번역과 일본의 근대 이산의 책 14
마루야마 마사오+가토 슈이치 지음, 임성모 옮김 / 이산 / 2000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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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책 제목에서 알 수 있듯이  이 책은 막부말기와 메이지유신 초기 즉 19세기 후반 일본의 근대형성기에 있어서의 번역에 얽힌 이야기를 두 명 전문가의 대담을 통해 풀어나가고 있다. 즉 당시의 시대적 배경과 번역의 대상과 번역의 방법 그리고 번역이 일본사회에 미친 영향 등을 종합적으로 살피고 있다. 그런데 당시 번역이란 근대화된 서양을 알고자 하는 욕구에서 비롯된 것이므로 당시 번역에 얽힌 이야기를 좇아가다보면 일본 근대화의 여정을 이해할 수 있다. 따라서 이 책은 번역으로 바라본 일본 근대사라고도 할 수 있다.

    1. 왜 번역을 하였는가.

    일본은 동양의 전통적 맹주인 중국이 아편전쟁에서 양놈(?)들에게 완판으로 깨지는 것을 보고 엄청난 위기의식을 느낀다. 정작 중국인들은 자기들이 세계의 중심이라는 중화의식에 빠져서 "원래 무식한 오랑캐것들이 힘만 쎄가지구. 머리는 빈 것들이..." 하고 자위한 반면 무사들인 막부 지배층은 서양 무력의 실체를 접하고 고수(?)를 알아본다. "이거 큰일 났군. 정보를 얻어야겠다. 배워야겠다"고 생각하고는 유학생과 사절단을 고수들의 나라인 서양으로 보내는 한편 번역에 매진하게 된다. 이를 통해 일본은 서양을 모델로 한 근대화를 추진하게 된다. 그전까지는 일본 막부도 우리와 마찬가지로 양이론(攘夷論)을 견지하다가 이런 위기상황을 접하고 개화론으로 극적인 전환을 한다. 특히 양이론의 중심지였던 사쓰마번과 초슈번은 서양과 전쟁까지 벌인 뒤에 서양의 무력을 감지하고 가장 빨리 전향을 하였다. 우리에게 낯익은 이토 히로부미는 바로 초슈번 출신으로서 서양 사절단으로 파견되어 개화론의 선봉에 서게 된다. 흡사 조폭(?)들의 모습을 연상케한다. 조직 폭력배끼리의 싸움에 지기 난 뒤, 깨끗하게 패배를 인정하며, "형님"하고 절대 복종의 의미로 꾸뻑 절하는 모습과 같다. 복종할뿐만 아니라 힘의 실체를 배우기 위해 "졌다고 생각하면 곧바로 상대국에 유학"을 보낸다.

    * 오해없기 바란다. 조폭에 빗댄 표현은 일본의 극적인 전환을 폄하하려 뜻은 전혀 없고 단지 비유적 표현이다.

    어쨌든 19세기 후반에 서양 열강이 크림전쟁, 남북전쟁 등으로 일본에 군사적 압력을 가할 처지가 되지 못하였다는 외부적 요인에 이처럼 재빠른 변신이란 내부적 요인이 겹쳐져서 일본은 19세기 말 20세기 초 동양에서 유일하게 근대화에 성공하게 된다. 대부분의 일본인 학자들은 외부적 요인이라는 행운을 인정하려 하지 않지만 저자들은 이러한 행운이 없었다면 일본이 서양세력의 침략을 받아서 식민지가 되거나 영토의 일부를 빼앗겼을지도 모른다고 하였다. 저자들에 의하면 "일본은 패전을 겪으면 하루아침에 변하는 것이 실로 극적일 정도"라고 한다. 사쓰마와 영국과의 전쟁의 경우에도 그랬고 태평양전쟁때도 그랬다.

    당시에 회자되던 우스운 이야기가 있다. 워낙 막부의 통제를 받지 않고 따로 놀던 각 번들이 서양세력을 상대로 문제를 일으켜서 막부에서 배상을 하느라 골치를 썩이다보니 링컨이 암살당했다는 보고가 전해졌을 때에 막부 지도층이 "어휴, 또 배상을 해야 하냐"라고 탄식했다고 한다.  

    그럼, 우리 조선은 어떠했던가.

    19세기 후반에 외부적 요인 즉 서양열강이 내부 문제로 동아시아를 침략할 겨를이 없었다는 행운은 우리에게도 있었지만 우리는 병인양요와 신미양요에서 서양세력을 물리쳤다는 자그만 자긍심에 들떠서 전국에 척화비를 세우며 나라의 문을 단단히 걸어잠근 채 거대한 서양세력의 실체를 알려는 진지한 노력을 기울이지 않았다. 여기서 일본과 조선의 19세기 후반과 20세기 노정이 갈렸다.

    이 시기 즉 막부 말기와 메이지유신 초기에 일부 선각자들은 중국어를 외국어로 인식하기 시작했다. 이는 일본어, 일본의 정체성 자각에 중요한 의미를 지닌다. 당시 조선의 식자층들은 한자를 외국어가 아닌 자신의 언어처럼 인식하면서 생활하였다. 그런데 일본의 선각자들은 수백년 동안 써오던 한자를 타자(他者)로 인식함으로써 일본어에 대한 자각을 하기 시작했다. 또 이 시기 언어에 대한 중요한 논쟁이 뜨겁게 타올랐다. 몇해전 우리나라에서도 이슈가 되었던 일본어 공용어 논쟁과 비슷하지만 한발 더 나간 것으로서, 영어를 국어로 삼자는 주장을 하였다. 그들은 일본어에는 추상어가 없기 때문에, 일본어를 가지고는 도저히 서양문명을 일본 것으로 만들 수 없다라고 하였다. 이에 대해 반박론자들은 언어가 달라져 버리면 하나의 나라를 이룰 수 없을 뿐더라, 하층계급의 대다수가 국사라는 중대문제로부터 배제될 것이라는  우려를 표명하며 영어채용론을 잠재웠다.

    2. 얼마나 번역을 하였나?

    얼마나 많은 책들이 번역되었는지 정확한 치는 알 수 없지만 이 시기 번역 열풍을 가늠해볼 수 있는 저작물이 있다. 바로 <역서독법(譯書讀法)>이란 책으로 번역서를 어떻게 읽을 것인가에 대한 책이다. 메이지 16년(1883년)에 출판된 이 책의 서문에 의하면 "이 즈음 번역서 출판이 성황을 이루어 그 권수가 몇만에 이르니 한우충동이 무색할 지경이다. ....(중략).... 역서가 많아질수록 세상 사람들도 역서를 읽는 앞뒤 순서가 헷갈리거나  책 이름만 알 뿐 내용을 모른다. 무슨 일을 알려면 어떤 책을 읽어야 될지, 또 어떤 책이 같은 종류의 책 중에서 제일 유익한지 알 수 없는 지경에 이른다...."라고 하여 번역의 홍수시기를 맞이하여 순전히 책 읽는데 도움을 주기위한 길라잡이 책으로 집필하였음을 말하고 있다. 물론 저자들은 수만권은 과장된 수치이고 수천에 이를 것이라고 하였으나 수천이든 수만이든 대단한 번역량이며 서양을 배우려는 대단한 지적욕구의 표출이다.  

    처음에는 지식인이나 무사계급이 번역의 주 독자층이었으나 곧 급속도로 일반인에게도 확대되는 등  문명개화, 근대화, 서양화는 유행을 넘어 일종의 시대정신이었다. 메이지 정부가 직접 번역에 나서기도 하는 등 당시 번역은 부국강병책을 위한 범국가적 프로젝트였다고 할 수 있다. 

    1883년이면 우리나라에서 개화파의 갑신정변이 일어나기 바로 전해이다. 한편에서는 나라의 빗장을 열어 서구의 문물을 받아들이자는 신진세력의 쿠데타가 3일 천하로 끝나는데 비해 현해탄 저쪽에서는 발달된 서구를 배우려는 독서와 학습열풍이 불었다니 달라도 이렇게 다를 수가 있는지 모르겠다. 

    3. 그럼, 주로 어떤 책들을 번역하였나?

    번역서가 수천에 달하다보니 거의 모든 영역을 망라한다고 볼 수 있는데 특히 많이 번역된 분야가 지리와 역사, 군사, 병법, 자연과학, 법률 관계 서적이었다. 개국을 맞아 서양나라가 어디에 있는지 알기 위해 지리에 관해 알고자 하는 것은 당연하다. 그리고 역사를 중시하는 동양 삼국의 전통적인 문명적 습관과도 연관이 있겠지만, 근대화에 성공한 서양의 나라들을 이해하려면 역사적 맥락에서 이해하는 것이 필요하다는 인식을 바탕으로 다양한 만국사와 각국사가 번역되었다. 그런데 역사에 대한 그들의 관심은 당시 서양 강국뿐만 아니라 고대 그리스, 로마의 역사로까지 거슬러 올라가는데 이는 유럽 문명을 기본부터 탐구하려는 자세가 없으면 불가능하다. 참 대단한 일본인이라는 생각이 든다. 또한 제도개혁을 하자면 상대방의 제도를 참고하지 않으면 안되고 서양의 군사력에 압도되어 문호를 열었던 관계로 군사관계나 병법 분야 서적에 대한 관심은 충분히 이해가 간다. 한편 그들은 자연과학 중 특히 화학에 깊은 관심을 보였는데 그것은 화학이 당시 대표적인 경공업인 섬유산업에서의 염료 그리고 군사에 중요한 화약, 그리고 농업 생산량 증대에 필수적인 비료와 연관이 되어 있기 때문이었다. 또한 서양과의 교류와 제도 개혁 등의 필요성 때문에 법률 관계 서적들에 관심이 많았다. 

    4. 어떻게 번역을 하였나?

    언어란 사상을 담는 그릇이라고 하지 않는가. 일본과는 판이하게 다르거나 일본에 없는 서양의 정치, 경제, 사회 제도와 사상을 표현하는 서양의 언어에 대응하는 일본의 언어가 없었으므로 그것을 일본어로 옮기기란 거의 책을 새로 쓰는 수준의 어려움을 동반하였을 것으로 추측된다.  

    이런 난관을 일본인들은 먼저 한역본 즉 기존에 중국어 번역본이 있으면 한역본을 참고하였다. 이 경우에는 예를 들면 영어->중국어->일본어의 이중역이니까 원뜻과는 다른 오역이 발생하기도 하였다. 물론 청일전쟁을 계기로 중, 일 사이에 어휘 차용의 역전현상이 일어나서 그 이후에는 오히려 중국에서 일본어 번역본을 참고하는 일이 벌어지게 된다.

    또 다른 방법은 새로 단어를 만드는 것인데, 조어에는 세종류가 있다. 하나는 기존 한자의 의미를 바꾸지 않고 조합해서 쓴 경우, 두번째는 '자유'처럼 이전부터 있던 한자어의 의미를 바꿔서 사용한 경우, 세번째는 '부동산'처럼 완전히 새롭게 만들어 낸 경우가 있다. 일반적으로 이런 신조어는 거의 모두 한자였다. 우리도 그렇지만 당시 일본 사회에서도 한자 대신 가나를 쓰면 위엄이 없어 보여서 그랬단다. 

    5. 번역이 일본 사회, 문화에 어떤 영향을 미쳤나?

    중국 옛 말에 강남의 귤이 강북에 가면 탱자가 된다고 했던가. 서양의 학문과 사상이 일본어로 번역되면서 탱자(?)로 왜곡되거나 변형되기도 하였다. 예컨대 적자생존과 자연도태의 다윈의 진화론은 일본에서 제국주의적인 사회진화론으로 해석된다.

    19세기 후반 서구의 다양한 정치, 사회사상이 일본사회에 번역을 매개로 일본사회에 들어와 이데올로기 쟁탈전을 벌인다. 보수주의, 진보주의, 자유민주주의, 사회주의, 공산주의 등. 이 각축전이 가장 뜨겁게 벌어진 분야가 1880년대의 헌법논의였고 그 행로는 프랑스학->영국학->독일학이라는 준거틀의 변모로 나타났다. 그래서 자유민권운동으로 대표되는 프랑스학, 영국학 대신에 메이지 정부의 정책을 뒷받침한 독일학이 헤게모니를 장악함으로써 이데올로기 쟁탈전은 일단락되고, 근대 일본은 제국주의화로 나아간다. 

    6. 우리의 번역은?

    예전 중학교인가 고등학교인가 국어책에 향가 해석의 대가이신 고 양주동 박사가 소학교에서 처음 영어문법을 공부할 때의 당혹감에 관한 내용이 실렸었다. 문법책에 3인층 단수라는 용어가 나오는데 이것이 무슨 말인지 도저히 모르겠더라는 이야기였다. 인칭이나 단수, 복수에 관한 단어는 물론이고 그런 개념 자체가 없었기 때문이다. 물론 일본인들이 만든 신조어일텐데 그 전에는 일본에도 그런 개념이 없었다. 

    일본은 처음, 영어-중국어-일어의 이중역(나중에는 중간에 중국어가 빠지고 영어에서 곧바로 일어로)
    했다고 했는데 우리는 일어-한국어 과정이 마지막에 추가되니 결국 삼중역(혹은 이중역)에 해당되는 셈이다. 이러니 서양의 문명과 제도, 사상이 곧바로 직수입된 것이 아니라 일본을 통해 변용되거나 왜곡 혹은 일본식화된 것이 받아들여지게 된다.

    이 점에서 우리의 근대화 과정에서 우리의 번역은 어떻게 전개되었고 우리의 의식, 제도에 어떤 영향을 미쳤는지 하는 것은 충분히 연구할 가치가 있다고 본다. 관련 학자들의 연구를 기대해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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