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느리게 가기 - 진정한 자유로 나아가는 가장 현명한 선택
미리암 메켈 지음, 김혜경 옮김 / 로그인 / 2009년 7월
평점 :
절판
처음 이 책의 제목을 보고는 '느리게 살기' 류의 성찰과 관조의 메시지를 담은 책인줄 알았다. 사실 메시지는 그렇다. 그러나 이 책이 비슷한 메시지를 담고 있는 유사한 책들과 다른 점은 우리가 공기처럼 그 안에 살고 있으면서도 의식을 할 수 없을 정도로 우리 생활의 일부분이 된 디지털 라이프를 겨냥하고 있다는 점이다.
디지털 보헤미안.
조금은 낭만적인 뉘앙스를 담고 있는 이말에서 무엇이 연상되는가.
아마 대부분 최신 디지털 기기로 무장하여 시공간의 한계를 뛰어넘으며 능숙하게 일을 처리하는 멋진 현대인의 모습을 떠올릴 것이다.
우리는 언제, 어디서는 접속하여 있다. 접속하는 혹은 접속되어 있는 인간, 이른바 호모 커넥투스(Homo connectus)가 우리의 새로운 정체성이다.
나는 이메일을 한다.(혹은 나는 문자를 보낸다) 고로 나는 존재한다 는 세상에 살고 있는 것이다.
저자인 스위스 생 갈렌 대학 미디어 커뮤니케이션스 매니저먼트 학과의 미리암 메켈 교수는 이런 멋있어 보이는 디지털 보헤미안적 삶에 대해 비판적인 질문을 던진다.
언제 어디서나 접속되어 있는 우리는 과연 진정으로 상대방과 소통하고 있느냐고, 혹은 우리의 삶의 질이 나아지고 있고 행복해지고 있느냐고.
다양한 IT 기기와 서비스를 활용하여 여러가지 동시에 처리하는 멀티태스커는 일반적으로 유능함을 연상신킨다. 그러나 저자는 창의성은 성찰적 사고에서 나오며 이것은 성찰적 휴식에서 나오는데 디지털 보헤미안은 늘 접속해 있음으로 해서 자의든 타의든 본연의 업무가 끊임없이 중단됨으로써 일에 전념하거나 몰입할 수가 없다고 하였다.
현대인들은 기술적으로는 소통, 사회적으로는 고립 이라는 역설적인 상황에 놓여 있다.
그러면서 침묵의 중요성에 대해 강조하면서 두가지 사례를 제시하였다.
하나는 하인리히 뵐의 소설 <무르케 박사의 침묵 모음>에 나오는 괴짜 라디오 편집부장 무르케 박사는 중요 인사의 대담 내용 중 발언이 아니라 침묵의 순간만을 편집한다. 끊임없이 말하고 듣는 그에게 침묵이야말로 아주 특별한 휴식이라는 것이다.
두번째 사례는 문자메시지와 디지털 소음에 지친 사람들이 즐겨 찾는 'alleinr.de'사이트이다. 이 사이트는 위에 보시다시피 사진도, 그래픽도, 팝업도, 링크도 없다. 오로지 "긴장을 푸세요. 여기서는 아무것도 할 필요가 없습니다. 누군가에게 연락하지 않아도 됩니다. 자료를 올리지도 않습니다. 댓글도 달지 않습니다. 만나지도 않습니다. 당신이 무엇을 하든지 아무도 보지 않습니다. 당신은 혼자입니다" 라는 말만 씌어 있을 뿐, 스크롤을 밑으로 내리라는 마지막 명령에 응하면 검정 모니터만 남게 된다.
이처럼 저자는 통신의 바다에서 허우적거리며 사는 무절제한 통신과다의 삶에서 침묵의 시간, 성찰의 시간이 필요함을 역설산다.
그래서 다음과 같은 질문을 스스로에게 던져볼 것을 조언한다.
1. 지나치게 온라인 접속이 많지는 않은지 곰곰이 되새겨보자. 그 시간이 길어질수록 나는 사회에 접속하기 어려워질 것이다.
2. 나는 언제든 연락이 닿은 사람인지 되돌아보자. 만약 그렇다면 나는 실제로 어느 누구와도 진정으로 함께하고 있는 것이 아니다.
그래서 이메일이나 메시지의 수 등 통신의 양이 아니라, 통신의 질이 중요하며 통신의 질을 높이기 위해서는 시간이 필요하다고 한다. 그러기 위해서는 온라인으로 연락이 닿지 않는 것, 바로 그 순간 진정 누군가 혹은 무언가를 위해 존재할 수 있다, 우리는 때때로 개인적이고 실존적인 난수신지역이 필요하다, 그것은 삶의 질을 향상시켜줄 뿐만 아니라 생존을 위해서도 중요하다고 주장한다.
그리고 저자는 정보통신기술이 인간에게 미치는 다양한 사회문화적 현상과 디지털 라이프들에 관해 기술한다.
즉 인터넷 중독, 스팸메일, 정보과잉과 선택의 어려움, 일과 생활의 불균형, 공적 영역과 사적 영역의 경계의 불분명, 휴대폰 예절 등 우리들이 일상적으로 경험하는 것들에 대해 전혀 어렵지 않고 쉬운 내용으로 그 그 문제점들이 우리들 삶에 미치는 영향에 대해 진지하게 이야기한다.
예를 들면, 휴대폰으로 전화를 걸거나 받는 시늉을 함으로써 당혹스럽거나 따분한 상황을 벗어나기, 그리고 공공장소에서 핸드폰으로 크게 떠들며 자기의 중요성을 떠벌이는 허세 부리기 등에 관해 그 심리를 재미있게 묘사한다.
따라서 이런 부정적인 정보통신이용문화에서 벗어나기 위해 그가 제시하는 느리게 살기, 자기 절제, 무위의 행동, 단순한 삶이란 해법(?)이 결코 도덕적인 훈계마냥 무겁게 다가오지 않는다.
물론 이런 류의 처방이 대부분 그렇듯이 말은 쉬워도 실천하기는 무척 어렵다.
그래도 몇해전 모 이동통신회사의 광고 카피로 유명해진 말, "때로는 꺼두셔도 좋습니다."를 실천해야 할 때가 아닌가 싶다.
디지털 시스템을 파괴하는 러다이트 혹은 디지털에서 도피하는 로빈슨 크루소적 삶을 살지 않으려면 말이다. 사실 디지털이 이제 하나의 생태계를 이룬 상태에서 이런 환경을 파괴하거나 절연하는 방식은 불가능하다. 이제 유무선 디지털망이 연결되지 않는 무인도란 찾기가 쉽지 없다. 적어도 2009년 대한민국에서는 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