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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크로스 더 투니버스 ㅣ 트리플 4
임국영 지음 / 자음과모음 / 2021년 5월
평점 :
‘십대 시절 대부분의 시간을 만화 감상, 음악 듣기, 게임에 쏟았다. 명백히 열심히 보고, 듣고, 했다. -중략- 누군가에게 내보이기 어쩐지 부끄럽거나 흔한 내용이지만 부정할 수 없이 내가 깊이 사랑한 일들이었다.’(133페이지)
<어크로스 더 투니버스> 이야기에 등장하는 세기 말을 살아가던 11살 소년과 소녀는 서로에게 거리를 둔 채 만화를 함께 보면서 멀지만 또 가까운 사이가 된다. 만화를 통해 공감대를 형성하고 친구가 된 두 사람 사이에 지수라는 친구가 등장한다. 지수를 좋아했던 소년은 소녀와 지수가 뽀뽀하는 장면을 목격하고 둘과의 관계를 끊는다.
“용서 안 할 거야. 절대 못 해.”(39페이지, 만경)
세 사람의 친구 관계는 끊어지고 셋은 각각 홀로 외로운 존재가 되어 지내다 자연스럽게 서로의 삶을 살아간다. 어른이 되어 소녀의 소식을 들은 소년은 더 이상 소녀에게 아무런 감정도 관심도 존재하지 않는다. 소녀는 만화를 좋아하고 BL소설을 쓴다는 사실을 연인에게도 숨긴 채 결혼을 준비하고, 소년을 계속 떠올릴 것 같다고 예감한다. 소년의 형이 말한 것처럼 소녀는 소년을 좋아했던 것일까? <어크로스 더 투니버스>는 ‘투니버스’를 함께 봤던 소년과 소녀의 우정과 소년의 짝사랑, 소녀와 소녀의 동성 간 풋사랑을 이야기한다.
<코인노래방에서>에서 연인과 장범준 이야기를 하다가 코인 노래방에 들어간 나는 학창 시절 동경하고 좋아했던 정우를 떠올린다. 자존감이 낮았던 나는 자신을 못생기고 못났다 생각하고 잘생기고 밝은 정우가 되고 싶어 한다. 정우에 대한 마음은 깊어졌지만 어느 순간 그 감정을 깨달은 후 둘의 사이는 멀어지고, 결국 친구 관계는 끝이 난다. 추억에 잠긴 나는 연인에게 자신과 정우와의 관계와 자신이 정우에게 느꼈던 감정을 모두 털어놓는다. 비밀을 말하고 난 후 정우도 자신을 좋아했을 것이라는 연인의 말에 불쾌함을 숨기지 못하고 화를 낸다. 비밀을 털어놓은 후 연인이 자신을 떠나버릴지 모른다는 불안감에 사로잡힌다. 괜한 이야기를 한 것은 아닐까 불안해하던 나는 연인의 손이 닿자 안심하고 깊은 잠에 빠져든다. 나와 정우가 가졌던 마음은 무엇이었을까? 우정과 사랑의 경계라는 것이 모호하다는 생각이 들었다.
<추억은 보글보글>은 <어크로스 더 투니버스>의 등장인물 만경과 수진의 형과 오빠인 원경과 도진의 이야기다. <어크로스 더 투니버스>가 만화를 소재로 소년과 소녀의 우정을 이야기했다면 <추억은 보글보글>은 게임을 소재로 두 소년의 우정을 이야기한다. 만경과 수진도 그렇지만, 원경과 도진의 관계도 진정한 우정이라 말할 수 있는지 헷갈리지만 말이다. 도진은 부모의 이혼으로 집안과 동생을 돌봐야 하는 처지에 놓인다. 부모의 돌봄을 받지 못한 것은 원경도 마찬가지다. 도진과 원경은 게임을 통해서 친해져 함께 게임을 하면서 서로에게 의지한다. 지는 것을 극도로 싫어하는 원경은 물건을 훔치는 도벽을 갖고 있다. 이 일로 도진은 충격을 받고 아버지에게 심하게 혼이 난다. 원경과 멀어지는 것을 두려워한 도진은 원경을 찾아가고 둘은 아무런 사과와 용서의 과정 없이 모든 일을 덮고 지낸다. 하지만 이 일로 도진은 원경을 원망하고 미워하는 마음을 들킬까봐 힘들어한다.
‘우리는 사과나 용서 없이 다시 붙어 다녔다. 그전과 다를 바 없는 절친한 친구로 지냈다. 그게 문제였다. 그래선 안 됐다. 정확하게 사과하고 용서를 하고 화해했어야 했다. -중략- 내가 저지른 말고 행동에 지석해서 상처를 받는 이유는 그것이 거짓 없이 순수한 증오였기 때문이다. -중략- 나는 내가 가장 사랑하던 사람을 진심으로 경멸하고 혐오했다. 원경이 그 사실을 알아챘을까 봐 두려웠다.’(119페이지)
그래서 원경을 만날 때마다 무의식적으로 과거 얘기를 계속했던 것이 아닐까 생각한다. 과거를 떠올리고 싶지 않은 원경은 도진과의 만남을 꺼리게 된다. 사고로 다친 도진의 메시지를 받았지만, 아무것도 하지 않았던 원경은 도진이 죽었다는 소식을 듣는다.
중고등학교 때 만화에 빠져 살았고, 아이들을 키우면서 아이들이 좋아하거나 내가 좋아했던 애니메이션을 투니버스나 극장에서 본 나에게 <어크로스 더 투니버스>에서의 익숙한 제목들은 옛 추억을 떠올리게 한다. <코인노래방에서>에 나오는 가수들의 이름 또한 익숙해 더 몰입해서 작품을 읽었다. <추억은 보글보글>은 게임을 좋아하지 않는 나에게도 익숙한 게임들이 등장해 흥미롭게 읽었다. 임국영의 작품은 나의 유년시절을 떠올리게 한다. 하지만 단순히 옛 추억을 떠올리게 하는 것으로 끝나지 않는다. ‘과거’란 지난 일이라 잊어버리면 그만일 수 있지만, 과거가 현재와 미래의 삶에 영향을 미치기도 한다. <어크로스 더 투니버스>의 만경은 과거의 기억 속 수진에 대한 생각을 끊어냈지만, 수진은 옛 기억 속 만경의 생각을 계속 하게 된다. <코인노래방에서>의 나는 동성 친구를 좋아했던 감정을 현재의 연인에게 말하고 현재의 연인에게 버림받을 것을 걱정한다. 잠이 드는 순간 닿은 연인의 손끝에서 과거를 털어내고 현재의 연인과의 미래가 이어질 것이라는 메시지를 받았다. <추억은 보글보글>에서 도진은 계속 과거를 이야기한다. 초반에는 과거를 그리워하기 때문이라 생각했는데, 뒤로 가면서 어쩌면 원경에게서 사과를 받고 싶은 마음의 표현이었을 것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만약 원경이 자신의 도둑질로 인해 힘든 일을 당한 도진에게 사과를 하고 용서를 받았다면 도진은 원경과의 관계를 ‘악연’이라고 말하지 않았을 것이다. 원경과 친구 사이가 틀어질 것을 걱정해 참았던 도진은 원경을 원망하고 증오하는 마음에 괴로워한다. 어쩌면 도진의 죽음이 사고가 원인이 아니라 도진이 삶의 끈을 놓아버린 것은 아닐까 생각되어 그의 죽음이 더 안타까웠다. 과거를 단순히 흘려보내야 하는 것만으로 보는 것이 누군가에게는 고통일수도 있다. 나는 과거를 흘려보내는 것을 선택할 것인가, 아니면 과거를 들춰내어 근본적인 문제를 드러내는 것을 선택할 것인가? 선택을 위해 나의 과거를 되돌아본다. 답은 더 생각해 봐야 할 것 같다.
임국영 작가의 첫 소설은 과거의 작가와 작가의 생각을 녹여 만든 누군가에게 보내는 신호다. 우주로 쏘아올린 디지털 신호처럼 작가는 누군가에게 신호를 보낸다. 그 누군가가 작가와 개인적 관계로 연결된 사람일수도, 책을 읽는 독자일수도, 아니면 미지의 세계에 존재할 누군가에게 일수도 있다. 작가는 우리에게 어떤 신호(메시지)를 보내고 있을까?
‘우주 너머 다른 시공간에서 반짝이고 있을
당신에게 미약한 나의 시그널이 닿았다면
반갑게 맞아주길 부탁드린다.’(138페이지)
■ 발췌글
<어크로스 더 투니버스>
6
외행성 전사들이 나타났다.(첫 문장)
14~15
신체적인 성장조차 다 마치지 않은 어린아이에게 가져다 대기 가혹한 말이었지만 타고난 재능이란 늘 이런 식이었다. 시작한 지 이른 시기에 있고 없고 여부가 두각을 보이며 해당 분야의 전문가라면 그가 어떤 경지까지 가닿을 수 있을지 대강 가늠이 되고 마는 가능성의 기대치.
42
어릴 적 보던 만화가 성장 이후의 세계를 꿈꾸게 만들었다면 웹소설은 성장을 모두 마치고 난 뒤의 세계를 보여줬다.
<코인노래방에서>
50
연인의 장난은 대체로 즐거웠지만 때로는 말도 안 나올 만큼 곤란했다. 생각지도 못한 본심을 들춰낼 때가 있었기 때문이다. 눈치가 없는 것인지 알면서도 부러 그러는 것인지 연인은 나 스스로 알아채지 못했거나 애써 외면하려던 진실을 파헤쳤다.
64
열등한 내가 내 처지를 이해할 수 없는 우월한 누군가와 교감하기 위해서는 주어진 에너지보다 더 많은 기운을 소진해야만 했다.
65~66
너는 애가 너무 비장해. 왜 자꾸 답을 내려 해? 언제나 문제가 있는 사람이 정답을 찾는 거야. 확실하지 않은 것은 불안하니까. 단단하고 불변하는 걸 원해.
<추억은 보글보글>
86
돌보는 사람이 없는 집이란 보일러를 켜도 서늘했고 귀청이 찢어질 것처럼 고요했다.
108
세계가 급변했다. 새로운 그래픽과 시스템을 장착한 게임이 연일 발매되었다.
119~120
어떤 기억은 내가 받은 상처가 아니라 누군가에게 준 모욕으로 이루어져 평생 따라다닌다. 삶의 변곡점에서, 누군가에게 비난받고 처지가 비루해지는 모든 순간마다 그때의 기억이 생생하게 되살아났다. 아니라는 것을 알면서도 내 인생이 그때부터 망가진 것은 아닐까 하는 비약이 자꾸 돋아났다.
123
승자는 모든 것을 거머쥐고 패자는 모조리 다 잃기 마련인 세계에서 도진은 싸우지 않고 승자가 되고도 모든 걸 내줬다.
<꿈의 우주를 유영해>
132
나는 무엇을 얼마만큼 좋아하는 사람인가. 그것을 어떻게, 왜 좋아하는가. 어른이 되어서까지 이런 질문에 골몰한 까닭은 아마 취향에 관한 정확한 문답이야말로 인간의 가장 내밀한 지점을 드러내고 개인과 타자의 경계를 구분 짓는 결정적인 요소라 믿었기 때문인 것 같다. -중략- 나는 자신이 구체적으로 어떤 사람인지 궁금해 하고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