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
드라마를 쓰다
매거진 t 편집부 엮음 / 씨네21북스 / 2006년 8월
평점 :
절판
노희경, 인정옥, 황인뢰, 신정구.
전혀 다른 듯 닮아 있는, 지난 2-3년 사이 사람들의 눈과 귀에 가장 깊이 박힌 드라마를 빚어냈다는 공통점 외에 닮은 구석을 찾기 어려운 네 명의 작가들. 그들의 작품론과 인터뷰라? 많은 이들이 그러했겠지만, 나 역시 남다르게 주목하는 작가들이라 몹시 궁금했다, 그들의 속내가.
<궁> 이전의 작품들은 솔직히 너무 점잖게 다듬어진 냄새가 짙어 그다지 좋아하지는 않았던 황인뢰 감독.
<궁> 역시 그다지 호감을 주기 어려운 배우들로 인해 몰입이 안 되어 열심히 보지는 않았지만, 지독하게 탐미적인 미장센 때문에 눈을 뗄 수 없었던 드라마였다. 꼼꼼하게 구석구석까지 잘 다듬어내는 감독이라고는 생각했지만 이토록 절정을 파고든 탐미적 취향이라? 새로웠다.
사실 배우들의 연기보다는 화면 속 아름다움들을 발견하고 취하는 재미가 더 컸던 드라마였다. 그가 과거 자신의 무게를 덜어내고 ''안 하던 짓'' 많이 해가며 만든 <궁> 이야기는 소탈했다.
하지만, 제작 준비중이라는 <궁2>도 역시 썩 호감이 갈 것 같지는 않다. 민언옥 미술감독과 조명의 예술이 빚어내는 미장센이 짧은 시간 동안 얼마나 진화했을지가 궁금할 뿐이다.
가랑비에 옷 젖듯 서서히 파고들어 가슴을 후벼파는 아름다운 고통을 맛보게 한 작가 노희경.
사실 그에게 한번에 푹 젖지 않으려고 그의 드라마들을 늘 한발 떨어져 살살(?) 봐왔다. 시쳇말로 ''지대~로 끈적한 그의 사람 사는 이야기에 한번 몰입하기 시작하면 도저히 헤어나올 방법이 없을 것 같아서이다. 그렇게 거리를 두다 더이상 버티지 못하고 작정하고 푹 빠진 드라마가 <굿바이 솔로>.
내가 알던 노희경은 회춘이라도 한 듯 한결 젊고 싱그러워졌다. 고름딱지가 덕지한 상처를 건드리고 다독이는 솜씨는 여전하지만.
인터뷰 중에 그는 <굿바이 솔로>를 끝내고 ''왜 나는 이렇게 무거운가''하는 고민으로 많이 힘들었다고 한다(<굿바이 솔로>도 충분히 가볍고 귀여워졌음에도). 이제는 가볍고 싶다는 그, 그 동안 고민 많이 했다는 그의 절박한 고민의 결과가 다음 작품을 어떻게 달라지게 할지 기대된다.
드라마 작가가 되려는 이들에게 전하는 노희경 작가의 당부. 매일 5분씩 쓰라...목숨 걸고 쓰라. 치열함과 끈기와 절실한 노력만이 결실을 준다는, 오로지 진정으로 노력하는 수밖에 없다는 비결 아닌 비결이야말로 작가 노희경의 깊고 질척한 우물이 아니겠는지.
수년 전, <내 멋대로 해라>의 복수와 전경의 그늘에서 헤어나오지 못하던 때가 있었다.
그들을 빚어낸 그, 인정옥이란 작가가 몹시 궁금했고, 뒷조사(?)를 통해 알게 된 그의 어록이나 외양은 복수와 전경의 아우라를 벗어나 있는 듯한 배신감을 던져 주기도 했다.
노희경과 인정옥을 살리에르 모짜르트에 비유하는 시선들이 있다.
내 눈엔 오히려 노희경이 모짜르트에 가깝고, 인정옥은 겉보기에 그리 보일지 몰라도 절대 모짜르트과는 아니라는 쪽이다. 인정옥.
참 재미있는 작가다. 드라마를 통해 그려내는 인물들, 영혼을 슥슥 긁어모아 날것 그대로 보여 주는 듯한 대사들을 보면 응당 작가에게서 어느 정도의 치열함을 기대하기 마련인데, 인터뷰에 임하는 그의 자세는 지극히 가볍고 낯설다.
인정옥 작가는 스스로 ''되게 웃긴다''고 평한다. 노희경 작가처럼 치열하게 매일매일 절박한 글쓰기가 아니라 그에게 대본은 쓰고 싶을 때 즐거이 푹 빠져들었다 나오는 유희이기도 하다니! 양아치 같은 남자들을 많이 사귀어 봐서 현실은 드라마처럼 멋지기만 하지는 않다는 걸 솔직하게 말하는 그는 팽팽해 보이는 피부처럼 젊고 싱그럽기까지 하다.
하지만 조금은 ''전경''스럽고 ''복수''스러운 모습을 기대한 내게 여전히 그는 드라마로만 알고 싶은 작가이기도 하다.
마지막으로, 나는 드라마 역시 컬트 취향인가 하는 의문을 던져 준 <안녕, 프란체스카>의 괴짜 소통자 신정구 작가. 앞선 두 작가 이야기에 몰입해 뻣뻣해질 대로 뻣뻣해진 경추와 눈꺼풀의 긴장감을 풀고 가벼이 마무리할 작가로 절묘하게 배치된 구성이란!
지난 연말 시상식 화면 속의 그가 기억난다.상 받으며 어린아이처럼 좋아라 춤을 추던 그."엥?? 뭬야? 저 사람이 작가야?" 했던 그 황당하던 순간.
프란스카들에게서 보여진 초특급엽기발랄코믹휴머니티한 캐릭터들이 가짜가 아니구나, 저 사람, 자신도 정말 즐겼구나 싶어 작가 이력과 기사를 일부러 찾아 보기도 했었다.
비둘기를 비둘기라 부르지 못하게 했던 엉뚱함, 오랜 세월 나의 교주이기도 한 신해철 옹의 10cm 통굽을 적나라하게 까발려 내가 다 머쓱해지게 만들기도 했던 대담한 그는 좋은 파트너(감독)를 만나 더 빛이 나 보인다.
하긴, 인정받는 작가들치고 속속들이 이해하고 맞장구 쳐줄 단짝 감독이 없다는 게 이상한 일이지만.
인터뷰 중 인상적인 이야기. 프란체스카 외 현실감없는 그 캐릭터들이 실제 주변인물들에서 힌트를 얻어 만들어냈다는 점. 특히 프란체스카의 주옥 같은 무감정 대사와 고스톱에 얽힌 일화들 상당부분이 작가의 모친에게서 의지했다니, 상상력을 자극하는 모자가 아닌가.
밤새 한 권의 책을 다 읽고 나면 의례히 다음 날 아침이 무겁고 부담스럽기 마련이다.
그런데, 이 책은 분량이 적은 편도 아닌데 한 권 뚝딱 읽고 나도 가볍다. 하지만 여운이 그리 길고 짙지는 않다. 몇 번 곱씹어 읽었던 노희경 작가의 인터뷰를 제외하고는.
그래도 책장을 덮고 나서 다른 드라마 이론, 작가론을 다룬 책들을 찾아 읽고 싶게 만들고, 리스트에 넣게 만들 만큼, 조용히 잠자던 내 호기심과 욕구를 자극하기엔 충분했다.
드라마 속의 그들과 진하게 소통했던 독자들이라면 그들의 심부름꾼인 작가들을 통해 다시 한번 가벼이 소통하는 즐거움을 선사하는 책이다. 작가, 그들의 은밀한 발설을 통해서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