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래된 질문 - 내 안의 두려움을 마주하는 인생의 지혜를 찾아서
다큐멘터리 〈Noble Asks〉 제작팀 외 지음 / 다산초당(다산북스) / 2021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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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 표지에 적힌 내 안의 두려움을 마주하는 인생의 지혜를 찾아서라는 문구가 마음 속 한 부분을 건드린다. ‘내 안의 두려움’, 어떤 두려움이 내 마음을 갉아먹고 있을까? 두려움이라는 감정이 부정적이기만 한 감정일까, 이 감정은 삶을 힘들게만 하는 것일까에 대해서도 의문이 든다. 두려움은 내 안에서 겁을 만들어 내고 나는 위험하고 몸이 다칠 것 같은 곳은 가지 않는다. 이럴 때 두려움은 나를 지켜주는 감정이다. 오래된 질문에서 두려움을 어떻게 해석하고 있을지 궁금하다. 불안과 고통의 원인과 감정을 다스리는 방법, 삶의 존재 의미 등에 대한 질문의 답을 찾기 위해 과학과 종교, 동양과 서양을 대표하는 생물학자와 고승 네 분이 만나 대화를 나눈다. 영국의 생물학자 데니스 노블과 한국의 고승 통도사의 성파 스님, 실상사의 도법 스님, 미황사의 금강 스님, 사찰음식의 대가 정관 스님의 만남은 인류의 가장 오래된 질문의 답을 찾아가는 시간이다.

‘What is Life?’(데니스 노블, 16페이지)

생명이란 무엇이며 삶이란 무엇인가?’(16페이지)

데니스 노블은 생명을 서로 긴밀하게 연결되어 끊임없이 교류하는 하나의 시스템’(19페이지)이라고 정의한다. 노블의 생명에 대한 정의는 동양 사상, 특히 불교에서 말하는 사상과 유사한 면을 갖고 있다. 불교의 무아연기생명이란 무엇인가, 나는 누구인가에 대한 해답을 찾는 개념이다. 노블은 불교 사상에서 생물학과의 유사점을 발견한다.

 

<삶은 왜 괴로운가?>

노블 교수와 스님들의 첫 번째 화두는 고통이다. 붓다는 삶은 생로병사로 인해 고통스럽다. 그 고통에서 벗어날 수는 없을까?’(29페이지)라는 물음에 답을 얻고자 출가한다. 자기 내면을 들여다볼 수 있어야 고통에서 벗어날 수 있다. 고통의 본질을 깨달았을 때 진정한 행복은 찾아온다.

 

도법 스님은 불교의 가르침이 고통은 왜 발생하는가, 고통에서 벗어나려면 어떻게 할 것인가’(31페이지)의 질문에 대한 해답을 찾고 이해하려는 사상이라 말한다. 문제를 있는 그대로 관찰하고 실상을 제대로 보아야 해답을 찾을 수 있다고 말한다. 고통스러운 일을 불교에서는 화살로 비유한다. 첫 번째 화살은 누구나 맞지만, 깨달음을 얻은 사람은 두 번째 화살을 피할 수 있다. 부처님의 말씀을 적은 초기 경전에는 깨달은 자는 괴로운 느낌과 접촉해도 우울해하지 않고 피곤해하지 않으며 슬퍼하지 않고 통곡하지 않으며 미혹에 빠지지 않기에 단 한 가지 몸의 고통만을 느낀다.’(41페이지)고 적고 있다. 깨달음을 얻은 자는 어떤 고통이 찾아올 때 몸의 고통만을 느낄 뿐 감정에는 영향을 받지 않는다. 하지만 나와 같이 깨닫지 못한 사람은 고통스러운 순간 감정적으로 무너져 내려 감정에 매몰되어 두 번째 화살을 맞게 되는 것이다. 도법스님은 출가한 후 열아홉 살 때 어머니가 위독하다는 소식에 충격을 받아 인간과 생에 대한 실존적 고민에 빠진다. 깨달음을 얻기 위해 경전과 법문을 공부하고, 산으로 들어가 참선 수행했지만, 10년의 수행으로도 깨달음을 얻지 못하고 산을 내려온다. 그때부터 자기 존재와 인생과 세상의 본질에 대해 고민했던 부처님의 삶에 관심을 두기 시작한다. 도법스님은 깨달음이란 세상의 참모습을 제대로 파악하고 이해하고 확신하는 경험적 지혜’(49페이지)라는 것을 깨닫고, 이 깨달음에 맞게 삶을 만들어가는 실천이 중요하다고 말한다.

자유와 평화는 해탈과 열반의 다른 이름으로, 불교에서 석가모니 부처님은 자신의 삶으로 해탈과 열반이 무엇인지 보여준다. 부처님이 자신의 왕국을 공격해 멸망시킨 적국을 분노나 증오의 대상이 아닌 치료가 필요한 환자로 바라보면서 현실의 문제를 바라보고 다뤘기 때문에 분노, 증오, 불안, 공포에 사로잡히지 않을 수 있었다고 한다. 부처님은 관심, 애정, 배려, 화합을 통해서 갈등을 해결하려고 노력한다. 해탈과 열반을 얻기 위해 삶의 주인은 나라는 것을 깨닫고, 어떤 문제도 다 나의 문제로 소화할 수 있어야 한다고 말한다. ‘모든 걸 내 문제로 바라보게’(54페이지) 되면 어떤 갈등 상황에서도 이를 편안하게 다룰 수 있다는 것이다. 이 말에 의문이 든다. 나는 모든 걸 내 문제로 바라보게 되면 그 자체로 고통스러울 것 같은데 어떻게 편안하게 갈등을 다룰 수 있다는 것일까? 이 문제를 이해할 수 없어 나는 열반과 해탈에 들지 못하나 보다. 고통의 종류와 그것을 받아들이는 사람들의 느낌은 모두 다르다. 고통 자체로 괴롭지는 않지만, 그 고통을 어떻게 느끼는지에 따라 괴로움의 정도가 달라진다고 한다. 고통에서 벗어나기 위해서 고통을 받아들이는 느낌이 실재하는 것이 아니라는 것을 깨달아야 한다. 체화된 불안과 공포를 불교에서는 명상, 수행, 기도를 통해 극복하려 한다. ‘감정에도 습관이 있다는 말이 놀라웠다. 감정은 느끼는 것이라고 생각했지, 그것이 습관처럼 몸에 배어 반복된다고는 생각하지 못했다. 습관적으로 두려움에 빠질 때면 이건 진짜가 아니야, 내가 스스로 만든 감정이야 등’(60페이지)을 스스로에게 인지시키는 과정을 반복하면 두려움에 대한 항체를 만들 수 있다. 삶과 죽음은 시작과 끝의 개념이 아닌 생명 활동의 하나일 뿐이다. 이 사실을 받아들이면 생에 대한 애착과 죽음에 대한 공포에서 자유로워질 수 있다는 것이 붓다의 깨달음이고 가르침이라 말한다. 삶의 애착과 죽음의 공포에서 자유로워지는 것이 가능할까? 나는 삶의 애착보다 죽음의 공포에서 자유로워지는 것이 더 힘이 든다. 나의 죽음보다 사랑하는 사람의 죽음을 받아들일 자신이 없다. 부처님은 영원, 허무, 있다, 없다 등의 모든 것을 비판하고 부정한다. 부처님은 이 모든 것이 동시에 존재한다고 말한다. 과학은 최초에 대해 이야기하고, 우리 사회의 일반적인 사고방식은 시작과 끝, 원인과 결과, 개인과 타인을 구별 지으려 하지만 불교에서는 정해진 근본은 따로 존재하지 않는다고 한다. 조건이 맞으면 생겨나고 조건이 맞지 않으면 사라지는 것, 이것이 불교의 가장 기본적인 사고방식이고, ‘연기라는 말로 표현된다. 이 사실을 알고 접근하는 것을 중도라 한다.

순간이 영원이고 영원이 순간이다.’(73페이지)

도법 스님은 생사는 동시에 존재한다고 말한다. 죽음을 받아들이고, 기꺼이 살듯이 기꺼이 죽을 줄도 알아야 한다는 것이다. 생과 사는 정말 동시에 존재할까? 이런 의문은 의미가 없다. 도법스님은 만약 우리의 의지가 아니라 몸속 미생물의 집단지성에 의해서 사고하고 행동한다고 하더라도 지금 당장 숨 쉬고 걷고 먹고 자고 생각할 수 있으면 됐지’(74페이지)라는 말로 그런 의문이 아무런 의미가 없다고 말한다. 생과 죽음이 같은지, 의지가 나의 의지인지 몸속 미생물의 의지인지는 지금 살아서 움직인다는 사실보다는 중요하지 않다는 것으로 해석된다. 세상의 모든 것은 연결되어 있고, 나의 에너지가 다른 것에 영향을 미친다. 도법 스님은 사후 세계가 없다 해도 죽음 이후의 세상은 끊임없이 이어지기 때문에 나와 후손, 더 나아가 세상을 위해서 살아 있는 순간 좋은 에너지를 만들어야 할 당위성과 의무가 있다고 말하고 있다.

 

성파스님은 가장 큰 병은 모르고 있다는 걸 모르는 것이라 한다. 그렇기 때문에 자신이 모르는 것이 무엇인지 정확하게 알아야 아는 것과 모르는 것을 명확하게 구별할 수 있다고 말한다.

 

금강스님은 이해가 안 되는 사람들이 많을 때는 먼저 자신이 가지고 있는 틀이 있는지를 살펴보라고 한다. ‘~이래야 한다라는 틀에 억지로 끼워 맞춰 상대방을 평가하는 것은 아닌지 들여다보아야 한다. 상대방이 나를 화나게 하고, 그 행동이나 말을 이해할 수 없을 때는 상대방을 현재의 상태 그대로 인정하는 것이 해답이라 말한다. 나의 틀로 상대방을 판단하지 말고 상대를 있는 그대로 바라보게 되면 내 마음의 반응도 달라진다. 아들 문제로 금강 스님을 찾아온 어머니의 사례를 읽으면서 나는 내 아이를 어떤 틀에 끼워 바라보고 있을까를 생각해 봤다. 나 또한 틀 안에 아이들을 끼워 넣으려 발버둥치고 있었다는 생각이 들어 부끄러웠다. ‘자기의 틀을 가지고 상대를 대하는 것은 상대에게 다른 사람이 되라고 요구하는 것’(44페이지)이다. 누군가가 자신의 틀 안에 나를 끼워 넣으려 한다면 반발할거면서 정작 나는 내 아이를 틀 안에 가두려 했었다. ‘상대방을 있는 그대로 존중’(45페이지)하면 진정으로 상대방을 이해할 수 있다.

사람의 세포는 매초 마다 변한다. 6개월 정도 지나면 몸은 완전히 새로운 세포로 거의 다 바뀐다. 몸과 같이 정신도 계속 변한다. <<반야심경>>에서는 끝없이 변화하는 성질 때문에 세상을 이라 표현한다.

, 고정된 실체가 없다. 비어 있다.’(65페이지)

몸과 생각, 행동, 느낌, 감정 등의 변화는 살아 있음의 증거다. 변화가 살아 있는 것이라면 죽음은 아무런 변화가 없는 것일까라는 의문이 들었다. 죽은 후 변화가 있다면 그것은 살아 있는 것일까, 죽은 것일까? 엉뚱할 수도 있지만, 책을 읽는 순간 머릿속에 떠오른 의문이다.

 

제자 만동자가 이 세계는 영원한가, 영원하지 않은가? 영혼과 육체는 같은가, 다른가? 사후세계가 존재하는가, 존재하지 않는가?’라는 질문을 붓다에게 하고 대답하지 않는 스승 붓다에게 답을 하지 않으면 떠나겠다 말한다. 이에 붓다는 독화살을 맞으면 가장 먼저 무엇부터 해야 하는지를 묻는다. 붓다의 답은 인생의 우선순위가 무엇인지를 생각하게 한다. 데니스 노블은 만동자와 붓다의 우화를 통해 우리에게 현실적인 괴로움에 몸부림치고 있다면, 형이상학적인 질문을 하는 것보다 어떻게 당면한 문제를 줄일 수 있는지 묻는 것이 더 중요하다고 말한다. 사람은 태어나고 죽음을 맞이한다. 노블은 난자와 정자가 만나 하나의 생명체를 만들고, 그 생명체가 다시 다른 생명체를 만들어내는 방식으로 생명이 끊임없이 연장되므로, 우리 존재는 끊임없이 이어지는 생명 과정의 일부라고 말한다.

 

<나는 누구인가?>

나의 본질에 대해 생각해 보게 한다. 붓다는 나는 누구인가라는 질문에 당연하게 여기는 믿음이나 추측, 생각과는 다른 방식으로 나와 세계가 존재하며, 따라서 우리가 실재하는 그 어떤 것도 실재하지 않는다’(82페이지)라고 답한다.

 

도법스님은 지금 이 순간, 당신에게 가장 중요한 것은 무엇입니까?’(84페이지)라는 질문을 던진다. 이 질문에 바로 답이 나와야 한다는 것이 스님의 생각이다. 답이 바로 나오지 않으면 삶에서 가장 중요한 것을 놓치고 있다는 것이다. ‘목숨 걸고 지켜야 할 가치 있고, 세상 무엇보다 우선하는 것’, 무엇일까를 생각해본다. 도법 스님은 내 생명’(85페이지)이 가장 중요하다고 말한다. ‘나에게 가장 중요한 것은 무엇인가라는 질문을 던진다. 순간 멈칫, 바로 답이 나오지 않는다. 내가 중요한지, 나의 아이가 중요한지 둘 중 하나를 골라야 하는 것은, ‘엄마가 좋아, 아빠가 좋아라는 물음처럼 난감한 선택이다. 하지만 내 생명과 아이의 생명중 무엇이 더 중요한지를 선택하라면 무조건 아이의 생명이다. 나는 아이보다는 더 많은 시간을 보냈으니 아이에게도 더 긴 시간이 돌아가길 희망한다.

만물의 모든 것은 늘 주체이자 객체인 것입니다.’(113페이지)

오른손과 왼 손은 각자의 손으로 두 개이지만 하나의 몸에 연결되어 있어 하나가 된다. 이와 비슷하게 너와 나라는 존재는 서로 독립되어 있지만 동시에 하나로 이어져 있기 때문에 함께 살아야 한다. ‘오른손과 왼손, 인간과 인간, 인간과 자연은 각자의 역할이 있는 동시에 서로 협력하는 관계로 연결되어 있다. 불교에서는 불이 사상으로 이원론적 사고방식을 지양한다. ‘같지도 않고 다르지도 않다, 흑과 백이 하나도 아니고 둘도 아니다라는 말로 표현한다.

색이 곧 공이요, 공이 곧 색이다.’(91페이지)

생겨나는 것도 없어지는 것도 아니고, 더러울 것도 깨끗할 것도 없으며, 늘어나는 것도 줄어드는 것도 없다’(92페이지)는 말로 실제로 정확히 나누어서 구별할 수 없다는 것을 뜻한다. 사람들은 의사소통을 위해 만들어진 도구인 언어로 구별할 수 없는 것을 나누어서 구별한다. 이렇게 임의로 규정한 언어를 그대로 받아들이고 그 틀에 갇혀 생각하게 된다. 언어의 틀에 갇힌 생각은 실재를 보는 눈을 가려버린다. 언어로는 있는 그대로의 진실을 표현할 수 없다. 이것이 언어의 한계다. 도법 스님은 나와 타인과 세계는 하나이니, 모두 더불어 살아야’(97페이지) 삶이 괴롭지 않고, 자유롭고 평화로운 삶을 살 수 있다고 말한다. 이원론적 사고에서 벗어나 불교의 불이사상에 따라 서로 협력하는 관계로 나아가야 한다는 것이다.

나와 당신, 우리 모두가 바로 부처다, 인간은 누구나 다 부처다.’(125페이지)

도법 스님은 볼 수 있고 들을 수 있고 말할 수 있고 다 할 수 있다는 것, 즉 살아 있다는 것’(127페이지)보다 더 좋은 것은 없다고 한다. ‘지금 여기에 존재하는 나’(127페이지)라는 존재가 가장 멋지고 완전한 존재이니 온전하게 살라고 한다. ‘인간이 곧 부처다라는 말은 인간이 완전한 존재라는 것을 의미한다. ‘존재 자체가 기적’(128페이지)이라는 말에 마음이 찡하고 울린다. 다른 무엇도 어떤 조건도 필요 없이 오직 존재하는 것만으로 기적인 존재, 그것이 인간이다.

 

성파스님은 타인이 정해 준 이름과 자신의 존재가 서로 다르기 때문에 타인이 붙인 이름에 지나치게 얽매일 필요가 없다고 말한다. ‘이름이란 내 존재와 연결되는 것이라 생각했었다. 내 존재의 중심에 이름이 있고, 이름을 중심으로 세상에 내가 존재한다 생각했던 나에게 성파스님의 이름과 자신의 존재가 서로 다르다는 말은 내 존재에 대해 생각하게 한다. 이름이 없을 때 나는 어떤 존재일까? 이름이 알려진 유명인도 아니면서 왜 나는 이름이 내 존재를 나타내는 것이라 생각했을까? 그건 아마도 타인을 기준으로 타인이 나를 부르고, 이름으로 나를 기억하기 때문이 아닐까 생각한다. 내가 중심이 아닌 타인을 중심으로 생각할 때 이름은 서로를 구별하는 수단이 된다. 이름을 뗀다는 것은 결국 타인의 평가와 구별에서 자유로워지라는 말로 해석된다.

 

승묵스님은 우리의 삶은 연속적으로 이어진 점이 선을 이루듯 계속되는 찰나가 이어진 것이라고 한다. 눈 깜빡할 사이의 찰나의 연속이 삶이다. 그럼에도 인간은 찰나의 순간이 지나면 존재하지 않을 것을 망각한 채 삶이 영원할 것처럼 욕망에 사로잡히고 번뇌에 빠져 허우적거린다. 시간은 흐른다. 너무나 빨리 흐르는 시간에 깜짝깜짝 놀란다. 젊을 때는 시간이 너무 길고 느리다 느꼈는데 나이가 들어갈수록 찰나의 순간순간이 너무 빨리 지나가 무섭다. 성파스님은 찰나의 순간 온전히 깨어 있어야 이치를 체험할 수 있다고 말한다.

 

데니스 노블은 생명은 과정이 중요하고 과정으로 존재한다고 말한다. 사람은 살아 있는 동안 생명 활동 과정이 일어나지만 죽는 순간 이 과정은 멈춘다. 에너지가 소멸되는 순간 유전자를 통제해온 시스템도 사라진다. ‘생명에서 가장 중요한 것은 존재 그 자체가 만들어지는 과정이라 말한다. 생명은 상호 우호적이며 협동적이라는 데니스 노블의 주장은 기존의 생물학자들의 비판을 받는다. 노블은 동일한 유전자가 각각 근육세포, 간세포, 뼈세포 등으로 나뉘는 것은 세포가 만들어질 때 유전 정보 중 어떤 부분이 더 활동하느냐에 따라 결정된다고 한다. 유전자로 결정되는 것이 아니라 분자, 세포, 장기, 조직을 연결하는 교류시스템을 통해서 유전자가 하는 일이 결정된다는 것이다. 생명은 몸 안에 있는 수많은 요소가 상호작용하면서 반응하는 과정으로 유지된다. 불가의 가르침도 시스템 생물학의 접근 방식과 유사하게 본질적으로 중요한 것은 과정이라 말하고 있다. 우리 몸의 모든 부분이 서로 연결되어 있고, 서로 상대적인 작용을 통해 기능한다는 것이 데니스 노블이 주장하는 시스템 생물학의 핵심이다. 이 주장은 불교의 가르침에도 들어 있다. 대표적인 예가 원효대사의 저서 <<금강삼매경론>>에 실린 과일과 씨앗를 소재를 쓴 시(109~110페이지). 씨앗이 식물을 키워내고 그 식물에서 열매가 맺히는 과정의 반복적인 순환 과정에서 생명의 순환을 엿볼 수 있고, 이는 인간이 DNA를 사용해서 인간을 만들고 DNA는 인간을 사용해서 DNA를 다시 만드는 과정과 유사하다고 한다. 생명의 핵심은 씨앗과 열매’, ‘사람과 DNA’, 둘 사이의 관계다. 생명을 가진 인간은 의식을 갖고 있다. ‘내 안의 무엇이 의식을 하는가라는 질문에 정확한 답은 없다. 모든 것을 가능하게 만드는 고정된 실체가 존재하느냐는 질문은 잘못된 질문이라고 한다. 이렇게 생각하는 것은 불교의 무아개념과 비슷하다. ‘무아는 산스크리트어로 아나트만’, 초기 불교에서 사용한 팔리어로는 아나타. 고정된 실재로서 나는 없고 모든 것은 변화하는 과정에 있다는 개념이다. 데니스 노블은 이 개념이 시스템 생물학과 동일한 관점을 가지고 있다고 말한다. 노블은 몇 년 전, 유전자 사이에서 일어나는 상호작용과 교류가 일어나는 수를 계산했다. 그 결과 ‘2곱하기 1072,403제곱으로 이 숫자를 다 적으려면 책의 30쪽이 넘게 필요하다고 한다. 이 세상에 단 하나 뿐인 특별한 존재가 자신이라는 것을 잊지 말고 소중하게 진지한 태도로 삶을 살아가야 한다는 것이 노블의 생각이다. ‘자기 삶을 주도적으로 이끌어가고 자신이 행하는 모든 일에 책임감을 가지라’(131페이지)는 부처님의 가르침과 연결된다.

 

금강스님은 차별하지 않고 있는 그대로 보는 것’(119페이지)을 보이는 현재의 상태뿐만 아니라 현재의 모습이 되기까지 과거의 시간과 모든 것들의 관계성을 이해하고 그 안에서 모든 가능성을 열어두고 보는 것이라 말한다. 그대로 볼 줄 아는 지혜를 불교에서는 중도라 부른다. ‘지혜로운 사람이 되려면 차별하지 않는 습관을 만들고 있는 그대로의 모습을 제대로 파악하고 인정하고 존중하는 연습을 해야 한다’(119페이지)는 것이다. ‘있는 그대로의 모습을 파악하고 인정하고 존중하는 것은 말처럼 쉽지 않다. 내 안의 고정관념과 편견이 자꾸 방해하기 때문이다. 이 두 가지는 생각보다 너무나도 단단해 쉽게 깨지지 않는다. 옳지 않은 틀이라면 어떻게든 깨부수려는 노력이 필요하다. 지금 나는 책을 읽으면서 계속 이것을 깨는 연습을 하고 있다.

 

<마음을 어떻게 다스릴 것인가?>

참선 명상은 마음을 다스리고 습관을 바꾸는 수행법이다. 노블 교수는 명상이 삶에 무엇을 해줄 수 있는가를 이야기하고, 참선 수행의 개념과 원리를 탐구한다. <마음을 어떻게 다스릴 것인가?>에서는 마음을 다스리는 방법과 참선 명상법을 알려준다.

 

금강스님은 부처님이 든 연꽃을 보고 미소 지은 제자 가섭의 이야기를 들려준다. 번뇌와 망상이 없는 마음으로 꽃을 든 부처님과 그 마음을 이해한 가섭의 미소를 말하는 염화미소는 말로 통하지 않고 마음에서 마음으로 깨달음을 전하는 것을 말한다. 나는 꽃을 보면 예쁘다 생각하는 순간 사진을 찍고 꽃말을 찾아본다. 꽃의 본질을 보는 것이 아닌 꽃에 나의 생각과 마음을 투영하게 된다. ‘본질을 본다는 것은 하나의 현상을 보더라도, 거기에 연관되어 있는 수많은 것들을 함께 보는 것’(138페이지)이라고 한다. 꽃을 보더라도 꽃을 자라게 한 햇빛, 빗물, 바람 등을 떠올리는 것이다. 본질을 본다는 것은 그 대상을 바라보는 나의 시선과 생각이 중심이 아닌 그 대상의 실체를 들여다보는 것이 아닐까 생각해본다.

걱정이나 불안, 이기심, 괴로움은 본래 마음에는 없었는데 세상을 살아가는 동안 마음에 때가 묻어 이러한 마음이 생겨난다. 창문을 닦듯이 마음의 때를 깨끗이 닦고 평화로운 본래의 마음을 찾아야 한다고 말한다. 마음에 묻은 때를 깨끗이 하는 것은 쉽지 않을 뿐더러 아무리 닦아도 흉터처럼 흔적은 남을 것 같다. 그럼에도 마음의 때는 닦아주어야 더 큰 상처로 남지 않는다. 마음의 때를 씻어내기 위해서 마음을 쉬게 해주는 방법으로 금강스님은 수행을 이야기한다. 수행을 하면서 불필요한 감정, 망상, 고민거리, 집착 등을 비워낸다. 엎드려 절하는 것은 나를 내려놓고 비워내는 것으로 낮은 자, 비우는 자, 나누는 자의 삶’(145페이지)을 실천하는 행위다. 일상을 떠나 낯선 곳에 머무는 시간은 일상의 고단함을 잊게 하고 마음의 고요를 찾아준다. 번뇌와 망상이 일어나거나 감정이 격해질 때 천천히 걷거나 멈춰서 살짝 아래쪽을 내려다본 채로 호흡하라고 한다. 들이마시는 숨으로 맑은 공기와 청량한 기운을 받아들이고 내쉬는 숨으로 탁한 기운이나 감정을 내뱉는다.

무념, 무상, 무주’(171페이지)

달마대사의 여섯 번째 제자인 육조 혜능대사가 한 말로 선이라는 마음의 상태를 무념, 무상, 무주라는 말로 표현했다. 번뇌와 망상이 없는 무념, 고정된 생각이 없는 무상, 한곳에 머무르지 않는 마음을 무주라 한다. 어디에도 물들지 않은 우리 본연의 마음으로 돌아가 참선을 한다. 참선을 할 때 자신에게 맞는 자세(174~177페이지, 참선 자세 참고)로 조정해서 앉는다. 하지만 이때 기의 흐름을 원활하게 하기 위해 반드시 다섯 번째 척추를 바르게 편다. 안정된 자세로 앉은 다음 코로 숨을 아랫배까지 깊게 빨아들이고 다시 천천히 코로 내쉰다. 호흡에 맞춰 숨을 들이마시면 의식이 저 아랫배까지 내려갔다가, 다시 내쉴 때는 의식이 숨을 따라 밖으로 나가게 하는 것을 반복한다. 호흡을 따라가는 의식을 바라보고 있는 의식을 라고 지칭하고, ’를 바라보는 것은 무엇인지에 대한 화두를 스스로에게 질문한다. 화두를 놓고 끝없이 되풀이해 묻는 것이 참선 수행의 기본이라 한다. 자신에 대한 궁금증이 강해질수록 좋고 나쁨을 분별하는 마음, 욕심내는 마음, 주변에 끌려가는 마음, 또한 내가 옳다고 하는 마음까지도 무너진다. 내 마음이 다른 데 끌려가지 않도록 나 자신에게 붙여두어 챙기는 것으로 이것을 마음 챙김이라 한다. 잡념이 사라지고 집중력이 생기면서 고요하고 맑은 마음을 갖게 되면서, ‘무념, 무상, 무주의 상태로 들어갈 수 있게 된다. 이것이 참선을 하는 이유다.

정관스님은 자존심과 시기, 질투 같은 마음이 자유로운 생각의 흐름을 막는다 말한다. 남과 비교하는 삶은 틀에 갇히고 타인을 의식하는 마음에 지배를 당하게 한다. 있는 그대로 받아들일 수 있어야 자유로운 삶을 살 수 있다. 사람은 끊임없이 욕망한다. 욕망하는 마음이 일어날 때면 고통을 느끼게 된다. 이러한 고통의 불씨가 다시 일어나지 않아야 깨달음을 얻게 되고, 해탈과 열반의 세계로 나아갈 수 있다.

 

불교에서 깨달음을 주는 우화 십우도’(148~151페이지)는 잃어버린 소를 찾아 떠나는 목동의 이야기다. ‘자아혹은 참된 나를 의미한다. 소를 찾아 집으로 돌아왔지만, 목동은 소와 자기 자신까지 모두 잊고 무아의 경지에 이른다. 자아에 대한 집착을 버리면 완전한 해방의 경지에 이른다. 이 우화는 나를 잊어야 나의 근원에 닿을 수 있다는 것을 보여준다. 연주자가 음악을 연주할 때 자신을 잊을수록 연주하는 행위를 더 잘 제어할 수 있게 되면서 온전히 음악을 즐길 수 있게 된다. 데니스 노블은 이러한 상태를 불교에서 무아를 통해 해탈에 도달하려는 상태와 유사하다고 말한다.

소를 타고 소를 찾는다.’(154페이지)

불가에서 깨달음을 얻기 위해 애쓰는 사람을 이르는 말이다. 소를 타고 있다는 사실도 모른 채 소를 찾고 있는 것으로, 깨달음은 소를 타고 있다는 것을 아는 것이라 말한다. 소를 타고 있다는 사실을 아는 사람을 깨달은 부처라 하고, 소를 타고 있다는 사실을 모르는 사람을 무지한 중생이라 한다. 무지로 인해 문제가 일어나고 자신을 고통스럽게 한다. 도법 스님은 현대인들이 많은 지식을 알고 있음에도 정작 자기 자신에 대해서는 무지하다고 한다. 소를 타고 있다는 것을 알기 위해서는 무엇을 해야 할까? ‘수행, 참선, 기도 등을 통한 자기 성찰경전을 읽거나 타인과의 대화를 통해 소를 타고 있다는 것을 깨달을 수 있다. 불교에서는 화두를 던지고 화두에 대한 선문답을 하는 과정을 계속 반복하면서 물음에 대한 답을 찾아간다. 이 과정에서 집중과 각성의 힘이 생겨나 가짜에 휘둘리지 않고 자신만의 해답을 찾을 수 있다.

 

<어떻게 살아야 하는가?>

일상에 바로 적용할 수 있는 삶의 지혜를 알려준다.

진정한 삶의 변화는 저 멀리 특별한 장소에서가 아니라,

바로 지금 내가 발 딛고 선 자리에서부터 시작될 것이다.’(195페이지)

 

붓다는 타인의 말에 휘둘려 노예로 살지 말고 자신의 인생을 창조하는 주인으로 사는 것이 옳은 길이라고 가르친다. 삶은 내가 마음먹고 행하는 대로 만들어진다는 것이다. 삶의 주인으로 살 것인가, 누군가의 종으로 살 것인가는 나의 결정에 따라 달라진다. 내가 삶의 주체다. 도법스님은 내 마음대로 살되 누군가에게 피해를 주지 말고 모두에게 좋도록 살아야 진짜 주인으로 살 수 있다고 말한다. ‘무엇에도 걸림이 없는 진정한 자유인, 무해인’(201페이지)으로 살기 위해서는 세상을 위해 자신이 가진 열정과 역량을 바칠 수 있어야 한다. ‘남에게 피해주지 않는 선에서 내가 하고 싶은 거 다하고 살고 싶다는 말을 입버릇처럼 자주 했다. 이것이 나의 바램이다. 하지만, 나는 진정한 자유인은 되지 못했다. 세상을 위해 자신이 가진 열정과 역량을 바치는 것을 하지 못하고 있기 때문이다. 나에게 진정한 자유인이 되는 길은 아직도 까마득하게 멀기만 하다.

매일의 일상이 바로 인간이 소유하고 누릴 수 있는

최고의 신비고 기적이고 불가사의다.’(206페이지)

삶이 평화롭고 행복해지는 것이 핵심이다. 그렇기 위해서 만족감을 느껴야 한다. 진짜 인생이 무엇인지 알아야 지혜롭게 살아 갈 수 있다. 인생에서 무엇이 소중한지 지금 나에게 소중한 것은 무엇인지를 알고, 그리고 그 소중함을 깨닫고 만족할 때 우리는 평화롭고 행복해질 수 있다. 화엄종을 창시한 의상스님은 살고 있는 공간을 가꾸는 일은 개인적인 일이 아니라 모두의 삶을 가능하게 하는 온 우주를 가꾸는 행위라 얘기한다. 내 삶의 터전을 가꾸는 것이 곧 우리 모두의 삶을 가꾸는 가장 대단하고 특별하고 중요한 작업이라 말한다. 도법스님은 삶의 터전, 삶의 현장을 떠난 수행이란 존재할 수 없다고 말하면서 내 삶의 터전을 가꾸는 것이 최고의 참선이자 수행이라고 한다. 도법스님은 꽃과 풀꽃을 통해 선택과 소외에 대해 이야기한다. 선택과 소외는 차별과 싸움의 원인이 되고, 평화를 깨트린다. 존재 하나하나 모두를 존중하고 배려하는 삶이 바람직한 삶이다. 세상은 하나의 공동체이기 때문에 서로를 인정하고 존중하면서 감사하는 마음으로 살아야 한다. 모든 존재가 연결되어 있기 때문에 하나라도 없어지거나 함부로 취급하면 모든 생명이 영향을 받는다. 모든 생명이 소중하다는 것이 우주의 존재법칙이고 생명의 질서다.

 

금강스님은 남들이 하는 것을 따라하려고 하지 말고 자신을 중심에 두고 생각해야 행복하다고 말한다. 타인이 바라보는 내가 아닌 내가 바라보는 나에 초점을 맞추어 나의 행복을 생각해야 한다. 타인에게 초점을 맞추고 타인과 나를 비교하면 행복할 수 없다. 자신이 중심이라는 것을 잊지 말자. 수많은 생각이 흩어져 있으면 번뇌와 망상이지만, 그 마음이 하나로 모이면 자연스럽게 지혜가 된다. 두 손을 모은 합장은 내가 가진 모든 생각을 하나로 모아 지혜를 만들어내기 위한 중요한 수행법이다. 그와 같이 합장은 나와 타인이 소통하고 서로의 마음이 통하는 것을 의미한다. 나와 타인은 서로 비교하는 대상이 아닌 서로 소통하는 존재다.

일기일회, 평생 단 한 번의 만남, 생애 단 한 번의 기회’(245페이지)

지금 이 만남이 세상에서 단 한 번의 인연이고 단 한 번의 기회이기 때문에 놓치지 말아야 한다. 일기일회의 마음으로 바라보면 모든 것이 새롭고, 잘해보고 싶은 의지가 생겨난다고 한다. 금강스님은 어떤 일과 사람이든 다가오는 모든 것을 당당하게 맞서라고 말한다. 지금 이 순간을 온전하게 살아내는 것이 인생에서 가장 좋은 때다. 인연은 움직이지 않으면 다가오지 않는다. 가만히 있는데 저절로 생기는 일이란 없다는 것이다. 받은 것에 감사할 줄 아는 사람은 행복하다고 한다. 소중한 인연에 감사하고, 그 인연과 함께 베풀고 나눠주는 삶을 살 수 있다면 그것이 가장 행복한 삶이다.

 

무엇을 먹는가는 곧 그 사람이 누구인지 말해준다고 정관스님은 말한다. 음식은 성품, 인격, 몸과 마음의 변화, 행동 등에 영향을 미친다. 수행을 하기 위해서는 정신과 육체의 에너지를 조화롭게 활용해야 한다. 사찰음식은 정적이고 맑고 고요한 몸과 마음의 상태를 유지할 수 있게 해준다. 정관스님은 무엇을 먹는 것만큼 누구와 먹느냐가 중요하다고 한다. 음식은 사람과 사람을 이어주고 서로의 감정을 교류하게 도와준다. 발우공양은 자기 수행의 하나이고, 여럿이 먹는 대중공양은 개인적인 수행을 여러 사람과 함께 나누는 것이라 한다. 식사를 함께 한다는 것은 곧 자신이 깨달은 바를 함께 하는 것과 같다. 정관스님은 텃밭에 씨앗을 뿌려놓고 가끔 한 번씩만 봐줄 뿐 손대지 않고 자연 그대로 둔다. 작물도 인간도 자연 그대로의 모습을 존중하고 지켜주는 것이 중요하기 때문이다. 눈과 비를 견디고 자연 그대로 자란 작물을 채취해 만든 음식은 몸과 마음이 조화롭게 정화시켜주고 마음을 치유해준다. 정관스님은 레시피에 따라 만든 틀에 박힌 음식은 재미없는 음식이고 죽은 음식이라 생각한다. 그렇기 때문에 사찰음식에는 정해진 레시피가 없다고 한다. 같은 식재료도 성장 과정에 따라 여러 변수가 있기 때문에 모두 다른 재료라 한다. 같은 재료도 언제, 어떤 마음으로 요리하느냐에 따라 전혀 다른 음식이 된다는 것이다. 음식의 본연의 맛을 꺼내기 위해 양념도 과하게 쓰지 않는다. 정관스님은 음식을 만들 때 시절 인연에 따라 식재료에 마음을 함께 두고 있다고 한다. 스님은 음식에 나를 함께 두는 것은 때마다 달라지는 음식을 통해 때마다 다른 나를 발견하는 것과 같다고 말한다. 된장이 자연스럽게 시간과 자연에 의해 발효되는 것처럼 수행도 스스로 알아가고 스스로 익혀가고 스스로 체득하는 것이라 한다. 수행을 통해 자기 자신의 실재를 알아가고 그 단계를 넘어 자신의 존재가 없어지고 평화로운 마음이 되는 상태가 된다. 발효된 장에 의해 새로운 음식이 재탄생하듯 수행을 통해 나라는 존재도 재탄생된다.

 

모든 것이 다 수행입니다.’(227페이지)

승묵스님은 특별한 수행이 따로 있는 것이 아니라 모든 일상이 수행이라 말한다. 늘 지금 여기에 깨어 있는 것이 수행의 핵심이고, 우리가 살고 있는 삶의 현장이 수행을 연습하는 장소가 된다.

 

성파스님은 과학과 종교의 가르침이 비슷하다고 말한다. 인간과 삶, 우주의 진리를 전해주는 것이기 때문에 서로 비슷하다는 것이다. 붓다의 가르침은 모든 인류에게 해당되는 진리이고, 어디든지 다 통할 수 있다고 한다.

 

데니스 노블은 유전자가 이기적이다라 주장하는 도킨스와 생물학자들의 주장이 잘못되었다고 말한다. 어떤 유전자는 좋고 어떤 유전자는 나쁘다는 잘못된 생물학 유전 이론이 사회인류학적으로 파괴적이고 끔찍한 재앙으로 이어졌다 말한다. 이기적 유전자 이론은 생의 본질에 대한 오해와 편견을 키우고 이기주의적 태도를 정당화 시킬 수 있다. 노블은 유전자는 좋고 나쁘다는 이분법적인 존재가 아니고 이기적인 존재가 아니라고 강조한다. 시스템 생물학의 관점에서 바라보면 자연은 경쟁의 대상이 아닌 협력하는 대상이다. 이러한 관점에서 바라보면 자연은 더 이상 정복의 대상이 아니다. 인간과 자연, 모든 생명체들이 서로 협력하는 관계로 이어져 있다.

 

<오랜 의문에 답을 찾다>

데니스 노블은 한국에서 만난 스님들의 가르침을 유대감의 철학이라 말한다. 이 만남을 통해 삶에 대한 두 가지 메시지의 중요성을 확신하게 된다. ‘사회적 관계의 붕괴와 인간 소외로 인해 세상 사람들 모두가 겪고 있는 괴로움을 해소해야 한다는 것우리가 이기적으로 태어나지 않았다는 것을 이해해야 한다는 점이다. 불교 철학과 명상 수행법은 괴로움을 해소하는 데 도움이 될 것이라고 한다. 나 자신의 삶의 통제권은 유전자가 아닌 자신의 의지에 의해 결정된다는 것을 깨닫고, 삶은 타인과 더불어 살아가야 한다는 것을 강조하고 있다.

 

생물학자 데니스 노블은 도킨스의 이기적 유전자 이론에 반박해 시스템 생물학 이론을 주장한다. 시스템 생물학 이론과 불교의 유사점을 발견한 노블은 한국의 스님들을 만나 불교의 가르침을 듣고, 시스템 생물학과 연결점을 찾는 여행을 한다. 시스템 생물학은 어떤 하나의 생물체를 하나의 시스템으로 보고, 그 시스템 안에 있는 여러 가지 요소들이 서로 유기적인 관계를 가진 채 서로 영향을 미치는 구조로 이해하는 학문’(288페이지)이다. 생물이라는 것을 하나의 시스템으로 보는 것이다. 생명이란 우리 안에 여러 요소가 상호작용하는 것이라는 것이 노블의 주장이다. 노블은 인간과 동물, 식물 등을 총체적으로 생각하는 방식에서 시스템 생물학과 불교가 관계가 있다고 말한다.

 

오래된 질문을 처음 읽기 시작하면서 두려움이란 감정에 대해 생각했다. 결국 두려움이란 것도 무지에서 온다는 것을 깨달았다. 나에 대해서 성찰하고, 두려움의 실체를 정면으로 바라본다면 두려움이 나를 고통스럽게 하지 않을 것이라 생각한다. 실체를 보지 않고 그림자만을 바라본다면 커다란 그림자의 크기에 압도되어 그것의 실체를 볼 수 없다. 데니스 노블은 시스템 생물학을 통해 인간의 몸의 모든 부분이 서로 상호작용하면서 연결되어 있고, 인간과 인간, 인간과 자연 또한 서로에게 영향을 미치면서 상호작용하는 관계라 말한다. 이러한 노블의 이론은 불교 고승들의 말 속에도 들어 있다. 세상을 바라볼 때 편견이나 고정관념의 틀로 바라보지 말고, 모두가 서로 연결되어 상호작용하는 존재라는 것을 깨닫게 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삶의 주체는 라는 것을 잊지 말라는 메시지를 전달한다. 삶의 주체로서 존재하는 는 삶의 방향을 스스로 결정하려고 한다. 오래된 질문은 삶의 방향성을 제시해주고, 삶의 지혜를 깨닫게 해주는 책이다. 스님들의 말씀은 이해하기 쉽기도 했지만, 어떤 내용은 바로 이해되지 않아 읽고 또 읽었다. 오래된 질문은 혼자 읽는 것보다 함께 읽고 이야기 나눌 때 더 깊이 있게 이해할 수 있는 책이라 생각한다. 코로나로 독서모임이 힘들지만, 모임에서 함께 읽고 이야기 나누고 싶은 책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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