창령사 오백나한의 미소 앞에서 - 김치호 한국미술 에세이
김치호 지음 / 한길아트 / 2020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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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자 김치호의 본업은 경제학자이다. 은퇴 후 그의 인생 2막은 미술 평론이 되었다. <창령사 오백나한의 미소 앞에서>는 그 세 번째 평론집이다.

<창령사 오백나한의 미소 앞에서>에서 가장 눈에 띠는 점은, '상품'으로서 미술품의 성격에 주목한다는 점이다. 보통 우리는 미술품은 상품이 될 수 없지, 신성시하면서 미술품을 '상품'으로 보는 것이 치를 떨기도 한다. 김치호는 미술품을 재산증식의 수단으로 보는 관점과, 미술품을 신성한 토템처럼 여기는 관점이 아닌 다른 관점에서 '상품으로서의 미술품'에 접근한다. 바로 '컬렉션'의 일부로서 수집되는 미술품 말이다.

우리가 생각하는 것보다 미술품은 자산으로서의 가치가 크지 않다. 정보 비대칭성과 낮은 자산 유동성 때문이다. 그럼에도 어떤 이들은 굉장한 돈을 들여 미술품을 모은다. 예술작품이 지닌 아름다움과 가치에 반한 수집가는 비싼 돈을 주고서라도 미술품을 사는 것이다. 이렇게 생각하면, 꼴랑 저런 작품이 저렇게 비싸게 팔린다니, 라는 시각보다는, 대체 어떤 작품이길래 저 돈을 주고라고 사려는 것일까? 하는 호기심이 더 적당할 것이다.

김치호의 마음 속 컬렉션에 들어온 미술작품 중 가장 하이라이트는 역시 책 제목에도 등장한 '창령사 오백나한'이다. 오백나한은 김치호가 말하듯이 아라한(arhat)을 말한다. 김치호는 32상이라는 위엄있고 엄격한 부처의 모습을 재현하는 것과 달리 자유로운 표현이 가능한 나한상의 묘미를 이야기한다. 그리고 그것을 질박한 세속의 기원과 바람이 담긴 고려미의 꽃이라고 표현한다.

한국의 불교는 정말 '대승불교'였던 것이다. 아라한들은 대승경전에서 '증상만(자만스러운 자들)'이라고 비판된다. 자기에만 관심이 있고, 실제로 구원을 얻지도 못했으면서 몇 가지의 명상 수행에서 이룬 성취를 지나치게 과장하여 자만심에 차있다는 것이다. 그런 아라한들이 이렇게 친근한 미소를 띠고 대중의 기도와 함께 했다니.. 김치호의 말대로 고려 민중 속에 불교는 마음의 빈 공간을 파들며 녹아있었던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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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른들의 거짓된 삶
엘레나 페란테 지음, 김지우 옮김 / 한길사 / 2020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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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설은 조반나의 완전한 유년기 세계가 무너지는 것으로 시작한다.

집을 떠나기 2년 전, 아버지는 어머니에게 내가 매우 못생겼다고 했다. 신혼 시절 장만한 리오네 알토 구역 산 지아코모 데이 카프리가 꼭대기에 있는 집에서 아버지는 속삭이듯 그렇게 말했다. / 그 순간 모든 것이 멈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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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 이후로 조반나는 모든 매혹될 만한 (한 것으로 보였던) 것들은 진저리날 만한 이유를 갖는다는 것을 알게 된다. 고상한 아버지의 비밀스런 불륜 사실을 알게 되고, 아버지와 달리 순간순간의 정념에 솔직한 고모의 삶이 완벽한 대안이 될 수도 혹은 새로운 정신적 "아버지"가 되어줄 수도 없다는 사실을 알게 되며, 뜨거운 사랑의 도구로만 환상했던 음경에서는 냄새가 난다는 사실을 알게 되며, 순결함에 반하여 자신이 사랑하는 사람 또한 섹스를 하며 그것도 자신이 아닌 다른 사람과 섹스를 하기 마련임을 알게 된다.

이 소설이 성장소설로 읽힌다는 데, 나는 잘 모르겠다. 나는 성장이라는 것은 의미의 완결이고 안심(安心)이라고 생각한다. 조반나는 어떤 완결된 의미도, 안심도 얻지 못했다. 그저 낭만이 섞이지 않은 그다지 흥분되지 않는 섹스도 할 만한 것일지 모른다는 관념을 일으키게 되었을 뿐이다. 그것은 운동하는 입자가 자유비행하면서 충도ㅗㄹ한 . 입자는 떠오르는 사실들에 대해서 인지하면서, 견디거나 괴로워하고..

나는 여전히 문장과 문장 사이에 빠져 헤매고 있다. 내게 완성된 이야기를 만들어주려는 문장들 사이에. 실은 무의미한 문장들일 뿐인데, 진정 나의 것은 아무것도 담지 못했는데.

나는 이야기를 제대로 시작하지도 완결 짓지도 못했다. 내 글은 혼란일 뿐, 이야기가 제대로 전개되고 있는지, 그저 구원 없이 일그러진 고통의 나열일 뿐인지 그 누구도 알지 못한다. 지금 글을 써 내려가고 있는 이마저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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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반나는 이러한 고통을 '고유한 나의 발견'이라는 맥락에서 긍정하고 있는 것 같다. 나는 오히려 그 점이 재미있다. 어떤 사람들은 그러한 고통을 겪는 삶을 '평화를 찾는 과정'이라든지 '사랑을 얻는 과정'이라든지 '지식의 대가가 되는 과정'이라는 이름을 붙여서 긍정한다. 솔직히 나는 '고유한 나의 발견'에는 특별한 관심이 없어서 이 소설이 별로 재미있지 않았다. 특히 '고유한 나'를 발견하려는 사람들이 지닌 특징 - 다른 사람에 대해 별 논변 없이 '진부하다'는 가치평가적 언어를 구사하기를 나는 매우 어색하게 느꼈다. 그렇지만 조반나와 닮은 이들이라면 꽤 임파워먼트를 느낄지도 모르겠다. 닮은 사람이 닮은 실패를 하면서도 살아가는 모습은 우리에게 힘이 되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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베토벤이 아니어도 괜찮아
최정동 지음 / 한길사 / 2020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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모든 비평이 그렇지만, 특히 음악비평은 호소력이 있으려면 정말 많은 내공이 필요한 분야가 아닌가 한다. 음악은 누구나 들을 수 있는 것이고, 누구나 자기만의 취향을 갖기 때문이다. 가사가 없는 음악을 비평하기란 더욱 어려울 것이다. 선율의 흐름에 듣는 사람 각각이 자기만의 상상을 실을 것이기 때문이다.

최정동의 <베토벤이 아니어도 괜찮아>는 그런 점에서 '내공있는' 책 같다. 우선 흥미로운 정보들이 많다. 독자가 음악사의 어떤 이야기를 들으면 흥미를 느낄지 고민한 사람 같다. 음악사에 대한 예리한 호기심은 재밌는 상상으로도 연결된다. 이러한 정보가 유려한 필치로 쓰인 감상들과 균형을 이루고 있다는 점도 좋다. 담담한 자기경험과 호소력높은 문체는, 감상들의 설득력을 높인다.

글렌 굴드가 '딱맞는' 피아노를 찾아헤메다 CD318을 만나고 나서 포텐셜을 터뜨렸다는 이야기, 카르미나 부라나가 민중의 삶을 노래한 중세 음유시가들을 모은 것이라는 이야기가 새롭다. 이야기가 더해져, 그 음악을 달리 듣게 된다.

야하기도 야했을 <정읍사> 가락이 장중한 <수제천>이 되었다는 데에서, 최정동은 "정읍의 그 아낙이 뒷동산에 올라 달을 보며 부른 노래가 오늘날 연주되는 수제천과 얼마나 닮았을까? 남편을 의심하며 번민에 휩싸여 부른 노래가 이토록 장중하고 우아했을까?"라고 되묻는다. 예리한 상상력이다.

중앙선데이 기자인 최정동이 윤정희와 백건우를 회사 앞 순대국밥집에서 본 것으로 시작되는 '윤정희와 백건우의 사랑이야기'는 마음을 건드리는 바가 있다. 쇼팽의 음악을 두 부부가 나누었을 모습을 생각하면 흐뭇해진다.

이 책에는 형식적으로 참 독특한 장점이 있는데, 매 꼭지마다 음악을 들을 수 있도록 유튜브 영상으로 연결되는 QR코드를 달아두었다는 점이다. 음악비평을 책으로 접할 때 생기기 쉬운 한계를 막기 위함이었으리라.

QR코드를 찍어 처음 듣게 된 'ELLA & LOUIS'의 재즈가 새롭다. 새로운 음악을 듣고 싶을 때, 책의 아무 곳이나 펼쳐 최정동의 글과 함께 음악을 감상해보아도 좋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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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거부한다
퍼 페터슨 지음, 손화수 옮김 / 한길사 / 2020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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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설을 이야기라고들 한다. 이야기를 듣고 말하는 전형은 이런 것이다. 우선은 사건에 대해서 이야기한다. "무슨 일이 있었어? / 이런 일이 있었어." 그러고 나면, 굳이 이야기하는 까닭은 사람이 느끼기 때문이니까, 느낌에 대해 이야기한다. "이러저러하게 느꼈구나. / 그렇지."

<나는 거부한다>에 대해서도 이렇게 설명할 수 있다. 토미와 시리와 두 쌍둥이가 있었다. 어머니는 어느 날 집을 나가 돌아오지 않았다. 어머니가 집을 나간지 2년 뒤, 폭력적인 아버지를 견디지 못한 14살 토미는 아버지의 정강이를 야구방망이로 조각낸다. 동생과 단짝 짐의 집으로 가출했다 돌아오자, 아버지는 사라져 있었다. 토미와 시리와 두 쌍둥이는 복지당국의 조처에 따라 각각의 보호가정으로 찢어졌다. 토미와 짐은 정말 가까이 지냈으나, 결국 멀어졌다. 짐은 고등학교를 다니다가 자살을 기도했고, 토미는 짐의 정신병원 병문안을 간 이후로 더이상 그와 연락하지 않게 되었다. 토미와 시리의 인연도 차차 멀어져갔다. 어렸던 두 쌍둥이는 토미와 시리의 자매라기 보다는 면식있는 사람 하나에 불과하게 되었다. 30년이 지나, 토미는 아버지 그리고 짐과 우연히 낚시터에서 조우했다 헤어진다. 다음 날부터 짐을 떠올리던 토미는, 짐과의 인연을 다시 붙잡으려고 낚시터에서 기다린다. 공황장애 증상으로 병가를 낸 뒤 1년이나 지난 짐은 해고 선고를 받는다. 죽음같은 잠을 자고 일어나서, 짐도 토미를 다시 만나러 가는 것 같기도 하다. 봉사대원이 된 시리는, 싱가포르 기독교센터에서, 원양을 떠돌다 사망한 어머니의 흔적을 발견한다. 시리는 토미에게 연락을 걸어볼까 싶기도 하다. 시리는 기독교센터 주임목사에게 자신이 유족이라고 말하기는 거부한다. 시리는 형언할 수 없는 기쁨을 안고 길을 떠난다.

사건과 느낌에 대해서 이야기할 때마다 듣는 이와 말하는 이의 균열이 있다. 먼저 사건에 대해서. 사건이 어떻게 일어났는지를 자꾸 물어볼 수가 있다. 우리는 듣는 이로서 호기심과 의심을 가지고서, 사건에 대해 거듭 묻는다. "또 어땠는데?, 진짜 그랬어?" 그리고 느낌에 대해서. "나라면 이렇게 느꼈을 거 같은데." 하고 거리를 둘 수 있다. 그리고 이러저러하게 느꼈으리라는 추정에 대해, "꼭 그렇지는 않았어." 하고 고백할 수 있다. 그 고백은 어쩌면 사람이 참 홀로 있다는 생각을 들게 할 수도 있다.

<나는 거부한다>는 이 균열에 주목한다. 그리고 그 균열이 메워지리라 낙관하지도 않는다. '인간의 고독한 운명'이라는 식으로 꾸며주지도 않는다. 인물들은 타자의 이야기를 물으려하지도 않고, 타자가 추측하는 나의 이야기에 대해서 해명을 덧붙이려고 하지도 않는다. 자기 자신에 대해서도 마찬가지이다. 자살기도에 실패한 짐에게 프레드릭은 '정신병원에 오게 된 이유'를 묻는다. 짐은 "목을 매려고 했"기 때문이라고 응답한다. 그렇지만 그것은 그저 제도적 절차의 문제일 뿐이다. 생각하는 유기체로서 짐의 생각과 느낌과 의지를 너무도 알려주지 않는 응답일 뿐이다. 당연히 프레드릭은 "왜 목을 매려 했는지 분명히 이유가 있을 거라며 집요하게 물었다." 짐은 그것이 "상당히 논리적"이라고 생각한다. 그러나 "있었던 일을 기억해내려 할 때마다 머릿속의 모든 것은 가루처럼 부서져버리곤 했다."

이야기를 왜 굳이 듣고 말하는가. 이야기를 계속 듣고 말하는 사이는 특별하다. 이른바 '정(情)'이 없다면 그런 짓은 하지 않을 수도 있다. 적어도 '내가 인정받고 해명받았으면' 하는 마음조차 없을 만큼 무정하지는 않기 때문에, 우리는 이야기를 굳이 듣고 말하는 것이 아닐까. 묵묵한 시간도 따뜻한 사이가 있다고 하는 수도 있다. 그러나 그때 그이는 숨쉬며 있는 육체만으로 존재하는 것은 아니다. 나의 정이라는 확증편향을 지탱하는 무수한 의미의 퇴적물로 존재하고 있기 때문에, 침묵도 시끄러운 것일 수 있다. 진자들이 무수히 부딪히며 소리가 한없이 울리듯이 말이다.

<나는 거부한다>에는 제대로 쌓이는 이야기가 하나도 없고, 따라서 정 있는 사이도 하나도 없다. 나 자신이 이렇게저렇게 판단하고 행위해왔다는 또렷한 역사도 정립되지 않는다. 다른 이와의 사이도 마찬가지이다. 불끈하는 아랫도리와 키스와 섹스는 존재하지만, 사랑이니 책임이니 하는 것들은 등장하지 않는다. 토미는 자신을 지극히 아낀 양아버지의 유산을 그가 똑똑히 지켜보는 가운데 팔아버렸으며, 짐은 평생의 동반자인 홀어머니를 의심하는 이혼남이며, 시리는 '그리스도의 사랑'을 닮은 봉사활동을 전 세계 현장에서 펼치지만 기독교와 자신의 활동 사이에 연관성을 거부하며, 가족도 애인도 없다.

토미가 수십년만에 만난 아버지에게 아뿔사 연민의 한마디를 던지고서 크게 후회하는 모습은 볼만하다. 아버지는 토미의 고급 코트가 손상되지 않도록 추레한 소파 위에 주간지를 깔도록 권유한다. 토미의 고급 코트 때문에 아버지는 토미가 부자가 되었다는 이야기 세팅을 듣지도 않고 마쳤다. 아버지는 다리를 저는 까닭이 '30년 전 뺑소니 사고' 때문이며 그 이후로 자신의 몰락이 시작되었다는 교묘한 거짓말-호소처럼 보이는 말을 한다. 토미는 아버지에 대한 연민을 확장하여 용서하게 될까? 알 수 없는 일이다.

의미는 사이에 있으며, 사이에 귀기울이면 무한한 소리를 들을 수 있다고 하이데거가 말한 적이 있었다. 하이데거는 초탈하면 그렇게 할 수 있다고 했다. 심오한 뜻은 몰라도, <나는 거부한다>에 따르면 의미에 귀기울이기 위해서는 초인적인 버팀이 요구된다. 그것이 초탈이라면 모르겠지만. 인생을 일관되고 소통가능한 것으로 유지하게 해주는 언어적인 이야기들을 붙잡고 사는 일은 너무나 힘들다. 책 뒷표지에는 [나는 타협을 거부한다 / 나는 용서를 거부한다 / 나는 망각을 거부한다]는 경구가 쓰여있다. 마치 <나는 거부한다>에서 우리가 얻어야 할 메시지가 '거부의 찬미'인 듯이. 그러나 나는 이 책에서는 거부야말로 자연인 것처럼 보인다. 타협하고, 용서하고, (적극적으로) 망각하여 정말 잊을 만하게 되는 초탈이야말로 어려운 인위인 것처럼 보인다.

이렇게 살아도 불행하고 저렇게 살아도 불행하다고 말하는 수도 있다. 물론 나는 거부하지 않는 것이 잘 사는 것이라는 이야기를 가지고서 이 책에 대해 내 생각을 썼다. 누군가는 기억이 파편으로 깨지고 뜨거운 밤을 보내지만 이윽고 헤어지고 서로 패고 벽을 쌓고 지내는 것이야말로 삶의 본질이라고 말할 수도 있겠다. 그러나 차디찬 상대에게 "부디 집중해달라"고 말하듯이, 과연 그것이 삶의 본질인가? 짐과 토미가 만날 때에 이유가 없었듯이 다시 만나는 것도 좋겠다는 희망이 본질이어도 괜찮지 않을까?

<나는 거부한다>는 끊임없이 섣부르고 진부한 희망에 도전하고 거부한다. (비유적으로 사회주의, 사회복지가 책의 곳곳에서 조롱받는 것으로 생각된다.) 이야기가 부재중이라는 사실을 말하는 이야기에 우리는 어떻게 대답하면 좋을까? <나는 거부한다>를 읽으며, 솔직히 뭔가 감추는 이야기 같아, 과연 그런 일들만 일어났어?, 꼭 그렇게만 봐야해?, 나라면 그렇게 느끼지는 않았을 거 같은데, 하는 불편함을 느끼는 경험을 받았다. 이야기는 '그렇게 흘러가고 일어나고 있다'라는 느낌을 주기 때문에 사실인 것처럼 스스로를 가장하는 때가 많다. (사실 그래서 나는 소설을 잘 읽지 않기도 한다. 읽고 있으면 작가의 이데올로기 때문에 짜증이 나기 때문에.) 오히려 페테르손은 이야기를 끊임없이 해체하고 거부함으로써, 이야기 나누는 사이를 만들고 싶었던 것인지도 모르겠다. [2020-07-0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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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자책] 왜 세계는 존재하지 않는가 가브리엘 철학 시리즈 1
마르쿠스 가브리엘 지음, 김희상 옮김 / 열린책들 / 2017년 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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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책이 1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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