건담 싸부 - Chinese Restaurant From 1984
김자령 지음 / 시월이일 / 2022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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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건담 싸부'는 60여 년 동안 중화요리 주방을 고집스레 지켜온 요리사가 필연과 우연이 뒤섞인 사건으로 주방 밖 세상을 향하는 내용이다. 시간이 멈춘듯한 중국집 주방에서 자신만의 요리 철학을 공고히 유지한 채 주방 밖 세상엔 관심조차 주지 않는 고집스러운 70대 노인의 심경 변화, 즉 배움과 소통을 다룬다.

'건담 싸부'의 지은이는 단막극 <고씨 가족 경상기>로 드라마 작가협회 신인상의 최우수상을 받은 김자령씨다. 그리고 장편 영화 홀로 부산국제영화제 Film Workshop의 1등 상을 수상했고, 몇 편의 장·단편 영화 각본을 썼다. 2022년 첫 장편소설 《건담 싸부》를 출간했다.

'건담(健啖, 찌엔딴)'의 뜻은 '대식가처럼 많이 먹는다'이다. 한 끼가 소중했던 부모의 설움과 자식은 배곯지 않길 바라는 바람이 담긴 어릴 적 이름이었다. 이 이름은 후에 두위광이 명동에 차린 청요리 집의 이름이 되었다.

두위광은 돌쟁이 때 인천에 입국해서 11살 때부터 중국집 잡일을 시작했다. 이후 실력을 쌓은 그는 인천과 서울의 유명 중국집과 호텔에 근무하며, 명성을 얻기 시작했다. 단순한 재료와 조리, 즉 요리의 기본에 충실한 그는 지독한 연습벌레에 남들과 타협을 모르는 독종에 또라이근성으로 30세가 명동 유명 호텔의 주방장 자리를 꿰차게 되었다. 그리고 3년 후 명동에 청요리 집 '건담'을 차렸을 때 정·재계 유명 인사들이 드나들었고, 청와대에도 음식을 주문할 정도로 성황을 이뤘었다. 두위광만의 요리에 대한 집요한 철학과 고집은 그는 나이 70세가 넘어서도 활활 타오르며 전혀 사그라들지 않고 있었다.


영원히 타오를 것처럼 변치 않던 불꽃에 불순물이 어느 날부터 생겼다. 치솟는 화덕의 불길을 마음대로 조절하며 윅(wok)을 춤추게 하던 화덕의 마에스트로인 그가 실수를 하기 시작했다. 실수는 그의 덧없는 중얼거림으로부터 시작됐다. 뜨겁게 달궈진 웍의 손잡이를 잡는 자잘한 실수부터, 음식의 재료와 맛을 귀신처럼 맞추던 간신은 어디로 사라졌는지 요리에서 깊은 맛과 감칠맛이 사라졌다. 그리고 불길한 변화를 그의 중식당 식구뿐 아니라 단골들이 알아차렸다. 그는 어느 순간 나타난 불길한 손님에 넋을 놓다가 정체를 파악하기 위해 주방을 나선다.

자신에 일어난 일이 궁금했던 두위광을 세상은 그를 방해했다. 아니 어쩌면 애써 외면하던 일이 일어난 것일 수도. 단골과 중국요리 마니아 소수만 알던 청식당 '건담'에 별이 달렸다. 신선한 횟감을 원하던 세상의 미디어는 그에게 카메라를 들이밀고 눈이 부시게 해서 두위광은 의사와 약속을 어기게 된다. 요리 평론으로 나름 유명세를 떨치던 호사가들이 거드름을 피우며 맛 평을 했고, 조회 수에 목을 맨 사람들이 젓가락 대신 스마트폰을 들이댔다. 자신만의 요리 철학을 고객에게도 강요하던 그의 눈을 거스르는 그들의 행태에 두위광은 ....


두위광은 생각했다. 변화가 만병통치약은 아니겠지. 오히려 기존의 질서를 깨고 혼란을 불러올지도 모른다. 갖고 있었던 것마저 거둬갈 수도 있겠지. 그러나 나는 모른다. 변화해 본 적이 없으니 알 턱이 없다. 이렇다 할 정답을 말해주는 이도 없으니 변화해 봐야 알일. 그 길을 한번 가보기로 하자. 그러나 이제는 안다. 변화는 기회를 만든다. 그것만으로도 큰 수확이다.

건담 싸부

위 구절의 '변화해 본 적이 없으니 알 턱이 없다'를 읽고 순간 숨이 턱 막혔다. 그리고 머릿속이 멍해졌고 동시에 내 머릿속에 언젠가부턴가 자리 잡아 나를 주저하고 비굴하게 만들던 꼴 보기 싫은 핑계가 흐릿해졌다.

'그래 잃을 것도 많지 않으면서 꼼쟁이처럼 이것저것 재기만 하는 간잽이는 되지 말자. 대단한 일을 하는 것도 아니잖아. 너무 안전장치에 신경 쓰지 마. 만약 떨어지면 엉덩이에 묻은 먼지만 툭툭 털어내면 돼. 넌 까마득한 벼랑 위에 서있는 게 아니야.'

뭔가 개운한 느낌이다. 비굴하게 셈을 하며 나의 잇속을 챙기던, 하지만 결국 제자리를 맴돌던 나를 떨떠름하게 쳐다볼 수 있게 되었다. 개운하면서도 씁쓸하다.

'건담 싸부'는 자기만의 세계 주방에서 독재자처럼 굴며 시도 때도 없이 고함을 치며 악을 부리던 옹고집 노인이 어떤 사건을 계기로 미각과 의욕을 잃어버리고 방황한다. 하지만 자신을 붙들고 북돋아 주는 부하 또는 동료 또는 스승에게 배움과 소통이란 낯선 세상 밖 인심에 다시 마음을 다잡는다. 자신에게 손을 내밀어 주는 그들과 함께 변화해 보기로.

책 속에 여러 인물들이 등장하는데 모두가 범상치 않은 인물들이다. 명문대 수석, 유명 호텔 셰프.... 영화 각본을 작업한 경험이 있어서 인지 등장하는 인물들의 개성이 뚜렷하고 생기가 넘친다. 다만 읽다가 주인공급 인물을 이렇게 많이 넣을 필요가 있을까 하는 생각이 들었다. 잘못하면 내용이 어지러울 수 있는데... 하지만 이내 고개를 끄덕이게 됐다. 작가는 중화요리를 이렇게 표현했다. 솔직한 맛. 개성 넘치는 각종 향신료가 들어가는 중화요리는 굳이 향을 숨기지 않고 있는 그대로를 보여주는 솔직한 요리다. 그래서 작가도 중화요리같이 솔직한 글을 썼구나. 자신에 말하고 싶던 걸 숨기지 않고. 그리고 등장인물이 그다지 거슬리지도 않았다.

자신의 삶이 부질없다 또는 의미 없다 느끼시는 분들에게 추천합니다. 변하는 건 생각보다 어렵지 않다는 걸 발견하게 될 것입니다.

※출판사로부터 제공받아 제 주관대로 작성한 리뷰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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