건축의 시간, 영원한 현재 - 김봉렬의 건축 인문학
김봉렬 지음 / 플레져미디어 / 2021년 9월
평점 :
절판


김봉렬의건축의 시간, 영원한 현재를 읽고 2022. 3 서덕영

 

책의 말미에 저자는 니체의 말을 인용한다. ‘과거는 영원한 현재이다이것은 우리가 아무리 벗어나려고 노력해도 현재는 과거의 영향을 받는다는 얘기이다. 그런데, 언제적부터, 또 어느 정도로 영향을 받을 것인가? 건축가들은 우리가 생각하는 것보다 그 정도를 깊고 넓게 생각한다. 그들은 몇 백년은 뛰어넘어 팔로우어를 구하는 관종이다.

 

2022년 내가 어느덧 65세가 되었다. 그런데, 2017환갑이라는 도발적인 단어가 내 인생에 쳐들어 온 것이 그냥 엊그제 같다. 나이가 들면 시간이 빨리 간다고 한다. 기독교에서는 시간에 대한 정의가 두 가지이다. 크로노스chronos와 카이로스kairos이다. 크로노스는 그냥 해뜨고 해지면 24시간이라는 시간을 말한다. 반면 카이로스는 얼마나 중요한 사건이 있었는가하는 것에 의미를 두는 시간 개념을 말한다. 예수가 태어나기전에 수백년 동안은 성경에 기록된 것이 없다. 카이로스적으로는 아주 짧은 시간인 것이다. 반면 예수의 공생애 3년의 이야기는 성경의 가장 중요한 부분이며 카이로스적으로 긴 시간이다. 60세부터 65세까지 나의 시간은 크로노스적으로 재깍재깍 차곡차곡 채워가며 지나갔지만, 카이로스적으로는 휘리릭 지나가버렸다는 뜻일 것이다. ‘영원한 현재라는 말은 건축의 카이로스적인 시간을 말하며, 그것은 당신에게 과거의 건축들이 계속 사건을 일으키고 있으며 앞으로도 사건을 일으킬 수 있다는 것을 일깨우고 싶은 것이다. 몇 천년전부터, 가장 최근의 동대문디자인프라자까지... 개인적으로 안동 문화유적 답사에서 만난 저자는 자신이 B급 가이드라고 한다. 그러나, 대절한 관광버스에서 흔들리며 던지는 그의 짧은 멘트로 좌중의 혼을 쏙 빼는 실력은 두렵기도 하다.

 

프리메이슨freemason이라는 단체를 아는가? 그것은 국제적으로 공식적으로 존재하는 단체이다. 한국에도 있다. 그런데, 프리메이슨의 음모론이 있다. 역사상 실력자들은 모두 이 단체의 소속이며, 이들이 종교개혁, 프랑스 대혁명, 양차 대전 등등 세계적인 사건들의 배후에 그들이 있다고 한다. 코로나19도 그 연장선에 있는지 모른다. 여기서 내가 주목하는 것은 석공mason이라는 단어이다. 석공은 오늘날의 건축가이다. 서양의 건축에서 돌이 중요하기 때문이다. 나무로 집을 짓는 우리나라에서는 목수가 건축가이다. 진정한 건축가는 재료 구조 전문성, 뛰어난 창의성, 도시와 지형을 다루는 식견, 굳건한 의지, 강직함, 성실함, 책임감을 갖춰야 한다. 거의 신적 존재이다. 그저 운빨로 역사의 중심에 선 정치가들은 오히려 껍데기에 불과하며, 탄탄한 실력을 지닌 건축가들이 실제적으로 세상을 지배한다는 음모론은 어쩌면 당연하다.

 

우리는 그들이 남긴 유물론적 자취인 건축물에만 관심이 있지만, 그들은 그것은 단순히 유적일뿐이고, 여기에 텍스트와 상상력을 더해야 한다고 한다. 고려시대에 지어진 건물에서 나온 상량문에서 나온 ‘...1366년 지붕을 수리하다...’라는 텍스트는 현대의 메이슨과 과거의 메이슨이 소통하는 방식이다. 그 안에 어떤 암호가 담겼는지 우리는 모른다. 김봉렬은 경사지 잔디밭에 규칙적으로 연이어 있는 주춧돌들에서 고려시대의 7성급 호텔이었던 혜음원의 한창 때 모습을 그려낸다. ‘담장밑으로 수로가 흐르고, 굽이굽이 물길은 군데군데 연못을 만나고, 물보라 튀기는 작은 폭포가 있는 경사지 건축은 이처럼 복합적이고 역동적이고 환상적이다.’ 그의 머릿속에서는 그곳에서 몽고 여인과 고려인 사내와의 불꽃튀는 사랑 이야기까지 그려지고 있는 것 같다. 그런데, 당신이 파주에 있는 혜음원의 터에 가보면 어떨까? 메이슨 김봉렬은 크로노스적인 시간을 우리과 같이 보내고 있지만, 카이로스적으로는 훨씬 두텁게 시간을 보내고 있다. 이 책은 그 메이슨적 생각에 당신을 초대한다. 우리들이 무심코 지나쳐버린 건축물들이 지닌 경이로운 카이로스적 의미를 선사한다.

 

물이 흐르는 모습을 우리는 몇 가지로 나눌 수 있는가? 옛 사람들은 흐르는 물의 종류를 평탄한 계, 험준한 협, 깊은 , 휘도는 , 고인 연으로 나눈다. 우리의 선비들은 이렇게 변화무쌍한 자연 환경에 자신의 철학을 담았다. 초가 삼간에서 삼간은 방 하나와 마루와 부엌을 말한다. 방과 부엌은 생존에 필수적인 것이라면, 마루는 제자를 기르는 공간이다. 어쩌면 사치스러운 잉여 공간이다. 그런데, 임진왜란때 나라를 구한 의병들의 정신은 이 마루에서 키워졌다. 병산서원의 借境차경개념은 놀랍다. 건물은 자연과 학문과 정신을 담는 그릇에 불과하다. 그런데, 건물이 소박할수록 거기에 담기는 자연과 학문과 정신은 넓고 깊어진다. 건축가들은 이 깊고 넓은 세계를 이해하면서 동시에 나무기둥이 수십 수백년 건물의 무게를 받아 어느 방향으로 휘는지, 그렇게 휜 모양이 사람들에게 어떤 심리적인 영향을 주는지도 고려하는 사람들이다. 디테일과 통시대적인 조감도를 동시에 본다.

 

다행히 이러한 통시간 통공간적 사고를 하는 호모데우스(homo-deus)적 김봉렬이 우리 편이다. 그는 건축에서 기술과 예술을 합해지면서 인간에 대한 애정을 담아야 한다고 생각한다. 그는 작은 것을 사랑한다. 그가 자원하여 리모델링하였던 애양원은 1926년에 한센병자 800여명이 광주에서 쫒겨나면서 세운 건물이었다. 그의 고향 근처에 있었으니 어릴 때 그들에 대한 악성루머는 많이 듣고 자랐을 것이다. 경성시내를 돌아다니며 쓴 구보씨의 하루 일기에 주목하는 그는 독립군도 아니고, 친일파도 아닌채로 식민지를 살아가는 소시민의 정신적인 헛헛함을 이해한다. 임란때 왜군들과 제국주의 일본의 잔인함과 우리에게 남겨진 수치심도 건축물에서 볼 수 있다고 한다. 메이슨의 눈으로 보면 서생포 왜성에서 왜놈(!)들이 가졌던 조선에 대한 야욕을 볼 수 있고, 알뜨르(제주말로 아래 들’) 비행장 흔적은 난징 폭격에 동원된 제주민들의 고난과 옥쇄 위기를 증거한다. 올레길중에서 내가 가장 좋아하는 10번 올레가 있는 송악산에 있는 깊은 상처가 언제 어떻게 난 것인지 이번에 알았다. 개천에서 용난 박자청은 하인에서 국토부장관까지 오른 이이다. 그가 설계하고 공사를 시행할 때 가졌던 철학과 세간의 사정들이 암호처럼 건축물에 남아있으며 김봉렬이 이를 해독해준다.

 

이루지못했지만 선조들이 가졌던 새로운 세상을 위한 꿈들도 저자를 통해 알 수 있다. 독립운동에 나섰던 석주 이상룡이 장자의 의무를 버리며 팔았던 안동 임청각, 오늘날의 아이돌 기획사처럼 85명의 기녀(훈련생)을 음악, 노래, 춤으로 키워 예악 정치로 문예부흥을 꾀했던 효명 세자의 연경당. 21세의 나이에 단명했던 것처럼 너무나도 일찍 BTS를 꿈꾸었지만, 지금의 문예부흥, K-팝은 결코 우연히 등장한 것이 아님을 알 수 있다. 심지어는 최초의 배달음식 효종갱(아침 해장국 남한산성에서 서울로 해장국 배달)은 우리는 그때부터 배달의 민족이었음을 보여준다.

 

외국인들도 우리 땅에서 꿈을 꾸었다. 성공회는 한옥식 교회를 지었고, 개신교 고딕식 교회를 지었다. 이후 그들의 행동도 여기서 유추할 수 있다. 성공회는 본질적인 것은 일치, 비본질은 다양화한다는 西道東器(서방의 개념을 배우고, 우리의 전통양식은 버리지 않는다)의 개념을 따른데 반면, 개신교도는 전통을 버리고 서구 쫒는 사상을 주입하였으며 대부분 친일로 전향하였다. 강화성당은 절 모양으로 지었고, 온수리 성당은 전통 양반집 모양으로 지었다고 하니 더욱 가보고 싶은 마음이 든다. 모든 것이 건축에 모인다.

 

건축은 인간 사유의 물리적인 결과라는 의미에서 인문학적이다. 그런데, 사실 인문학은 사유의 결과물을 지칭하지 않고, 사유의 방법이라고 한다. 이라크 출신이면서, 레바논에서 교육을 받은 하디드가 지은 DDP(동대문 디자인 프라자)에 대해서 의견이 분분하다. “동대문에 불시착한 UFO”라고도 하며, ‘데카르트적 직교좌표체계를 거부하고 뉴튼적 중력의 세계마저 거부한 혁명적 시도라고도 한다. 김봉렬은 이에 대해 결론을 내지 않고 여러분의 생각을 묻는다. 인문학은 사유의 결과가 아니라 사유의 방법인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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