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디든 멀리 가고 싶은 너에게 - 시인 엄마와 예술가를 꿈꾸는 딸의 유럽 여행
이미상 글.사진, 솨니 그림 / 달콤한책 / 2014년 5월
평점 :
절판


익숙과 생경, 그 사이...

 

익숙함이 좋다고는 하지만 어느 순간 그 익숙함은 어드벤처 영화 속 사방의 창살문들처럼 시시각각 다가와 초조하고 불안해질 때가 있다.

어디로도 탈출구가 보이지 않을 때, 모두 다 팽개쳐버리고 싶을 때.

이곳이 아닌 다른 곳. 아무도 나를 모르는 곳으로 훌쩍 날아가 강렬한 태양과 세차게 부는 바람과 하염없이 몰아치는 파도 속에 온 몸을 담그고 새로운 나로 태어나고싶을 때가 있다.

여행은 그래서 떠나는 것이 아닐까?

다른 장소가 그리워서가 아닌 이곳에서와는 다른 나를 만나기 위해서.

모르는 사람들과 풍경 속에서 낯선 나를 대면하기 위해서.

그래서 여행은 가까운 곳보다는 먼 곳, 가능하면 아주 먼 곳으로 가고 싶은 게 아닐까?

익숙하지 않아서 불안하고, 모르기 때문에 두렵지만

익숙함보다는 생경함이 안도감을 줄 때가 있는 법이다.

새롭게 살 수 있다는 희망과 가능성을 보여주니까.

 

멀리서 보낸 편지

 

이 책의 제목인 <어디든 멀리 가고 싶은 너에게>를 읽어본다.

왠지 외롭고 힘든 누군가에게 여행을 떠난 저자가 부치는 편지 같다.

자신의 길을 가만히 따라오라는 속삭임 같은 위로가 제목에서 울컥 느껴진다.

'그래, 얼마나 힘들었니? 많이 지쳤지? 괜찮아. 다 괜찮을 거야.' 라는 말이 들리는 듯하다.

저자가 여행지마다 멈추어 고단한 하루를 마치고 써내려가는 편지.

열일곱 살이라는 솨니의 아득한 그림이 곁들어진 그림 편지.

저자의 글을 읽으면 그곳의 풍경이 내가 본듯 생생하고 마음이 울렁거린다.

당장이라도 그녀의 발자취를 따라 떠나고만 싶다.

 

유목민의 후예

 

우리에겐 누구나 유목민의 피가 흐르고 있다. 수렵과 채집을 하며 한평생 떠돌던 고달픈 유목민들은 주린 배를 넉넉히 채우기 위해 농경생활을 시작했다.

쌀과 밀을 생산하고 가축을 길러 한곳에서 부락을 이루어살면서 권력투쟁도 생기고 계급분화도 생기고 축적도 생겼다.

어쩌면 농경생활은 움직이기 귀찮은 인간 본성, 더 많이 축적해야 안심하는 욕심에서 근거한 자연발생적인 역사적 흐름일 수도 있다.

하지만 우리의 피 속에 남아 있는 유목민의 디엔에이는 가끔씩 참을 수 없는 또 다른 욕망, 모든 걸 뒤로 하고 떠돌고 싶은 마음을 부추긴다.

여행마저 자본의 논리로 움직이는 세상이지만 그럼에도 자신의 일상을 내려놓아야 떠날 수 있기에 용기가 필요할 것이다. 모든 일과 생각과 사람들을 뒤로 하고 무작정 떠날 수 있는 사람은 그래서 존경스럽다. 3개월이란 시간 동안 이곳의 삶을 포기하고 다른 도시에서 떠돈다는 건 그리 쉬운 일이 아니다.

 

바닷물이 빠진 곳에 우뚝 솟아난 몽생미셸과 은빛으로 부서지는 바다

 

표지를 들여다 보며 마음이 설렌다.

은박으로 미묘하게 장식한 여행지명의 타이포는 저 하늘로 훨훨 날아가고 푸르게 펼쳐진 하늘을 배경삼아 고고히 서 있는 몽생미셸은 그 앞에 선 여자의 작은 실루엣을 따스한 시선으로 굽어본다.

뒷표지에 있는 문구처럼 "하늘과 바다의 품에 우리가 있다."

왜 우리는 이런 세상을 갖지 못하나. 우리를 품어주는 대자연 속에서 크게 숨 쉴 수 있을 텐데.

그렇게 아름다울 수 있을 텐데... 그리움을 날려보내는 표지를 보면서 뜨거워지는 마음.

당장이라도 떠나고 싶은... 

 

모녀의 시선

 

단순한 여행기만은 아니다. 엄마와 딸의 관계에 대한 사색, 문학과 예술, 삶에 대한 사랑과 열정이 넘실거린다. 더 넓은 세상을 향해 예술가라는 고독한 가시밭길을 택한 딸에 대한 엄마의 애틋함이 절실하기도 하다.

힘든 순간은 누구에게나 있겠지만, 그렇게 지지해주는 엄마가 있고 가족이 있는 한 우리는 절망 속에서도 위안을 얻게 된다. 그래서 이들의 여행기는 아름답다.

알을 깨야만 날개를 펼칠 수 있는 작은 새처럼 훨훨 날아갈 아이들.

그들을 감싸안지만 때로 모른척하며 아이가 가는 길을 지켜보는 엄마의 흔들리는 눈빛.

모녀의 아름답고 시적인 문장과 그림을 음미하며 나는 어느새 그곳에 떠돌고 있다. 

 

"사랑은 상대를 사랑하는 것이 아니다.

상대에게 나를 투영하여 그 안의 나를 사랑하는 것이다.

그러므로 상대가 가진 눈꺼풀, 머리카락, 손, 눈 색깔은 모두 나 자신이며 내 그림자다.

하늘로 던진 돌은 다시 내 머리 위에 떨어진다.

자식을 사랑하는 것은 자식 안에 내가 있기 때문이다.

결국 나를 사랑하는 것이다."

(본문 중에서. 119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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