처절한 정원
미셸 깽 지음, 이인숙 옮김 / 문학세계사 / 2005년 8월
평점 :
절판


한나 아렌트의 <예루살렘의 아이히만>을 읽으면서 관련도서로 읽게 된 책 <처절한 정원>이다. 처절한 정원은 그 시작 장면에서 궁금증을 유발한다. '어릿광대 삐에로가 모리스 파퐁의 재판이 열리고 있는 보르도 법정으로 들어가려고 하자 경찰이 그를 막았다고 많은 사람들이 증언했다.'라는 문장으로 시작한다. 어릿광대와 모리스 파퐁의 재판과의 연관성이라니 무척 흥미롭다.

모리스 파퐁은 나치의 꼭두각시 정권이었던 프랑스의 비시 정권하에서 보르도 지역의 치안 부책임자였다. 그는 1942년부터 1944년까지 1500명의 유대인을 체포하여 죽음의 아우슈비츠 수용소로 보냈다. 하지만 그는 전후 레지스탕스였다는 경력을 내세워 전후 정권에서 장관까지 지낸 그가 마이클 슬리틴이라는 역사학자에 의해 폭로되고 만다. 마이클 슬리틴은 파퐁에 의해 아우슈비츠로 보내졌지만 기적적으로 살아남아 모리스 파퐁의 반인륜적 범죄를 낱낱이 증언 한 것이었다.

그렇다면 어릿광대는 누구일까? 이 동화의 화자이자 화자의 아버지 앙드레는 학교 교사이면서도 삼류 어릿광대 역할을 하고 있다. 어린 아이의 시전으로 바라본 아버지의 어릿광대의 모습은 항상 화자에게 창피함을 주는 것이엇다. 하지만, 아버지 앙드레와 삼촌 가스똥의 레지스탕스 시절의 이야기를 듣고 난후에는 아버지의 어릿광대 모습은 부끄러움이 아니라 무한한 감동과 존경으로 바뀌게 된 사실을 고백했다.

프랑스가 독일군에게 점령된 그 시절, 레지스탕스로 활동하던 아버지 앙드레와 삼촌 가스통이 수행한 변압기 폭발 사건은 같은 민족이던 프랑스헌병의 고자질로 인해 아버지와 삼촌은 무고한 마을주민 2명 앙리와 에밀과 함께 깊고 어두운 구덩이감옥에 갇히게 되고, 그곳은 4명의 마지막 삶의 장소이자 죽음의 장소가 될 '처절한 정원'이었다. 처절한 정원이라는 말은 기욤 아뽈리네르의 시에 나오는 상징어였다. 그 추악하고 잔인한 생애 마지막 시간을 독일보초병이 보여준 우스꽝스러운 광대 몸짓을 보며 그들은 견뎠다. 그리고 어쩔수 없이 죽을 수 밖에 없겠구나 하는 순간 변압기 폭파 당시 그 옆에 있던 전기공이 자신이 폭파범이라고 자백하는 바람에 그들은 살아 날수 있었다. 그 전기공이 바로 변압기가 폭발하는 바람에 화상을 입었고 그 아내가 독일병에게 자신의 남편이 범인이라고 신고했다는 것이다. 어차피 죽을 남편을 대신해 무고한 사람들을 구해 내야 겠다고 생각했는지 그 아내의 입장이 무척 궁금해진다. 그 전기공의 아내가 바로 가스통 삼촌의 아내 니꼴 숙모였다는 사실을 알고 더욱 충격으로 다가왔다. 처절한 정원인 구덩이 속에서 갇혀 있는 그들에게 어릿광대의 모습을 보여준 독일 보초병은 나중 영화 감독이 되어 있는 후일담도 무척 흥미로웠다.

“나는 자네들이 진짜 범인이든 그렇지 않든, 상관없는 일이라고 생각해. 중요한 것은 독일군의 계략에 맡려들어서는 안된다는 거야. 가장 좋은 방법은 독일군에게 자네들 전부를 죽이라고 하거나, 그렇지 않으면 아무도 죽이지 못하게 하는 거야. 자네들 스스로 희생양을 선택한다면 반인륜적 선택을 하도록 한 그들의 논리에 덩달아 춤추는 꼴이 되는 거지. 그렇게 되면 도리의 그들의 논리가 정당하고, 그들은 자네에게 동정을 베푼 셈이 되는 거란 말일세”
“죽고 사는 일을 타인의 손에 맡기거나 다른 사람의 목숨을 빼앗는 대가로 자신이 살아남는다면 인간으로서 존엄성을 포기하는 것이고, 악이 선을 이기는 것에 동의하는 것이라고 생각하네. 악의 편에 있는 독일군복을 입고 있는 나 자신이 부끄러울 따름이야. ” 81쪽

처절한 정원 구덩이 속에서 누가 가장 먼저 희생양이 될지 제비뽑기를 하려는 그들에게 어릿광대 독일 보초병은 "자네들 스스로 희생양을 선택한다면 반인륜적 선택을 하도록 한 그들의 논리에 덩달아 춤추는 꼴이 되는 거지. 그렇게 되면 도리의 그들의 논리가 정당하고, 그들은 자네에게 동정을 베푼 셈이 되는 거란 말일세”  “죽고 사는 일을 타인의 손에 맡기거나 다른 사람의 목숨을 빼앗는 대가로 자신이 살아남는다면 인간으로서 존엄성을 포기하는 것이고, 악이 선을 이기는 것에 동의하는 것이라고 생각하네. 악의 편에 있는 독일군복을 입고 있는 나 자신이 부끄러울 따름이야. ”라는 말로 그들을 위로하고 자신이 어쩔수 없이 처한 나치의 명령 체제 속의 자신을 부끄러워 하는 모습은 모든 나치는 나쁘다는 결론에 도달했던 나로서는 어떤 충격으로 와닿았다.

소수지만 독일 지식인들 중에는 나치에 대항하다 고난을 당한 이들도 있었다. 어쩔수 없이 명령에 따르지만 일말의 양심으로 난처함에 처한 이들을 위로하려는 그의 어릿광대짓은 아버지 앙드레에게 깊은 감동과 여운으로 남았는지 모르겠다. 그래서 아버지는 삼류 어릿광대로 변장해 여러 사람앞에서 '원맨쇼'를 하며 독일 보초병의 뜻을 위로 하려 했던 것이다.

지금도 세계적으로 자행되고 있는 전쟁은 정치적으로 이루어 지고 있지만, 그나라 국민들에게는 슬픔과 고통만을 안겨 준다. 불필요한 잔인성으로 학살이 자행되고 버젓한 살인행위가 저질러 지고 있는 전쟁의 현장은 다시는 일어 나지 말아야 하는 것은 당연한 일이며 그런 반인륜적 행위를 저지른 자인 전범에 대한 재판과 처벌또한 당연한 것이다. 그래도 그렇게 재판과 처벌이 이루어 지는 유럽의 현실이 부럽다. 엄연한 진실이 있는데도 청산을 해 내지 못한 우리의 근현대사의 문제는 아직도 가슴 저리게 다가온다.

"이 세상에 진실이 존재하지 않는다면 어떻게 희망을 가질 수 있겠는가?"(10)"또한 과거에 대한 기억을 잊어버린다면 어떻게 미래에 대한 희망을 가질 수 있겠는가?"(11),라는 말은 더욱더 절절하게, 그리고 의미있게 우리에게 주어진 임무와 책임 마냥 가슴에 와닿아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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