현대철학의 종교적 회귀 - - 벤야민, 데리다, 레비나스, 아감벤, 지젝, 들뢰즈, 가타리
신명아 지음 / 경희대학교출판문화원(경희대학교출판부) / 2021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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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장 데리다의 해체론에서의 메시아주의 없는 메시아성

그리스도 탄생이후 거의 2천년간 모든 나라에서 일인당 국민 소득은 거의 변화가 없었다가 19세기 산업혁명때부터 하키스틱같이 급격히 상승했다. 하키스틱을 눕히고 보면 끝에 공을 치는 부분에서 급격히 올라간다. (골프채도 비슷하게 생겼다고 할 수 있다.) 우리나라는 1960년대부터 이 추이에 동참하여 반세기정도에 100배정도로 소득수준이 높아졌다. 그러한 급격한 변화는 개인과 사회에게도 큰 영향을 주었다. 100년전 대부분 ‘쌍놈’으로 불리웠던 ‘개인’의 절대적인 자존감은 ‘하키스틱’만큼 높아졌다. 여전히 상대적인 자존감의 문제는 남아있는 것은 사실이지만. 사회가 엄청나게 높아진 자존감의 총량을 어찌 감당할 수 있을까? 우선 사회는 포스트모던 시대가 되어 분출된 자존감의 숨통을 틔어주고 있는 것 같다. 그런데, 그러한 급격한 변화를 현대철학이 수용할 수 있을까? 아니면, 오히려 그 변화의 방향을 선도할 수 있는가? 그런데, 하키스틱을 선물을 준 과학기술과 대척점에 서있다고 얘기되온 종교성으로 회기라니?

나는 현대철학은 근접할 수 없는 먼 나라 얘기로 생각해왔다. 신명아 교수의 책도 역시 글은 한글이었지만 완전 외계인의 언어였다. 내가 당면하고 있는 문제는 구체적으로 퇴직 후 교육선교에 참여할 것인가인데, 여기에 대입하여 책을 읽어 내려갔더니 의외로 통하는 면이 있었다. 아니, ‘그래 보였다’가 맞을 것이다. 철학이란 어느 쪽을 만져도 무엇인 것 같은 코끼리 아니겠는가? 나는 꼬리를 잡고 ‘이게 로프같아요’하고 있는 것일지도 모른다. Stairway to heaven이 아니라, rope to the heaven.

해체의 대상은 변한다. 그것은 인간의 원죄로 읽힌다. 끝없이 ‘쓴 뿌리를 내는 대지’이다. 우리가 이루었다고 생각하는 무엇은 그 순간부터 우리를 옥죄는 자가면역 질환이 된다. “자가면역 질환은 세균, 바이러스, 이물질 등 외부 침입자로부터 내 몸을 지켜주어야 할 면역세포가 자신의 몸을 공격하는 병입니다. 자가면역은 인체의 모든 장기와 조직에 나타날 수 있습니다.” 최근 몇 년간 한국의 정치에서 일어난 일련의 일들은 이 ‘자가면역 질환’이라는 단어로 명쾌히 설명된다.

자기면역 질환을 진단하는 방법은 미디어에 있다고 한다. 예를 들면, 소련이 붕괴하는데 반정부운동자간 팩스 통신이 힘을 발휘했고, 튀지니에서부터 불었던 민주화 운동인 재스민 혁명이 페이스북 같은 SNS로 가능했던 것과 같은 맥락이다. 기독교는 이 면에서 비밀주의를 고수하는 유대교나 코란의 번역을 거부하는 이슬람에 비해 우월하다. 루터의 종교개혁은 성경을 독일어로 변역해서 모든 이들에게 배포함으로써 가능하였다. 그런데, 최근 deep fake와 같이 미디어를 교란하는 사탄이 문제가 될 것이다. 그것보다도 미디어 뒤편에 숨어있는 대기업 또는 패권주의 국가들 같은 빅 브라더가 더 큰 문제일 수 있다.

자가면역 질환은 해체되어야 한다. 그런데, 문제는 이것이 나를 위협하는 자가면역인지 나를 보호하는 정상적인 면역 시스템인지 구분이 어렵다는 것이다. 이것은 키에르케고르의 책 제목 ‘이것이냐, 저것이냐’를 떠올리게 한다. 데리다는 아브라함-이삭의 사건을 들어 이를 설명한다. 믿음의 조상 아브라함도 모리아산을 오르며 끝까지 고민하지 않았을까? 이게 진정한 하나님의 뜻인가, 사탄의 역사인가, 아니면 욥이 당했던 하나님과 사탄의 합작 농락일까? 그리스도인은, 혹은, 실존적 단독자는, 극도의 ‘불안’속에서 혼자서 결단해야 한다. ‘죽음에 이르는 병’은 이 결단을 회피하는 것이라고 한다. 대세에 따라 ‘이방인’이 되었고, 그저 햇빛 때문에 살인을 저질렀다고 변명한다. 그런데, 이 불안에도 불구하고, 끝내 자신의 자유의지가 무엇인지 확인하는 좁은 길을 택하는 이들에게 주어지는 보상이 필요하다. 그 보상을 줄 수 있는 근거로 데리다는 메시아성(性)을 말하고 있는 것 같다. 메시아는 여기에 도달한 이들에게 같은 동역자로 인정해준다. “너는 하나님의 형상으로 태어났다.”

하키스틱만큼 높아진 개인의 자존감으로 개인개인들은 수많은 결정을 해야 한다는 운명에 놓여졌다. 그런데, 이때 대부분은 진정한 기독교인이 아닌 ‘이방인(gentile)’이 된다. ‘자유에로부터 도피’에서 파시스트의 도래가 좋은 예이다. 결정은 감당하기 어렵다. 그래서, 현대인들은 트랜드라는 말에 귀기울이고, 실증적인 데이터에 의존하기도 한다. 그 결과는 넓은 길을 택하는 것이 된다. 예를 들면, 메시아주의이다. 메시아주의는 타성에 젖은 신앙이다. 인류가 이룬 성취에 대한 교만에 빠지고, 욕망을 우상화하고, ‘내가 먹을 것, 마실 것’ 걱정을 달고 살면서 ‘이웃사랑’은 잊어버린 신앙이다. 모두 해체할 대상이다.

그런데, 데리다는 여기서 한 걸음 더 나아가, 좁은 길을 택한 이들이 끝에 도달하여 성취감을 느낄 때, 그들도 또한 교만에 빠져 해체할 대상이 될 수 있다고 한다. 기독교에서 수많은 죄중에서 가장 나쁜 죄를 교만이라고 하는 이유를 알 것 같다. 아, 우린 언제나 이방인이 될 수 있다. 언제든 지고 있는 십자가를 땅에 내팽게칠 수 있다. 하나님, 이 죄인을 불쌍히 여기소서. 고난을 기쁨으로 받아들이게 하소서. 해체불가능한, 아니, 해체불필요한 ‘메시아성’을 분별할 수 있는 눈을 주시옵소서.

성경에 나오는 모든 선지자가 사람들이 감당할 수 없는 말을 선포하듯, 데리다의 철학도 아프게 다가온다. 그 자신도 그것을 감당하지 못하고 자살로 생을 마감했을까? 자살로 생을 마감한 철학자의 철학에 따라 하나님에 대한 믿음의 방향을 정해도 좋은 것일까? 다시 이 책이 ‘외계인의 언어’로 멀어지려 하는구나. 시지이프의 바위는 다시 저 깊은 골짜기로 굴러 떨어지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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