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왕진 가방 속의 페미니즘 - 동네 주치의의 명랑 뭉클 에세이
추혜인 지음 / 심플라이프 / 2020년 9월
평점 :
‘나는 왕진을 다니는 동네 주치의다.’(5페이지, 첫문장)
자전거를 타고 가는 의사는 왕진 가방을 들고 동네 언덕을 오른다. 이 의사를 찾는 사람들의 대부분은 거동이 불편한 고령의 환자들이다. 의료기관이 아닌 집에서 보호자나 요양보호사의 간병을 받는 환자들에게 진료를 받기 위해 병원을 가는 것은 쉽지 않은 일이다. 추혜인 의사선생님은 이런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살림의료복지사회적협동조합’을 설립한다. 살림의원은 여성주의 의료협동조합으로 동네 주민들과 페미니스트들이 함께 만든 병원이고 이곳에서 페미니즘은 진료에 필수적인 요소가 된다. 살림의원이 여자들만 일하는 곳이냐는 질문에 ‘여자든 남자든, 누구라도 일할 실력이 있고 일하려는 의지가 있는 사람들이 일할 수 있는 곳이라고, 여기는 여자만 일하는 곳이냐는 질문에 크게 신경 쓰지 않는 사람들이 일하는 곳이라고(89페이지). 답한다. 이 곳에서는 누구나 자신의 성별, 성별 정체성, 직업, 계급, 인종, 나이, 학력 등에 관계없이 차별 없는 진료를 받을 수 있다.
“제 큰형님은 세상에서 가장 뛰어난 명의입니다. 큰형님은 병이 생기기 전에 미리 조절해줘서 사람이 병에 걸리지 않고 무병장수할 수 있게 합니다. 둘째 형님은 큰형님만큼은 아니지만, 병의 조짐이 보이면 미리 알고 조절해줘서 큰 병으로 발전하지 않게 합니다. 저는 그런 안목이 없기 때문에 사람이 큰 병에 걸린 뒤에 치료를 합니다. 큰 병에서 회복된 사람들에게 제가 대단한 줄 알지만, 사실은 병이 생기지 않도록 예방해주고, 또 큰 병으로 발전하지 않도록 이른 시기에 치료하는 두 형님이 진짜 명의입니다.”(29~30페이지, 명의 화타의 이야기)
의술의 명인 화타는 자신을 칭송하는 사람들에게 자신의 형들이 명의라 얘기한다. 질병 예방에는 여러 단계가 있는데, 질병이 발생하기 전 미리 차단하는 것이 1차 예방, 질병을 조기에 발견하는 것을 2차 예방이라 한다. 화타의 형처럼 살림의료협동조합 왕진 의사는 의료시설 이용이 어려운 환자들을 돌보면서 병이 생기지 않도록 예방하고 큰 병으로 발전하지 않도록 이른 시기에 치료해주는 진짜 명의들이다.
‘공감’과 ‘신뢰’가 『왕진 가방 속의 페미니즘』의 가장 핵심적인 단어라 생각한다.
‘환자들은 최고 실력을 가진 의사가 아닌, 나의 고통과 상처에 공감해주는 의사를 주치의로 만나고 싶어 계속 찾아다니게 되는 것인지도 모른다(59페이지).’
이 말에 절대 공감한다. 아이가 어릴 때 갔던 병원에서 아이의 증상이 걱정되어 질문한 나에게 ‘묻는 것만 답하세요’라며 면박을 받았던 적이 있다. 아픈 아이가 걱정되고 의사의 설명에서 이해되지 않는 것들을 묻는 보호자에게 면박 주는 의사, 그 후로 그 병원은 다시는 가지 않았다. 공감까지는 바라지 않지만 면박까지 줄 필요는 없었을 텐데. 다행히 친절한 선생님이 계시는 병원을 찾아 그 후로 그 병원에서 아이들 진료를 받았다. 고통과 상처에 공감해주지 않고 말로 상처 주는 의사는 아무리 실력이 뛰어나더라도 가고 싶지 않다. 의사는 공감을 넘어 아픔의 이유를 찾아내 이름을 붙여주는 ‘적절한 진단적 공감’까지 이어져야 한다고 말한다. 의사가 환자가 말하는 증상을 귀 기울여 듣고 환자를 신뢰하고 공감한다면 환자 또한 의사를 신뢰할 수 있게 된다고 믿는다.
『왕진 가방 속의 페미니즘』은 살림의료협동조합에 대한 이야기와 더불어 페미니즘에 대한 이야기도 나온다. 남성의 공간으로 상징화되는 의료 현장 노동자의 대부분은 여자의료인들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의료는 ‘남자 의사’로 상징되고 있고, 수술과 수술실은 ‘남자의 공간’으로 상징화되고 있다고 한다. 나이 많은 여자 의사가 수술방에 들어갔을 때 인턴이 청소아줌마로 착각했다는 이야기는 나온다. 수술장에서 남자들은 나이가 많을수록 인턴-전공의-전임의-교수 순으로 지위가 올라가지만 여자들은 나이가 많을수록 인턴이나 전공의(즉 의사)-간호사-청소노동자 순으로 지위가 낮아진다고 한다. 그렇기 때문에 나이 많은 여자 의사를 청소아줌마로 착각하는 일도 벌어지는 것이다. 대부분의 여자의료인들의 노동은 잘 보이지 않게 된다는 내용을 읽으면서 ‘그림자 노동’이 생각났다. 여성들의 노동은 많은 노동 시간과 노력을 들였음에도 불구하고 남성의 노동보다 낮게 평가된다. 여자는 간호사, 남자는 의사라는 편견이 아직도 존재하는 사회에서 여자 의료인들의 노동의 가치를 알리는 노력이 반드시 필요하다고 생각한다. 노동의 가치를 평등하게 평가받을 때 의료인들과 환자 모두에게 더 질 높은 진료가 이루어질 수 있을 것이라 생각한다.
『왕진 가방 속의 페미니즘』은 ‘의료협동조합’에 대해 잘 알지 못했던 나에게 의료협동조합이 무엇이고 어떤 일들을 하는지를 알려준다. 누군가는 ‘페미니즘’이라는 말에 거부감을 일으킬 수도 있다. 하지만 이 책은 단순한 페미니즘만을 이야기하지 않는다. 살림의원 설립과 운영, 환자들의 사례를 통해 ‘동네주치의 제도’에 대해 생각해 보게 하는 책이다. 왕진의사는 지금은 존재하지 않는다고 생각했었는데 2020년 현재에도 존재하고, 거동이 불편한 환자들과 그 보호자들까지도 보살피고 있다는 것이 놀라웠다. 의사와 환자가 서로를 믿고 공감할 때 진정한 진료가 가능하다 생각한다. 더 많은 의료복지사회적협동조합이 설립되어 더 많은 환자들이 마음 편하게 진료 받을 수 있기를 바래본다. 내가 나이 들어 거동이 불편할 때 동네주치의가 있다면 좋겠다는 생각을 하면서 책을 읽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