방구석 미술관 2 : 한국 - 가볍게 시작해 볼수록 빠져드는 한국 현대미술 방구석 미술관 2
조원재 지음 / 블랙피쉬 / 2020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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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 어느 때보다 혼돈 속이었던 격동의 20세기. 방구석 미술관 2, 한국은 그 시대에 나는 누구인가?’, ‘나는 어떻게 살 것인가?’, ‘나의 예술은 어떠해야 하는가?’에 대해 끊임없이 고뇌하며 자신과 시대의 정수를 작품에 녹여냈던 예술가의 이야기를 풀어준 책이다. 방구석 미술관 2, 한국을 통해 근현대 미술 100선에서 만난 화가들과 작품을 다시 만날 수 있어 행복했다. 그렇기에 더 마음이 가는 책이다. 화가의 생애와 작품을 분석하고 뒷부분에 <더 알아보기>에서 예술가의 미술사적 의의와 예술가의 또 다른 면모를 설명하고 있다. 페이지 오른쪽 윗부분에 있는 QR코드를 스캔하면 방구석 미술관으로 연결되어서 예술가에 대해 더 많은 내용을 들을 수 있다.

 

<소를 사랑한 화가, 이중섭>

가족과 소를 사랑한 화가 이중섭

6.25전쟁을 피해 제주도로 피난 간 이중섭의 가족은 힘든 삶을 살았지만 가족과 함께 할 수 있어 행복했다. 하지만 아내가 폐결핵에 걸리고, 아이들은 영양실조에 걸리면서 어쩔 수 없이 아내와 아이들은 일본으로 떠난다. 홀로 남은 이중섭은 가난과 외로움을 견디면서 그림을 계속 그린다. 물감과 종이 살 돈이 없어 담뱃갑 속 은박지에 음각해서 그림을 그린다(은지화). 일본을 잠깐 방문할 수 있는 기회가 생겨 가족을 만나고 다시 돌아온 이중섭은 통영으로 옮긴 후 그림 그리는 것에 온 힘을 쏟는다. 서울과 대구에서 전시회를 열었지만 사기꾼들에게 속아 그림 값을 받지 못해 좌절한 이중섭은 점점 피폐해져 간다. 마지막으로 그린 <덤벼드는 소>는 어둡고 생명력이 결여된 화가 자신의 모습을 닮아 있다. 삶을 포기한 화가는 정신병원을 전전하다 무연고자로 생을 마감한다. 이중섭의 <덤벼드는 소>를 보는 내내 화가의 삶의 고단함과 좌절이 느껴져 가슴이 먹먹해진다.

 

<한국 최초의 여성 서양화가이자 원조 신여성, 나혜석>

우리 나라 최초의 여성 서양화가 나혜석

나혜석은 전근대적 사고방식에서 벗어난 신여성이 되기로 결심하고 자신의 생각과 감정을 글과 그림으로 표현한다. <경희>, <이상적 부인>, <잡감> 등의 작품을 기고하면서 여성운동과 양성평등을 주장한다. 김우영과 결혼해 삼남매를 낳은 나혜석은 육아와 일을 함께 하면서 힘들어한다. 슬럼프에 빠져 있을 때 남편 김우영이 일본 외무성에서 준 포상으로 세계 일주를 할 수 있는 기회가 오자 아이들을 시댁에 맡기고 남편을 따라 떠난다. 남편의 친구 최린과의 부적절한 관계로 인해 부부간 사이에 금이 간 채 귀국한다. 귀국 후 나혜석은 홀로 시댁에 남아 시부모와 아이들을 돌보고 남편은 서울로 올라가 변호사 개업을 한다. 집안 경제가 기울면서 끼니를 걱정해야 하는 처지에 놓인 나혜석은 최린에게 도움을 요청하고 이로 인해 남편 김우영과 이혼을 하게 된다. 결혼부터 이혼까지의 과정을 쓴 <이혼 고백장>과 최린에게 위자료 청구소송을 한 일로 인해 나혜석은 세상에서 철저히 소외되어 고립된 삶을 살게 된다. 고통스러운 삶을 살면서 떠돌던 나혜석은 서울시립자제원에서 53세의 나이에 무연고자로 사망한다.

 

<한국 최초의 월드 아티스트, 이응노>

변화하는 시대에 전통만을 고집하는 아버지의 모습을 보면서 자신은 변화를 따라가기로 마음먹고 그림을 그려주고 받은 품삯으로 19살에 아무 연고도 없는 서울로 상경한다. 서울에 도착해 당대 최고의 서화가 중 한 사람인 김규진을 찾아간다. 문전박대에도 포기하지 않고 끈질기게 간청한 끝에 김규진의 제자로 들어간다. 1~2년 동안 동양화를 배워 조선미술전람회에서 <청죽>으로 입선하고 그림을 반대하던 아버지의 인정을 받게 된다. 우연히 보게 된 바람에 흔들리는 대나무를 보고 자신의 눈으로 본실제 대나무를 그린 <청죽><풍죽>으로 다시 한 번 조선미술전람회에 특선, 입선에 오른다.

이응노는 동양의 서예와 서양의 추상화를 접목시켜 문자추상을 새롭게 창조한다. 재료의 종류를 한정하지 않고 모든 재료로 문자 추상 작품을 만든다. 세계적인 화가로 인정받던 이응노는 고국의 대통령이 초청한다는 말을 듣고 귀국한 후 동베를린 간첩단 사건간첩 혐의로 재판을 받고 억울하게 감옥에 갇힌다. 감옥에 갇혀 있는 동안 가장 힘든 건 그림을 그릴 수 없는 것이었다. 그는 매일 나오는 음식으로 그림을 그렸고 이때의 경험으로 사람과 사회에 관심을 갖고 사람을 위한 예술로 나아간다. 동양화와 서양화를 아우르는 작품 활동을 한 이응노의 작품은 그의 파란만장한 삶처럼 삶의 굴곡이 있을 때마다 작품세계에도 반영되어 평생 동안 작품을 변신시키면서 새로운 장르를 만들어 낸다.

 

<한국 추상미술의 선구자, 유영국>

한국 추상미술의 선구자이자 뛰어난 사업 감각을 지닌 사업천재

유영국은 사람들이 알아볼 수 있는 외부의 사물을 그리는 것에는 관심이 없었다. 자신만의 추상적 언어를 만들기 위해 어떤 재료가 어떤 물리적 성질을 가지고 있는지, 그 재료를 어떤 색채와 형태로 가공해야 하는지, 재료들을 어떻게 배치해 구성해야 하는지에 대해서만 관심을 가졌다. 일본 군국주의가 극에 달하던 때 일본은 전위’, ‘자유’, ‘독립을 나타내는 미술을 금지시키고 국가를 찬양하고 전쟁에 찬성하는 그림을 제작하게 한다. 유영국은 자유가 없는 예술은 아무런 의미가 없다 생각하고 절필을 선택한다. 해방이 된 후 1947년 서울대 서양화과 교수가 된 김환기가 전임강사직을 제안해 유영국은 서울로 올라간다. 김환기, 유영국, 이규상은 신사실파라는 모임을 만들어 추상화 화가로서의 길을 걸어간다. 6.25전쟁이 일어나면서 유영국은 서울을 점령한 북한군을 피해 숨어 지내다 고향 울진으로 피난을 떠나 양조사업을 시작한다. 예술에 대한 이상을 실현하기 위해 돈이라는 수단이 기반이 되어야 한다고 생각한 유영국에게 사업은 가족을 지키고 그림을 계속 그리기 위해 필요한 수단이었다.

그는 한국의 자연’, 그 중에서도 고향 울진의 자연에서 그림의 영감을 얻는다. 자연에 영감을 받아 그림을 그려 나가던 유영국은 단 하나의 대상인 그림을 그리기 시작한다. 가장 근원적인 조형요소들을 산을 통해 표현할 수 있었기 때문이다. ‘을 대상으로 그림을 그린 화가는 유영국, 겸재 정선, 폴 세잔이 대표적이다. 이 세 화가의 그림을 비교해서 보는 것도 큰 즐거운 감상이 될 것이라 생각한다.

풍경이 내 속에서 자신을 생각한다. 나는 풍경의 의식이다.”(176페이지, 폴 세잔)

결국 산은 내 앞에 있는 것이 아니라 내 안에 있는 것이다.”(178페이지, 유영국)

서로 다른 나라에서 살았던 두 화가는 실존하는 산을 대상으로 자신의 내면에 존재하는 을 표현한다. 겸재 정선 또한 금강산을 대상으로 자신 안에 존재하는 을 화폭에 표현했다.

 

<아이의 낙서처럼 심플한 그림, 장욱진>

유영국은 현실에 발을 딛고 이상을 추구했지만, 장욱진은 현실을 벗어나 이상만을 추구했다.

평생 동안 수표가 무엇인지도 모를 정도로 재물 욕이 없었던 장욱진은 욕심을 버리고 자연 속에서 예술만을 추구하는 외골수 화가로 살아간다. 무욕의 삶을 살고자 평생 그림을 그리며 수행하는 삶을 살아간 화가 장욱진의 그림에는 가족자연’, 그리고 무욕의 삶이 들어있다.

 

<한국에서 가장 비싼 화가, 김환기>

역대 가장 비싼 한국작가의 작품 10점 중 9점이 김환기의 작품이다. 그 중 <우주>2019년 크리스티 경매에서 132억에 낙찰되면서 한국작가 작품 중 가장 비싼 작품이 되었다. 김환기는 유영국과 함께 한국 추상미술의 선구자이며 단색화의 탄생에 영향을 미친 화가로 한국 20세기 현대회화사에 큰 영향을 주었다. 김환기는 관객이 알아볼 수 있는 사물을 그리는 구상과 화가의 머릿속 상상력으로 색채와 형태를 캔버스 위에 구성하는 추상을 조화롭게 섞어 자신만의 회화세계를 창조한다.(반추상) ‘조선이 가진 미의 정수를 그림에 담아내기 위해 고향 안좌도의 풍경과 사람들을 그린다. 조선의 미를 탐구했던 김환기는 오랜 탐구 끝에 조선의 미를 대표하는 대상으로 조선의 백자를 선택한다.

나는 조형과 미와 민족을 우리 도자기에서 배웠다.”(242페이지, 김환기)

평범하고 흔한 백자항아리가 같은 듯 서로 다른 모양과 색을 지니고 있다는 것을 알게 된 김환기는 백자항아리 속에서 자연의 모습을 발견한다. 평범함 속에 담긴 아름다음을 찾아낼 줄 아는 김환기는 평범한 백자항아리 속에서 조선의 미를 찾아 표현한 화가다.

파리에 가고 싶어 했던 김환기는 아내 김향안의 노력으로 파리에 도착한다. 고국을 향한 그리움이 깊어갈수록 그의 그림에 조선의 미, 민족의 미가 더 짙게 표현된다. 고국으로 돌아와 그림을 인정받기 시작하면서 성공을 거둔 김환기는 오십이 넘은 나이에 새로운 도전을 위해 미국으로 떠난다. 고국을 향한 그리움을 담아 그린 점화로 뉴욕 생활 8년 만에 화랑에서 개인전을 할 수 있게 되었다. 그림을 그리면서 생긴 디스크 수술을 받은 후 병원의 실수로 침대에서 떨어져 뇌사상태에 빠져 허무하게 생을 마감한다.

 

<서민을 친근하게 그려온 국민화가, 박수근>

나는 인간의 선함과 진실함을 그려야 한다는 예술에 대한 대단히 평범한 견해를 가지고 있다.”(270~271페이지, 박수근)

밀레의 영향을 받은 박수근은 평범한 사람들을 그리면서 그들의 선함과 진실함을 그림 속에 표현하려고 노력한다. 최영림, 황유엽, 장리석 등 유학이 아닌 독학으로 그림을 그리는 국내파들의 모임 주호회를 만든다. 주로 판화 작업을 하고 있던 주호회 멤버들의 영향으로 박수근의 회화세계는 판화적으로 진화하기 시작한다. 주호회 멤버들과 함께 떠난 경주 여행은 박수근의 회화에 큰 영향을 미친다. 신라인이 만든 석물에 매료되어 신라의 미를 찾아 석물을 연구하기 시작한다. 경주 남산에 자리한 석불에서 영감을 얻은 박수근은 불상이 새겨진 화강석 표면의 오돌토돌한 질감을 재현하기 위해 석물을 탁본을 하면서 연구를 계속한다. 화강석의 질감과 단색조의 미, 그 위에 새긴 선의 미에 집중한다.

6.25 전쟁 이후 가족의 생계를 위해 그림을 그리기 시작한 수근은 그림 속에 평범한 시민들의 모습을 담기 시작한다. 가족의 생계를 위해, 살아가기 위해 평범한 일을 반복하는 사람들의 모습을 그림에 담는다. 박수근은 자신의 반복적인 그림 그리기와 서민들의 반복적인 일’, 모두가 가족을 위한 노동이라는 것을 깨닫는다. 평범한 사람들의 삶 속 행위를 박수근은 최상의 미라고 생각했다.

 

<독보적 여인상을 그린 화가, 천경자>

찔레꽃 향기 밑을 스치는 두 마리 실뱀, 비단 허리띠 같은 독사.’(315페이지)

천경자는 그림으로 마음을 치유한다. ‘X’, 이 이때 등장한다. 천경자에게 뱀은 저주를 불러오는 악한 것이었다. 자신의 삶 속에 자리한 저주를 물리치기 위해 뱀을 통해 모든 불행을 정면으로 마주한다. 여동생의 죽음 이후 그리기 시작한 뱀 그림은 불행으로 인해 망가진 마음을 치유하기 위한 천경자의 처절한 몸부림이었다. 서른다섯 마리의 뱀을 그린 <생태>는 천경자의 마음을 치유해주었고, 동시에 그녀의 작품의 핵심 주제를 발견하게 해준다. 이 그림을 본 김환기에게 홍익대 동양학과 교수직을 제안 받고 서울로 올라온다. 1957년 유영국, 이규상, 한묵, 박고석 등이 소속된 모던아트협회에 들어가 작품활동을 한다. 유일한 동양화가였던 천경자는 유화물감으로 그리는 작업 방식에 영감을 얻어 자신만의 독창적인 방식으로 <비 개인 뒤>를 완성한다. 대학교수로 안정된 삶을 살아가던 천경자는 창작을 위한 영감이 사라져 혼란을 겪으면서 심한 우울증에 시달린다. 혼란스러운 감정 상태를 벗어나기 위해 다시 에서 예술의 영감을 가져온다. 다시 그린 <사군도> 속 뱀은 자신을 정화시키는 뱀이다. 이 그림을 그린 후 천경자는 세계 여행을 떠난다.

어려운 환경 속에서 아프리카 여행을 단행하게 된 광기는 오직 더 살고 싶은 집념에서였다.”(327페이지, 천경자)

살기 위해서 홀로 떠난 세계 여행에서 새로운 영감을 얻고 새로운 그림을 창작한다. 이 과정에서 20년간 이어오던 김남중과의 관계를 청산한다. 시간의 굴레 없이 자유로운 여행을 떠난 천경자에게 중요한 것은 자기 자신과 대화하는 자유의 시간이었다. 세계 여행의 경험은 많은 작품에 영감이 되어준다.

 

<비디오아트의 선구자, 백남준>

콜라주 기법이 오일페인팅을 대신했듯이 브라운관이 캔버스를 대신할 것”(340페이지, 백남준)

작곡가 이건우의 소개로 접하게 된 쇤베러크에게서 백남준은 예술에 절대적 규칙은 없다는 것과 내가 규칙을 만들면 예술이 될 수 있다는 사실을 깨닫는다. 다음으로 접하게 된 인물은 존 케이지다. 그는 세상의 모든 소음을 음악에 가지고 와서 소음도 음악이 될 수 있다는 것을 증명한 음악가다. 케이지의 영향을 받은 백남준은 케이지에게 바치는 행위음악 <피아노포르테를 위한 연습곡>을 만든다. 이로 인해 동양에서 온 문화 테러리스트라는 타이틀을 얻게 된다. 이 공연 후 행위음악을 계속한 백남준은 공연장에 찾아온 샤머니즘 예술가요셉 보이스와 친분을 이어가게 된다. 백남준과 보이스는 젊은 예술가들과 함께 안티 예술을 외치는 플럭서스라는 모임을 만든다. 플럭서스 예술가들은 자본주의 논리 속에 예술을 상품 취급하는 현실을 비판한다. 플럭서스 예술가들과의 활동 이후 백남준은 전위미술가로 불리기 시작한다. 미술계에 전자 기술을 적용한 작품이 없다는 것을 깨닫고 자신이 최초가 되고자 마음먹는다. 2년간 TV를 연구한 끝에 최초의 TV작품을 선보인다.

첼리스트 샬롯 무어만을 만나 뉴욕으로 온 백남준은 무어만과 함께 나체 상태로 첼로를 연주하는 공연을 한 후 경찰에 체포된다. 이 공연은 외설인가, 예술인가에 대한 논쟁을 불러온다. 재판까지 받게 된 공연은 예술에서 표현의 자유를 지지한 친구들과 예술가들의 지지와 도움으로 승소한다. 이어 백남준은 무어만과 비디오아트 작업을 함께 해 <TV첼로>를 만든다.

전위예술을 계속하면서 고국의 토속 신앙 무속에서 예술의 영감을 얻어 비디오아트로 인류평화를 염원하는 굿판을 벌인다. 이후 백남준은 비디오아트의 선구자로 전 세계적인 명성을 이어가게 된다.

 

<돌조각을 예술로, 모노파 대표 미술가 이우환>

음악, 문학, 미술 등 다양한 영역에 관심이 많았던 이우환은 작곡가를 꿈꿨지만 재능이 부족함을 느끼고 문학가를 꿈꾼다. 미술로 나아갈 길을 정한 이우환은 철학하는 미술가가 되기로 결심하고 가장 먼저 철학적 미술비평문을 발표해 일본미술계를 놀라게 한다. 비평문에서 근대와 근대미술을 비판한 후 인류가 나아가야 할 방향을 자신의 조각과 회화로 제시한다. 이우환은 인간중심주의와 이성중심주의에 치우친 인간의 사고방식을 근대의 한계로 제시한다. 근대의 사고방식으로 인해 작품의 모든 것을 지배하고 통제한 결과 근대미술 작품은 공장의 기계로 인쇄한 듯 차갑고 매끈해져 갔다. 자연으로 나가 작품을 제작하는 것에 대해서도 이우환은 자연을 작품 제작을 위한 부품으로 보고 마음대로 파헤치고 잘라내는 행태가 자연을 파괴하는 것과 같다고 비판한다. 근대주의 사고방식의 고정관념을 뒤집고 타자는 인간과 동등하게 가치 있는 것이므로 타자와 대화를 시작해야 한다고 말한다. 이우환은 자신의 작품을 통해 관객이 타자와의 만남을 직접 체감해볼 수 있기를 원했다. 그 타자의 대상으로 을 설정하고, 있는 그대로의 돌을 보면서 타자인 돌과 대화를 나누는 시간을 갖게 한다. 이성을 가진 인간이 세상의 중심이라는 오만한 생각을 가진 인간에게 타자 역시 인간과 동등하게 가치 있다는 것을 알려준다. 이우환은 자신의 자아를 줄이고 작품에 최소한의 개입만 하려 노력했고, 타자와 자아, 자연과 산업사회, 너와 내가 사이좋게 공존하는 세상을 꿈꾸면서 조각과 회화를 만들었다.

 

방구석 미술관 2, 한국에 실린 10명의 예술가는 일제식민지 시대를 살았고, 6.25전쟁의 참상을 겪은 사람들이다. 수탈과 전쟁으로 폐허가 된 나라에서 예술을 한다는 것은 쉽지 않았을 것이다. 격동기를 살아가면서 예술을 위해 온 생애를 바친 이들이 있었기에 우리의 문화는 꽃피울 수 있었다. ‘이중섭, 나혜석, 이응노, 유영국, 장욱진, 김환기, 박수근, 천경자, 백남준, 이우환은 한국 근현대 미술사에 큰 획은 그은 예술가들이다. 이 사람들의 이야기를 한 권에 모두 싣는 다는 것은 어려운 일이다. 방구석 미술관 2, 한국은 최대한 많은 내용을 알려주려 노력한 모습들이 보인다. 이 책은 10명의 예술가를 이야기하지만 이 안에 더 많은 예술가들과 작품들이 소개되어 있어 더 흥미롭게 읽을 수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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