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린의 시선
서미애 지음 / 한즈미디어(한스미디어) / 2015년 5월
평점 :
절판


왠지 아릿아릿한 느낌에 책을 들고 첫 장을 폈다가 밤을 꼴딱 새고 말았다.

가독성이 장난 아니다.

논리적이고 현실적인 추리소설을 선호하는 사람이면 별로 좋아하지 않을 수도 있겠단 생각도 든다. 사건은 아린이란 여자의 꿈을 통해 드러나고 밝혀지니까. 하지만 이 세계가 눈에 보이는 게 전부라면 그 모든 미스터리와 신비한 현상은 어떻게 설명할 수 있나? 과학적인 치밀함과 정교한 수사는 감탄을 자아내게 하지만, 무의식을 통한 새로운 시선은 인간이 발휘하지 못하고 사는 초자연적인 능력을 다시 한 번 돌아보게 한다. 얼마전 영화 〈극비수사〉를 보았다. 33년 전 부산에서 실제로 일어났던 유괴사건을 다룬 영화인데 사주풀이를 통해 아이를 구하는 얘기다. 이 책의 주인공 아린은 어릴 적 일가족이 살해당하고 스스로도 온몸에 스물일곱 번의 칼상을 입고 죽다 살아난다. 그리고 〈극비수사〉에서처럼 전혀 과학적이지 않은 방향으로 사건이 해결된다.

끔찍한 일을 겪고도 살아남을 수 있는 건 시간이 지나면서 기억이 희미해지기 때문이다. 경험상, 기억은 자의적으로 봉인이 가능하다. 좋지 않았던 일들은 더는 생각지 않고 현실에 몰두하여 살다보면 괴로웠던 기억마저 떠오르지 않는다. 다만, 어떤 계기에 의해 기억의 끄트머리를 잡고 꺼내다보면 전혀 예상치도 않게 시시콜콜한 부분까지 파노라마처럼 되살아나고 그때의 상처가 현실인 양 비명을 지른다.

그러니 아린이 기억을 스스로 봉인한 건 살기 위한 당연한 선택이었을 것이다. 그녀가 그 기억을 마주 대하는 건 살아도 사는 것 같지 않은 삶을 끝내기 위해서고, 다른 이의 아픔을 치유하면서 세상에 태어난 이유와 목적을 발견하기 위해서이다.

돈, 광기, 배신, 복수, 용서, 사랑이라는 진부한 주제가 세밀하고 섬세한 심리 묘사를 덧입어 애잔하고도 아픈, 그러나 희망을 주는 감동으로 다가온다. 공포, 두려움, 불신으로 어두웠던 아린의 시선에 연민과 온기를 주기 위해 작가는 세상의 모든 아픔을 아린에게 덮어씌운다. 그렇게 지독하게 벼려져야만 순전하고 투명한 시선으로 정화된다는 듯이.

한참 빠져 읽었더니 눈알은 빠질 듯 시큰했지만 마음은 서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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