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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8세기 조선 지식인의 발견 - 조선 후기 지식 패러다임의 변화와 문화 변동
정민 지음 / 휴머니스트 / 2007년 2월
평점 :
한양대 국문과 정민교수는 조선 후기 문학작품의 분석을 통해 봉건과 근대 사이에서 갈등하는 지식인의 자의식과 당대 문화를 감칠맛나는 언어로 묘사해왔다. 그의 글을 통해서 단순히 실학이 주름잡던 시대로만 알고 있던 조선후기의 보다 풍부한 모습이 손에 잡힐 듯 그려진다. 몇해전 그가 쓴 '미쳐야 미친다'라는 책을 읽으며, 그동안 생소했던 '벽'과 '치'문화에 대해 알게 되었다.
이번에 읽은 '18세기 조선지식인의 발견'이란 책 역시 '미쳐야 미친다'란 책과 같이 '벽'과 '치'를 통해 당대 문화사를 복원하는 한편, 그러한 특징적인 문화현상이 나타나게 된 배경을 깊이있게 살피고 있다.
그에 의하면, 18세기는 조선뿐 아니라 세계사적으로도 특별한 세기였다며, 유럽의 계몽주의 학자들이 중세의 억압에서 벗어나 지식의 재배치와 백과전서적 저작에 몰입하고 있을 때 조선의 지식인들도 주자학 일변의 문화자장을 이탈하여 새로운 방식의 지식경영에 몰입하고 있었다고 하였다.
또라이, 달인의 출현, 18세기
그럼, 18세기 조선 지식인들에게 갑자기 나타난 특징적인 문화현상이 무엇이었을까. 그는 그것을 '벽(癖)'과 '치(癡)'에 대한 예찬이라고 하였다. '벽'은 일반적으로 낭비벽, 도벽이란 말에서 보듯, 어떤 것에 대한 기호나 집착이 지나쳐 이성적으로 도저히 억제할 수 없는 병적인 상태, 쉽게 말해서 미친 상태를 가리킬 때 흔히 사용한다. 그런데 이것이 18세기에 이르면 지식인들에게 없어서는 안될 미덕으로 변모하게 된다. 요즘 용어로 치면 마니어 혹은 오다쿠, 또라이, 달인 예찬론이다. 실학자 박제가는 "벽이 없는 인간은 쓸모없는 인간"이라고 공공연히 말할 정도였다.
또 '치' 즉 바보, 멍청이를 자처하는 경향도 나타났다. 관습적인 기준에서 볼 때 미쳤다는 의미를 지닌 '벽'이 사회적 통념으로는 '치' 즉 바보, 멍청이로 인식되었다. 하지만 이들은 미쳤다거나 바보같다는 말을 오히려 명예롭게 역이며 자신들의 이름이나 호에 치 자를 즐겨 사용했다.
삼경(三經)은? 담배경, 앵무새경, 비둘기경?
그럼, 어떤 '벽'들이 있었나? 종류를 가리지 않는 수집벽, 극히 사소한 사물에까지 미친 애호벽, 편집광적인 정리벽 등 벽의 종류도 무척 다양하다. 보다 구체적으로 벽의 대상을 살펴보자. 앵무새, 비둘기, 호랑이, 물고기, 꽃, 채소, 담배, 책, 돌, 칼, 벼루, 조각, 시, 그림, 표구, 골동품, 상복, 여행, 방언과 속담 등.
심지어 그들은 불경스럽게도 시경, 서경, 역경, 불경, 성경 등 성스럽고 권위있는 책에 붙이는 '경(經)'이란 말을 담배나 앵무새, 비둘기 같은 미물을 기록한 글에 갖다 붙였다. 한편 방대한 정보를 정리하고 조직화하고 편집하는 백과전서적 지식경영이 크게 유행하였는데, 다산의 대표적 저작인 목민심서와 경세유표 외에도 임원경제지, 무예도보통지, 유암총서 등이 있다. 이처럼 그들은 미쳐서 그 분야에서 일가를 이루었다. 즉 불광불급(不狂不及)의 경지에 도달한 것이었다.
이런 경향에 대해 개명군주로 일컬어지는 정조조차도 문체반정(文體反正)이란 사정의 칼날을 빼들어 검열을 하고 귀양을 보내는 등 요즘 용어로 하면 사상과 표현의 자유를 억압하고 탄압하였다.
18세기 정보혁명
그럼, 사서삼경을 옆에 끼고 공자왈 맹자왈을 외며 과거에 합격하여 입신양명을 꿈꾸어야 할 지식인들이 왜 갑자기 또라이를 자처하게 되었을까. 이런 변화를 가능케 한 힘을 무엇이었을까.
지은이는 이를 정보화에서 찾았다. 즉 이때 와서 정보처리 방식과 정보의 유용성에 대한 판단의 근거가 바뀌었다고 하였다. 사신 등이 중국에서 갖고 온 방대한 양의 서적과 정보 그리고 그들의 문화체험은 조선의 지식인들에게 엄청난 문화적 충격을 주었다. 당시 중국에 간 사신행차의 중요한 일 가운데 하나는 서책 구입이었으며, 그들은 서점가를 돌며 책들을 싹쓸이했다고 한다. 그리고 그들이 갖고 온 책들은 일종의 도서유통사원이라고 할 수 있는 책주름들의 활약에 힘입어 신속하고도 대규모로 유통되었다. 이처럼 서적의 활발한 유통이라는 물적 토대의 변화는 정보의 폭발적 증가를 가져왔으며, 이는 정보의 독점적 권위를 무너뜨리고 지식의 패러다임을 바꾸어 나갔다.
'그때, 저기, 도'에서 '지금, 여기, 진실'로 지식패러다임의 변화
그럼, 지식패러다임이 어떻게 바뀌었나?
수백년간 조선의 지식인들은 공자와 맹자, 주자의 말씀을 신주단지 같이 여기고 한나라와 당나라의 문학작품을 최고의 전범으로 여기며 살았다. 그런데 이런 정보와 경험의 확장을 통해 세계와 인간에 대한 해석의 틀이 바뀌었다.
즉, 변치않을 도(道)에 대한 맹목적 신뢰를 거두고 눈앞의 진실에 더 큰 관심을 쏟았다.
그리고 '옛날'로 향했던 가치 지향이 '지금'으로 선회했다. 현재 숭상하는 '옛날'이 당대에는 '지금'이었다며 지금과 무관한 어떤 옛날도 무의미하다고 생각했다.
또한 '저기' 즉 중국을 기준으로 삼던 사고가 '여기' 즉 조선 중심의 사고로 변환한다.
이처럼 '지금, 여기, 진실'로의 지식 패러다임의 변화는 문학에 있어서 조선풍(朝鮮風)이나 조선시(朝鮮詩)의 주장과 연결되며, 이것은 미술에 있어서 진경산수화의 등장과도 밀접한 연관을 지닌다.
위키적 협업에 의한 도서 집필
이러한 지식패러다임의 변화로 정보의 우선가치가 새롭게 정립되고, 모든 지식이 새롭게 편집되고 재배열되었다. 특히 집체작업이 활발히 이루어졌다. 예컨대 귀양살이 동안 500권에 이르는 각종 저작을 펴낸 다산의 저술활동은 대부분 제자들과의 집체작업을 통해 이루어졌다. 또 이서구의 '녹앵무경'은 박제가, 유득공, 이덕무 등의 윤독을 거치는 동안 당초 분량보다 배 이상으로 늘어났다. 이들은 정보사냥대회라도 하듯이 앵무새에 대한 고금의 정보들을 경쟁적으로 찾아내 저술의 부피를 늘리고 체계를 다듬어나갔다. 또 본문 아래 평을 달아 자신의 생각을 보탰다. 이러한 작업방식은 요즘 인터넷 시대의 그것과 상당히 유사하다. 즉 엔사이클로피디어 백과사전을 시장에서 몰아낸 위키피디어를 보는 듯하고 인터넷 댓글 혹은 평을 보는 듯하다.
아웃사이더로 머무르고 만 18세기 조선의 마니아들
이렇게 사람들의 의식은 빠르게 변모한 반면, 제도는 조금도 바뀌지 않았을뿐만 아니라 문체반정에서 보이듯이 오히려 더 보수화되어 갔다. 제도는 변모된 의식을 포용할 여유가 없었고, 지식인들은 변화를 포용하지 못하는 제도의 억압을 답답해했다. 그리하여 세계와 자아 사이에 커진 갈등은 자의식의 붕괴를 가져왔다.
저자는 이들에게서 우리 역사학계가 그토록 찾아헤맸던 근대의 맹아 즉 자생적 근대화의 가능성을 본다고 하였다. 하지만 서구나 일본과 달리 그것은 가능성에 머물렀을뿐 근대의 싹을 피우는 데까지는 나아가지 못하고 말았다. 그들에게도 불행이었지만 조선에게도 불행이었던 것은 그들이 소수자에 머물렀다는 점이다. 왜 그들의 문제의식이 미완의 가능성으로 끝나고 말았는지는 남은 과제로 남겨져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