느리게 가기 - 진정한 자유로 나아가는 가장 현명한 선택
미리암 메켈 지음, 김혜경 옮김 / 로그인 / 2009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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절판


처음 이 책의 제목을 보고는  '느리게 살기' 류의 성찰과 관조의 메시지를 담은 책인줄 알았다. 사실 메시지는 그렇다. 그러나 이 책이 비슷한 메시지를 담고 있는 유사한 책들과 다른 점은 우리가 공기처럼 그 안에 살고 있으면서도 의식을 할 수 없을 정도로 우리 생활의 일부분이 된 디지털 라이프를 겨냥하고 있다는 점이다.

디지털 보헤미안.
조금은 낭만적인 뉘앙스를 담고 있는 이말에서 무엇이 연상되는가.
아마 대부분 최신 디지털 기기로 무장하여 시공간의 한계를 뛰어넘으며 능숙하게 일을 처리하는 멋진 현대인의 모습을 떠올릴 것이다.  
우리는 언제, 어디서는 접속하여 있다. 접속하는 혹은 접속되어 있는 인간, 이른바 호모 커넥투스(Homo connectus)가 우리의 새로운 정체성이다.
나는 이메일을 한다.(혹은 나는 문자를 보낸다) 고로 나는 존재한다 는 세상에 살고 있는 것이다.

저자인 스위스 생 갈렌 대학 미디어 커뮤니케이션스 매니저먼트 학과의 미리암 메켈 교수는 이런 멋있어 보이는 디지털 보헤미안적 삶에 대해 비판적인 질문을 던진다. 
언제 어디서나 접속되어 있는 우리는 과연 진정으로 상대방과 소통하고 있느냐고, 혹은 우리의 삶의 질이 나아지고 있고 행복해지고 있느냐고.

다양한 IT 기기와 서비스를 활용하여 여러가지 동시에 처리하는 멀티태스커는 일반적으로 유능함을 연상신킨다. 그러나 저자는 창의성은 성찰적 사고에서 나오며 이것은 성찰적 휴식에서 나오는데 디지털 보헤미안은 늘 접속해 있음으로 해서 자의든 타의든 본연의 업무가 끊임없이 중단됨으로써 일에 전념하거나 몰입할 수가 없다고 하였다.
현대인들은 기술적으로는 소통, 사회적으로는 고립 이라는 역설적인 상황에 놓여 있다.

그러면서 침묵의 중요성에 대해 강조하면서 두가지 사례를 제시하였다.
하나는 하인리히 뵐의 소설 <무르케 박사의 침묵 모음>에 나오는 괴짜 라디오 편집부장 무르케 박사는 중요 인사의 대담 내용 중 발언이 아니라 침묵의 순간만을 편집한다. 끊임없이 말하고 듣는 그에게 침묵이야말로 아주 특별한 휴식이라는 것이다. 

두번째 사례는 문자메시지와 디지털 소음에 지친 사람들이 즐겨 찾는 'alleinr.de'사이트이다. 이 사이트는 위에 보시다시피 사진도, 그래픽도, 팝업도, 링크도 없다. 오로지 "긴장을 푸세요. 여기서는 아무것도 할 필요가 없습니다. 누군가에게 연락하지 않아도 됩니다. 자료를 올리지도 않습니다. 댓글도 달지 않습니다. 만나지도 않습니다. 당신이 무엇을 하든지 아무도 보지 않습니다. 당신은 혼자입니다" 라는 말만 씌어 있을 뿐, 스크롤을 밑으로 내리라는 마지막 명령에 응하면 검정 모니터만 남게 된다.

이처럼 저자는 통신의 바다에서 허우적거리며 사는 무절제한 통신과다의 삶에서 침묵의 시간, 성찰의 시간이 필요함을 역설산다.
그래서 다음과 같은 질문을 스스로에게 던져볼 것을 조언한다.

1. 지나치게 온라인 접속이 많지는 않은지 곰곰이 되새겨보자. 그 시간이 길어질수록 나는 사회에 접속하기 어려워질 것이다.

2. 나는 언제든 연락이 닿은 사람인지 되돌아보자. 만약 그렇다면 나는 실제로 어느 누구와도 진정으로 함께하고 있는 것이 아니다.


그래서 이메일이나 메시지의 수 등 통신의 양이 아니라, 통신의 질이 중요하며 통신의 질을 높이기 위해서는 시간이 필요하다고 한다. 그러기 위해서는 온라인으로 연락이 닿지 않는 것, 바로 그 순간 진정 누군가 혹은 무언가를 위해 존재할 수 있다, 우리는 때때로 개인적이고 실존적인 난수신지역이 필요하다, 그것은 삶의 질을 향상시켜줄 뿐만 아니라 생존을 위해서도 중요하다고 주장한다. 

 그리고 저자는 정보통신기술이 인간에게 미치는 다양한 사회문화적 현상과 디지털 라이프들에 관해 기술한다. 
즉 인터넷 중독, 스팸메일, 정보과잉과 선택의 어려움, 일과 생활의 불균형, 공적 영역과 사적 영역의 경계의 불분명, 휴대폰 예절 등 우리들이 일상적으로 경험하는 것들에 대해 전혀 어렵지 않고 쉬운 내용으로 그 그 문제점들이 우리들 삶에 미치는 영향에 대해 진지하게 이야기한다.  

예를 들면, 휴대폰으로 전화를 걸거나 받는 시늉을 함으로써 당혹스럽거나 따분한 상황을 벗어나기, 그리고 공공장소에서 핸드폰으로 크게 떠들며 자기의 중요성을 떠벌이는 허세 부리기 등에 관해 그 심리를 재미있게 묘사한다.  
따라서 이런 부정적인 정보통신이용문화에서 벗어나기 위해 그가 제시하는 느리게 살기, 자기 절제, 무위의 행동, 단순한 삶이란 해법(?)이 결코 도덕적인 훈계마냥 무겁게 다가오지 않는다. 

물론 이런 류의 처방이 대부분 그렇듯이 말은 쉬워도 실천하기는 무척 어렵다.
그래도 몇해전 모 이동통신회사의 광고 카피로 유명해진 말, "때로는 꺼두셔도 좋습니다."를 실천해야 할 때가 아닌가 싶다.

디지털 시스템을 파괴하는 러다이트 혹은 디지털에서 도피하는 로빈슨 크루소적 삶을 살지 않으려면 말이다. 사실 디지털이 이제 하나의 생태계를 이룬 상태에서 이런 환경을 파괴하거나 절연하는 방식은 불가능하다. 이제 유무선 디지털망이 연결되지 않는 무인도란 찾기가 쉽지 없다. 적어도 2009년 대한민국에서는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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번역과 일본의 근대 이산의 책 14
마루야마 마사오+가토 슈이치 지음, 임성모 옮김 / 이산 / 2000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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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책 제목에서 알 수 있듯이  이 책은 막부말기와 메이지유신 초기 즉 19세기 후반 일본의 근대형성기에 있어서의 번역에 얽힌 이야기를 두 명 전문가의 대담을 통해 풀어나가고 있다. 즉 당시의 시대적 배경과 번역의 대상과 번역의 방법 그리고 번역이 일본사회에 미친 영향 등을 종합적으로 살피고 있다. 그런데 당시 번역이란 근대화된 서양을 알고자 하는 욕구에서 비롯된 것이므로 당시 번역에 얽힌 이야기를 좇아가다보면 일본 근대화의 여정을 이해할 수 있다. 따라서 이 책은 번역으로 바라본 일본 근대사라고도 할 수 있다.

    1. 왜 번역을 하였는가.

    일본은 동양의 전통적 맹주인 중국이 아편전쟁에서 양놈(?)들에게 완판으로 깨지는 것을 보고 엄청난 위기의식을 느낀다. 정작 중국인들은 자기들이 세계의 중심이라는 중화의식에 빠져서 "원래 무식한 오랑캐것들이 힘만 쎄가지구. 머리는 빈 것들이..." 하고 자위한 반면 무사들인 막부 지배층은 서양 무력의 실체를 접하고 고수(?)를 알아본다. "이거 큰일 났군. 정보를 얻어야겠다. 배워야겠다"고 생각하고는 유학생과 사절단을 고수들의 나라인 서양으로 보내는 한편 번역에 매진하게 된다. 이를 통해 일본은 서양을 모델로 한 근대화를 추진하게 된다. 그전까지는 일본 막부도 우리와 마찬가지로 양이론(攘夷論)을 견지하다가 이런 위기상황을 접하고 개화론으로 극적인 전환을 한다. 특히 양이론의 중심지였던 사쓰마번과 초슈번은 서양과 전쟁까지 벌인 뒤에 서양의 무력을 감지하고 가장 빨리 전향을 하였다. 우리에게 낯익은 이토 히로부미는 바로 초슈번 출신으로서 서양 사절단으로 파견되어 개화론의 선봉에 서게 된다. 흡사 조폭(?)들의 모습을 연상케한다. 조직 폭력배끼리의 싸움에 지기 난 뒤, 깨끗하게 패배를 인정하며, "형님"하고 절대 복종의 의미로 꾸뻑 절하는 모습과 같다. 복종할뿐만 아니라 힘의 실체를 배우기 위해 "졌다고 생각하면 곧바로 상대국에 유학"을 보낸다.

    * 오해없기 바란다. 조폭에 빗댄 표현은 일본의 극적인 전환을 폄하하려 뜻은 전혀 없고 단지 비유적 표현이다.

    어쨌든 19세기 후반에 서양 열강이 크림전쟁, 남북전쟁 등으로 일본에 군사적 압력을 가할 처지가 되지 못하였다는 외부적 요인에 이처럼 재빠른 변신이란 내부적 요인이 겹쳐져서 일본은 19세기 말 20세기 초 동양에서 유일하게 근대화에 성공하게 된다. 대부분의 일본인 학자들은 외부적 요인이라는 행운을 인정하려 하지 않지만 저자들은 이러한 행운이 없었다면 일본이 서양세력의 침략을 받아서 식민지가 되거나 영토의 일부를 빼앗겼을지도 모른다고 하였다. 저자들에 의하면 "일본은 패전을 겪으면 하루아침에 변하는 것이 실로 극적일 정도"라고 한다. 사쓰마와 영국과의 전쟁의 경우에도 그랬고 태평양전쟁때도 그랬다.

    당시에 회자되던 우스운 이야기가 있다. 워낙 막부의 통제를 받지 않고 따로 놀던 각 번들이 서양세력을 상대로 문제를 일으켜서 막부에서 배상을 하느라 골치를 썩이다보니 링컨이 암살당했다는 보고가 전해졌을 때에 막부 지도층이 "어휴, 또 배상을 해야 하냐"라고 탄식했다고 한다.  

    그럼, 우리 조선은 어떠했던가.

    19세기 후반에 외부적 요인 즉 서양열강이 내부 문제로 동아시아를 침략할 겨를이 없었다는 행운은 우리에게도 있었지만 우리는 병인양요와 신미양요에서 서양세력을 물리쳤다는 자그만 자긍심에 들떠서 전국에 척화비를 세우며 나라의 문을 단단히 걸어잠근 채 거대한 서양세력의 실체를 알려는 진지한 노력을 기울이지 않았다. 여기서 일본과 조선의 19세기 후반과 20세기 노정이 갈렸다.

    이 시기 즉 막부 말기와 메이지유신 초기에 일부 선각자들은 중국어를 외국어로 인식하기 시작했다. 이는 일본어, 일본의 정체성 자각에 중요한 의미를 지닌다. 당시 조선의 식자층들은 한자를 외국어가 아닌 자신의 언어처럼 인식하면서 생활하였다. 그런데 일본의 선각자들은 수백년 동안 써오던 한자를 타자(他者)로 인식함으로써 일본어에 대한 자각을 하기 시작했다. 또 이 시기 언어에 대한 중요한 논쟁이 뜨겁게 타올랐다. 몇해전 우리나라에서도 이슈가 되었던 일본어 공용어 논쟁과 비슷하지만 한발 더 나간 것으로서, 영어를 국어로 삼자는 주장을 하였다. 그들은 일본어에는 추상어가 없기 때문에, 일본어를 가지고는 도저히 서양문명을 일본 것으로 만들 수 없다라고 하였다. 이에 대해 반박론자들은 언어가 달라져 버리면 하나의 나라를 이룰 수 없을 뿐더라, 하층계급의 대다수가 국사라는 중대문제로부터 배제될 것이라는  우려를 표명하며 영어채용론을 잠재웠다.

    2. 얼마나 번역을 하였나?

    얼마나 많은 책들이 번역되었는지 정확한 치는 알 수 없지만 이 시기 번역 열풍을 가늠해볼 수 있는 저작물이 있다. 바로 <역서독법(譯書讀法)>이란 책으로 번역서를 어떻게 읽을 것인가에 대한 책이다. 메이지 16년(1883년)에 출판된 이 책의 서문에 의하면 "이 즈음 번역서 출판이 성황을 이루어 그 권수가 몇만에 이르니 한우충동이 무색할 지경이다. ....(중략).... 역서가 많아질수록 세상 사람들도 역서를 읽는 앞뒤 순서가 헷갈리거나  책 이름만 알 뿐 내용을 모른다. 무슨 일을 알려면 어떤 책을 읽어야 될지, 또 어떤 책이 같은 종류의 책 중에서 제일 유익한지 알 수 없는 지경에 이른다...."라고 하여 번역의 홍수시기를 맞이하여 순전히 책 읽는데 도움을 주기위한 길라잡이 책으로 집필하였음을 말하고 있다. 물론 저자들은 수만권은 과장된 수치이고 수천에 이를 것이라고 하였으나 수천이든 수만이든 대단한 번역량이며 서양을 배우려는 대단한 지적욕구의 표출이다.  

    처음에는 지식인이나 무사계급이 번역의 주 독자층이었으나 곧 급속도로 일반인에게도 확대되는 등  문명개화, 근대화, 서양화는 유행을 넘어 일종의 시대정신이었다. 메이지 정부가 직접 번역에 나서기도 하는 등 당시 번역은 부국강병책을 위한 범국가적 프로젝트였다고 할 수 있다. 

    1883년이면 우리나라에서 개화파의 갑신정변이 일어나기 바로 전해이다. 한편에서는 나라의 빗장을 열어 서구의 문물을 받아들이자는 신진세력의 쿠데타가 3일 천하로 끝나는데 비해 현해탄 저쪽에서는 발달된 서구를 배우려는 독서와 학습열풍이 불었다니 달라도 이렇게 다를 수가 있는지 모르겠다. 

    3. 그럼, 주로 어떤 책들을 번역하였나?

    번역서가 수천에 달하다보니 거의 모든 영역을 망라한다고 볼 수 있는데 특히 많이 번역된 분야가 지리와 역사, 군사, 병법, 자연과학, 법률 관계 서적이었다. 개국을 맞아 서양나라가 어디에 있는지 알기 위해 지리에 관해 알고자 하는 것은 당연하다. 그리고 역사를 중시하는 동양 삼국의 전통적인 문명적 습관과도 연관이 있겠지만, 근대화에 성공한 서양의 나라들을 이해하려면 역사적 맥락에서 이해하는 것이 필요하다는 인식을 바탕으로 다양한 만국사와 각국사가 번역되었다. 그런데 역사에 대한 그들의 관심은 당시 서양 강국뿐만 아니라 고대 그리스, 로마의 역사로까지 거슬러 올라가는데 이는 유럽 문명을 기본부터 탐구하려는 자세가 없으면 불가능하다. 참 대단한 일본인이라는 생각이 든다. 또한 제도개혁을 하자면 상대방의 제도를 참고하지 않으면 안되고 서양의 군사력에 압도되어 문호를 열었던 관계로 군사관계나 병법 분야 서적에 대한 관심은 충분히 이해가 간다. 한편 그들은 자연과학 중 특히 화학에 깊은 관심을 보였는데 그것은 화학이 당시 대표적인 경공업인 섬유산업에서의 염료 그리고 군사에 중요한 화약, 그리고 농업 생산량 증대에 필수적인 비료와 연관이 되어 있기 때문이었다. 또한 서양과의 교류와 제도 개혁 등의 필요성 때문에 법률 관계 서적들에 관심이 많았다. 

    4. 어떻게 번역을 하였나?

    언어란 사상을 담는 그릇이라고 하지 않는가. 일본과는 판이하게 다르거나 일본에 없는 서양의 정치, 경제, 사회 제도와 사상을 표현하는 서양의 언어에 대응하는 일본의 언어가 없었으므로 그것을 일본어로 옮기기란 거의 책을 새로 쓰는 수준의 어려움을 동반하였을 것으로 추측된다.  

    이런 난관을 일본인들은 먼저 한역본 즉 기존에 중국어 번역본이 있으면 한역본을 참고하였다. 이 경우에는 예를 들면 영어->중국어->일본어의 이중역이니까 원뜻과는 다른 오역이 발생하기도 하였다. 물론 청일전쟁을 계기로 중, 일 사이에 어휘 차용의 역전현상이 일어나서 그 이후에는 오히려 중국에서 일본어 번역본을 참고하는 일이 벌어지게 된다.

    또 다른 방법은 새로 단어를 만드는 것인데, 조어에는 세종류가 있다. 하나는 기존 한자의 의미를 바꾸지 않고 조합해서 쓴 경우, 두번째는 '자유'처럼 이전부터 있던 한자어의 의미를 바꿔서 사용한 경우, 세번째는 '부동산'처럼 완전히 새롭게 만들어 낸 경우가 있다. 일반적으로 이런 신조어는 거의 모두 한자였다. 우리도 그렇지만 당시 일본 사회에서도 한자 대신 가나를 쓰면 위엄이 없어 보여서 그랬단다. 

    5. 번역이 일본 사회, 문화에 어떤 영향을 미쳤나?

    중국 옛 말에 강남의 귤이 강북에 가면 탱자가 된다고 했던가. 서양의 학문과 사상이 일본어로 번역되면서 탱자(?)로 왜곡되거나 변형되기도 하였다. 예컨대 적자생존과 자연도태의 다윈의 진화론은 일본에서 제국주의적인 사회진화론으로 해석된다.

    19세기 후반 서구의 다양한 정치, 사회사상이 일본사회에 번역을 매개로 일본사회에 들어와 이데올로기 쟁탈전을 벌인다. 보수주의, 진보주의, 자유민주주의, 사회주의, 공산주의 등. 이 각축전이 가장 뜨겁게 벌어진 분야가 1880년대의 헌법논의였고 그 행로는 프랑스학->영국학->독일학이라는 준거틀의 변모로 나타났다. 그래서 자유민권운동으로 대표되는 프랑스학, 영국학 대신에 메이지 정부의 정책을 뒷받침한 독일학이 헤게모니를 장악함으로써 이데올로기 쟁탈전은 일단락되고, 근대 일본은 제국주의화로 나아간다. 

    6. 우리의 번역은?

    예전 중학교인가 고등학교인가 국어책에 향가 해석의 대가이신 고 양주동 박사가 소학교에서 처음 영어문법을 공부할 때의 당혹감에 관한 내용이 실렸었다. 문법책에 3인층 단수라는 용어가 나오는데 이것이 무슨 말인지 도저히 모르겠더라는 이야기였다. 인칭이나 단수, 복수에 관한 단어는 물론이고 그런 개념 자체가 없었기 때문이다. 물론 일본인들이 만든 신조어일텐데 그 전에는 일본에도 그런 개념이 없었다. 

    일본은 처음, 영어-중국어-일어의 이중역(나중에는 중간에 중국어가 빠지고 영어에서 곧바로 일어로)
    했다고 했는데 우리는 일어-한국어 과정이 마지막에 추가되니 결국 삼중역(혹은 이중역)에 해당되는 셈이다. 이러니 서양의 문명과 제도, 사상이 곧바로 직수입된 것이 아니라 일본을 통해 변용되거나 왜곡 혹은 일본식화된 것이 받아들여지게 된다.

    이 점에서 우리의 근대화 과정에서 우리의 번역은 어떻게 전개되었고 우리의 의식, 제도에 어떤 영향을 미쳤는지 하는 것은 충분히 연구할 가치가 있다고 본다. 관련 학자들의 연구를 기대해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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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8세기 조선 지식인의 발견 - 조선 후기 지식 패러다임의 변화와 문화 변동
정민 지음 / 휴머니스트 / 2007년 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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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양대 국문과 정민교수는 조선 후기 문학작품의 분석을 통해 봉건과 근대 사이에서 갈등하는 지식인의 자의식과 당대 문화를 감칠맛나는 언어로 묘사해왔다. 그의 글을 통해서 단순히 실학이 주름잡던 시대로만 알고 있던 조선후기의 보다 풍부한 모습이 손에 잡힐 듯 그려진다. 몇해전 그가 쓴 '미쳐야 미친다'라는 책을 읽으며, 그동안 생소했던 '벽'과 '치'문화에 대해 알게 되었다.

이번에 읽은 '18세기 조선지식인의 발견'이란 책 역시 '미쳐야 미친다'란 책과 같이 '벽'과 '치'를 통해 당대 문화사를 복원하는 한편, 그러한 특징적인 문화현상이 나타나게 된 배경을 깊이있게 살피고 있다.

그에 의하면, 18세기는 조선뿐 아니라 세계사적으로도 특별한 세기였다며, 유럽의 계몽주의 학자들이 중세의 억압에서 벗어나 지식의 재배치와 백과전서적 저작에 몰입하고 있을 때 조선의 지식인들도 주자학 일변의 문화자장을 이탈하여 새로운 방식의 지식경영에 몰입하고 있었다고 하였다. 

또라이, 달인의 출현, 18세기  

그럼, 18세기 조선 지식인들에게 갑자기 나타난 특징적인 문화현상이 무엇이었을까. 그는 그것을 '벽(癖)'과 '치(癡)'에 대한 예찬이라고 하였다. '벽'은 일반적으로 낭비벽, 도벽이란 말에서 보듯, 어떤 것에 대한 기호나 집착이 지나쳐 이성적으로 도저히 억제할 수 없는 병적인 상태, 쉽게 말해서 미친 상태를 가리킬 때 흔히 사용한다. 그런데 이것이 18세기에 이르면 지식인들에게 없어서는 안될 미덕으로 변모하게 된다. 요즘 용어로 치면 마니어 혹은 오다쿠, 또라이, 달인 예찬론이다. 실학자 박제가는 "벽이 없는 인간은 쓸모없는 인간"이라고 공공연히 말할 정도였다. 

또 '치' 즉 바보, 멍청이를 자처하는 경향도 나타났다. 관습적인 기준에서 볼 때 미쳤다는 의미를 지닌 '벽'이 사회적 통념으로는 '치' 즉 바보, 멍청이로 인식되었다. 하지만 이들은 미쳤다거나 바보같다는 말을 오히려 명예롭게 역이며 자신들의 이름이나 호에 치 자를 즐겨 사용했다.

삼경(三經)은? 담배경, 앵무새경, 비둘기경?

그럼, 어떤 '벽'들이 있었나? 종류를 가리지 않는 수집벽, 극히 사소한 사물에까지 미친 애호벽, 편집광적인 정리벽 등 벽의 종류도 무척 다양하다. 보다 구체적으로 벽의 대상을 살펴보자. 앵무새, 비둘기, 호랑이, 물고기, 꽃, 채소, 담배, 책, 돌, 칼, 벼루, 조각, 시, 그림, 표구, 골동품, 상복, 여행, 방언과 속담 등.

심지어 그들은 불경스럽게도 시경, 서경, 역경, 불경, 성경 등 성스럽고 권위있는 책에 붙이는 '경(經)'이란 말을 담배나 앵무새, 비둘기 같은 미물을 기록한 글에 갖다 붙였다. 한편 방대한 정보를 정리하고 조직화하고 편집하는 백과전서적 지식경영이 크게 유행하였는데, 다산의 대표적 저작인 목민심서와 경세유표 외에도 임원경제지, 무예도보통지, 유암총서 등이 있다. 이처럼 그들은 미쳐서 그 분야에서 일가를 이루었다. 즉 불광불급(不狂不及)의 경지에 도달한 것이었다.

이런 경향에 대해 개명군주로 일컬어지는 정조조차도 문체반정(文體反正)이란 사정의 칼날을 빼들어 검열을 하고 귀양을 보내는 등 요즘 용어로 하면 사상과 표현의 자유를 억압하고 탄압하였다.  

18세기 정보혁명

그럼, 사서삼경을 옆에 끼고 공자왈 맹자왈을 외며 과거에 합격하여 입신양명을 꿈꾸어야 할 지식인들이 왜 갑자기 또라이를 자처하게 되었을까. 이런 변화를 가능케 한 힘을 무엇이었을까.

지은이는 이를 정보화에서 찾았다. 즉 이때 와서 정보처리 방식과 정보의 유용성에 대한 판단의 근거가 바뀌었다고 하였다. 사신 등이 중국에서 갖고 온 방대한 양의 서적과 정보 그리고 그들의 문화체험은 조선의 지식인들에게 엄청난 문화적 충격을 주었다. 당시 중국에 간 사신행차의 중요한 일 가운데 하나는 서책 구입이었으며, 그들은 서점가를 돌며 책들을 싹쓸이했다고 한다. 그리고 그들이 갖고 온 책들은 일종의 도서유통사원이라고 할 수 있는 책주름들의 활약에 힘입어 신속하고도 대규모로 유통되었다. 이처럼 서적의 활발한 유통이라는 물적 토대의 변화는 정보의 폭발적 증가를 가져왔으며, 이는 정보의 독점적 권위를 무너뜨리고 지식의 패러다임을 바꾸어 나갔다.

'그때, 저기, 도'에서 '지금, 여기, 진실'로 지식패러다임의 변화

그럼, 지식패러다임이 어떻게 바뀌었나?

수백년간 조선의 지식인들은 공자와 맹자, 주자의 말씀을 신주단지 같이 여기고 한나라와 당나라의 문학작품을 최고의 전범으로 여기며 살았다. 그런데 이런 정보와 경험의 확장을 통해 세계와 인간에 대한 해석의 틀이 바뀌었다. 

즉, 변치않을 도(道)에 대한 맹목적 신뢰를 거두고 눈앞의 진실에 더 큰 관심을 쏟았다.

그리고 '옛날'로 향했던 가치 지향이 '지금'으로 선회했다. 현재 숭상하는 '옛날'이 당대에는 '지금'이었다며 지금과 무관한 어떤 옛날도 무의미하다고 생각했다.

또한 '저기' 즉 중국을 기준으로 삼던 사고가 '여기' 즉 조선 중심의 사고로 변환한다.

이처럼 '지금, 여기, 진실'로의 지식 패러다임의 변화는 문학에 있어서 조선풍(朝鮮風)이나 조선시(朝鮮詩)의 주장과 연결되며, 이것은 미술에 있어서 진경산수화의 등장과도 밀접한 연관을 지닌다.  

위키적 협업에 의한 도서 집필

이러한 지식패러다임의 변화로 정보의 우선가치가 새롭게 정립되고, 모든 지식이 새롭게 편집되고 재배열되었다. 특히 집체작업이 활발히 이루어졌다. 예컨대 귀양살이 동안 500권에 이르는 각종 저작을 펴낸 다산의 저술활동은 대부분 제자들과의 집체작업을 통해 이루어졌다. 또 이서구의 '녹앵무경'은 박제가, 유득공, 이덕무 등의 윤독을 거치는 동안 당초 분량보다 배 이상으로 늘어났다. 이들은 정보사냥대회라도 하듯이 앵무새에 대한 고금의 정보들을 경쟁적으로 찾아내 저술의 부피를 늘리고 체계를 다듬어나갔다. 또 본문 아래 평을 달아 자신의 생각을 보탰다. 이러한 작업방식은 요즘 인터넷 시대의 그것과 상당히 유사하다. 즉 엔사이클로피디어 백과사전을 시장에서 몰아낸 위키피디어를 보는 듯하고 인터넷 댓글 혹은 평을 보는 듯하다.

아웃사이더로 머무르고 만 18세기 조선의 마니아들

이렇게 사람들의 의식은 빠르게 변모한 반면, 제도는 조금도 바뀌지 않았을뿐만 아니라 문체반정에서 보이듯이 오히려 더 보수화되어 갔다. 제도는 변모된 의식을 포용할 여유가 없었고, 지식인들은 변화를 포용하지 못하는 제도의 억압을 답답해했다. 그리하여 세계와 자아 사이에 커진 갈등은 자의식의 붕괴를 가져왔다.

저자는 이들에게서 우리 역사학계가 그토록 찾아헤맸던 근대의 맹아 즉 자생적 근대화의 가능성을 본다고 하였다. 하지만 서구나 일본과 달리 그것은 가능성에 머물렀을뿐 근대의 싹을 피우는 데까지는 나아가지 못하고 말았다. 그들에게도 불행이었지만 조선에게도 불행이었던 것은 그들이 소수자에 머물렀다는 점이다. 왜 그들의 문제의식이 미완의 가능성으로 끝나고 말았는지는 남은 과제로 남겨져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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