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방인 민음사 세계문학전집 266
알베르 카뮈 지음, 김화영 옮김 / 민음사 / 2011년 3월
평점 :
구판절판


세계고전문학이 다 그렇듯이 학창시절 꽤 책을 읽는다고 읽었을 지라도, 지금에 와서 되짚어 보면 "그책 내용이 뭐였더라."하고 갸웃거리는 책들이 많습니다. 민음사 책들이 대부분 그런데요. 중학교시절 이런 고전들을 읽느라고 문고판 가지고 다니면서 읽긴 읽었지만 그 당시 이해력으로 고전문학작가들이 전달하고자 하는 내용을 파악하지 못한 탓이겠지요. 저한테 '이방인'도 그랬습니다. "그래, 이책 읽엇을때 나도 이방인 처럼 느꼈었지." 하는 감상 말고는 딱히 떠오르지 않더군요. 그래서 고전은 여러번 읽어야 되는 가 봅니다. 이번에 읽고서야 " 카뮈의 이방인" 이 왜 그토록 높이 평가하는지 이해가 되었어요. 장 그르니에의 "섬"에서 그르니에의 제자 였던 카뮈의 소개말이 없었다면 저는 "섬"에 대해 이해를 하지 못했을 겁니다. 아마 그르니에의 제자였기 때문에 카뮈는 스승의 책을 가장 잘 평가 할수 있었을 겁니다. 아프리카 알제리의 알제는 당시 프랑스의 식민지 였지요. 알제 대학에서 스승과 제자로 만난 그르니에는 카뮈의 문학적 삶에 많은 영향을 끼쳤어요. 카뮈도 당시 알제에 살면서 이 책을 집필하기 시작했답니다.

 

 "이방인"은 뫼르소하는 젊은이가 알제에서 인생을 가장 "시니컬"하게 살다간 이야기입니다. 평소 직장에서도, 자신의 꿈에서도 무관심하고, 어떤 열정도 없이 그럭저럭 살아가다가 자신의 앞에 자신을 위협하던 아랍인을 무심코 권총으로 쏘아 죽이고, 또 사형선고를 받고 죽게 되는 이야기입니다. 뫼르소하는 인물은 그 20세기 초를 살아가는 인물이었지만, 지금의 21세기를 살아가는 현대 젊은이와 무척 많이 닮아 있습니다. 귀차니즘에 빠져있고, 어떤 문제에도 무관심으로 일관하고, 그냥 그렇게 살아가는 우리의 일반 젊은이라고 보면 됩니다. 그런 뫼르소가 아랍인을 죽이지 않았다면 지금 우리처럼 아무렇지도 않게 지금도 편안하게 살아갈수 있었을 텐데, 어쩌다 사람을 죽이게 됩니다. 그러면서 뫼르소에 대한 평가가 달라지기 시작합니다. 소설 첫대목에서도 "죽음"의 첫번째 형태인 자연사로 죽은 어머니의 장례식을 참석하게 됩니다. 그 때 뫼르소는 다른 아들 처럼 울지 않습니다. 그리고 어머니의 마지막 얼굴도 보지 않겠다고 하고, 무덤덤히 어머니 시체 옆에서 커피도 마시게 됩니다. 그런 모습이 살인을 하게 된 뫼르소를 냉혈한으로 인식하게 만들어 버립니다. 또, 어머니 장례식 다음날 여자 마리를 만나 해수욕을 하고, 마리와 자게 됩니다. 그런 행동이 더욱 뫼르소를 살인자와 연관시키고 감정도 피눈물도 없는 사람으로 몰아 가게 되지요.

 

뫼르소는 살인 동기를 위해 자신을 변호 하지도 않았고, 기독교를 강요하여 회개하기를 바라던 판사의 요구에 호응하지도 않았습니다. 왜냐하면 뫼르소는 자신속에 없는 믿음을 거짓으로 내어 보이기도 싫었고, 우연한 살인도 아무런 목적의식 없이 이루어진 만큼 거짓과 과장을 보이기가 싫었던 것입니다. 어찌보면 정말 바보같이 보이는 그의 행동 때문에 그는 사형선고를 받게됩니다. 약간의 "헐리웃 액션"만 보여서도 그는 정당방위로 풀려 날수도 있었을 텐데, 그는 그러지 않았고, 사형을 담담히 받아 들입니다.

 

이방인을 잘 살펴보면 카뮈는 "죽음"에 대한 이야기를 해주고 있습니다. 어머니의 "자연사"죽음, 그리고 "살인" , 그리고 "사형" 라는 세가지 죽음의 형태를 통해 카뮈는 무언가를 말해주고 있습니다. 어머니의 죽음을 보고 무덤덤하게 , 무관심한 태도로 일관했고, 어머니의 나이도 제대로 모르는 "애매함"을 드러내던 뫼르소가 살인후 재판을 받으면서 약간의 동요의 빛을 보입니다. 육체적, 심리적 피로를 느낀 그가 심약한 마음의 형태를 보이지만, 곧 그는 "우리 인간은 본래 다 사형수다. 언젠가는 다 죽을 사형수다"라는 생각을 가지고 되어 자신의 죽음에 대해서도 무관심하게 받아 들이게 됩니다. 그는 삶에서 과장으로 자신을 표현하지 않았습니다. 거짓으로 자신의 신앙을 만들지도 않았습니다. 시기는 다르더라도 결국은 죽을 죽음에 대해서도 초연해 질수 있었습니다. 그는 진정 거짓된 인생을 살지 않았던 사람입니다. 카뮈는 이런 뫼르소의 행동과 죽음을 통해 우리는 죽음이라는 마지막 종착역을 벗어날 수 없음을 인식시켜 주었습니다. 어둠침침한 죽음이라는 뒷 배경이 있기에 죽음과 대비되는 "삶"은 더욱 빛이 나고 두드러져 보일수 있는 대비효과를 주고 있는 것입니다. 밝게 빛나는 삶속에서 우리가 행복을 느낄수 있는 곳도 명암의 대비속에서 묵묵히 배경으로 깔려 있는 '죽음'이 있기 때문이 아닐까요? 죽음을 두려워 하기 이전에 우리는 그 앞에 펼쳐진 삶에의 행복에 주목해야 할 것입니다.

 

(135~136쪽) 아무도 엄마의 죽음을 슬퍼할 권리는 없는 것이다. 그리고 나도 또한 모든 것을 다시 살아 볼수 있을 것 같은 생각이 들었다. 마치 그 커다란 분노가 나의 고뇌를 씻어 주고 희망을 가시게 해주었다는 듯, 신호들과 별들이 가득한 밤을 앞에 두고, 나는 처음으로 세계의 정다운 무관심에 마음을 열고 있었던 것이다. 세계가 그렇게도 나와 닮아서 마침내는 형제 같다는 것을 깨달으면서, 나는 전에도 행복했고, 지금도 행복하다는 것을 느꼈다. 모든 것이 완성되도록, 내가 덜 외롭게 느껴지도록, 나에게 남은 소원은 다만, 내가 사형집행을 받는 날 많은 구경꾼들이 와서 증오의 함성으로 나를 맞아 주었으면 하는 것 뿐이다.

 

 

이 소설의 결말은 비극적이지만 뫼르소의 독백은 결코 비극적이지 않습니다. 그속에서 그는 행복을 외치고 있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이방인은 다름아닌 "삶의 찬가이자. 행복의 찬가"라고 할수 있지 않을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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