들이지 않는다. 숙종은 서인들을 잘못 건드렸을 때 왕위에 위협이 될 것이 두려워 송시열을 처벌하지 않고 남인 정권을 정리하기 시작한다. 숙종은 조종 대신들을 서인들로 교체한다. 힘을 얻은 서인들은 남인들을 제거하기 시작한다. 허적의 아들 허견을 역모죄로 몰아 허적을 잡아들이는 데 성공하지만 허적의 죄를 입증해내지 못한다. 서인들은 아들 허견의 부녀자 겁탈사건의 재수사를 열어 그 사건을 빌미로 허적을 사사한다. 유배되어 있던 윤휴도 대비를 조관하라고 했다는 것과 부체찰사가 되어 병권을 잡으려 했다는 것을 혐의로 서울로 압송한다. 윤휴의 죄를 입증하지 못한 서인과 숙종은 윤휴를 형신하지만 끝내 죄를 밝히지 못하고 다시 유배형을 내린다. 서인과 숙종은 그를 반드시 죽이기 위해 여러 공작을 시도하고 억지에 가까운 이유를 들어 윤휴에게 사약을 내린다. 북벌을 꿈꾸며 백성들의 곤궁한 삶을 위해 노력했던 윤휴의 더 나은 조선을 만들고자 하는 꿈은 결국 무산되고 그는 죽임을 당한다.

 

지패법과 호포법’, ‘서자들에 대한 차별 철폐등의 주장에 대해서는 윤휴의 의견에 찬성하지만, 북벌에 대해서는 찬성할 수 없다. 두 번의 호란으로 가장 많은 고통을 받은 것은 백성들이다. 전쟁을 일으키기 위해서는 전쟁 준비를 위한 많은 자금과 물자가 필요하다. 이를 감당하는 것 또한 백성들의 몫이다. 청나라가 혼란스러운 상황이라 하지만 조선이 과연 청나라의 군사력을 감당할 수 있을지도 의문이다. 또다시 청나라에 패배한다면 그 결과를 감당해야 하는 것도 백성들이다. 윤휴는 백성들이 북벌에 주체가 될 수 있도록 여러 법과 정책을 시행하거나 제안했지만, 과연 백성들이 북벌에 찬성할지도 의문이다. 내가 만약 그 당시를 살고 있는 백성이라면 전쟁에 찬성하지는 않을 것 같기 때문이다. 나는 북벌에 대한 생각에는 동의하지 못하겠지만, 백성을 사랑하는 애민사상과 사대부의 의무를 주장하고 모두가 평등한 사회를 꿈꿨던 윤휴의 사상은 현대에도 모두가 배워야 할 점이라 생각한다. 백성을 사랑하고, 학문을 사랑하고, 나라를 사랑했던 유학자 윤휴의 삶은 당시에 인정받지 못했지만, 현대의 우리에게 많은 것을 깨닫게 한다. 금기시 되었던 윤휴의 이름을 기억해야 하고, 기록해야 하는 이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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