앤디 워홀 Art Special 7
이자벨 쿨 지음, 정연진 옮김 / 예경 / 2008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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앤디 워홀의 시대였던 1960년대 세계는 혼란의 세계였다. 모든 예술의 중심지는 빅애플이라고 불리는 뉴욕에서 시작되고 있었고, 비트족의 거리였으며, 자유와 마약과 파티의 세계였다. 그 중심에 앤디 워홀이 살고 있었고, 예술계에 한 획을 그었다.

앤디 워홀의 앞서가는 창의성은 처음에 많은 사람들이 이해하지 못했고, 그를 통속적인 산업디자이너로만 알고 있었다.

그를 정식 예술사에서 인정하기까지는 시간이 걸렸던 것이다. 하지만 결국 뉴욕의 예술은 그를 예술가로 받아 들였고, 그의 사업적인 홍보의 수단은 예술이 되어 버렸다. <사업을 잘 하는 것이 최고의 예술이다>라는 말을 내 뱉을 정도로 자기 피알의 시대에 걸맞게 인맥을 넓혀 갔고, 그의 작품속에 파격을 담아 나갔다.

<추상 표현주의> 가 성행하고 있을 즈음에 앤디 워홀은 <팝아트>라는 장르로 미술사를 이끌어 가고 있었다.

그는 일상에서 모티브를 찾았으며 <달러 지폐, 연쇄 살인법, 교통사고, 수프 깡통>등을 일상에 얻은 아이디어로 많은 작품들을 남기고 있다.

 

앤디워홀은 미술가, 작가, 영화감독, 방송인, 잡지사 편집자 등의 다양한 역할을 능숙하게 해 냈으며, 그것들을 즐기면서 또한 거기서 예술을 창조해 나갔던 것이다.

록음악에도 심취하여 <벨벳 언더그라운드>밴드를 사랑했고, 그들의 록음악과 접목시켜 공연예술로 승화시켜 나갔다.

그는 마약과 파티에도 심취해 있었던 것으로 알려져 있고, 또한 동성애자 였던 것도 은근한 비밀로 알려져 있었다.

많은 슈퍼 스타를 대동하고 다녔지만 그의 연인은 항상 겉으로 드러나지 않았고, 그는 항상 외로워 했으면서도 대부분의 시간을 창작 활동에 심혈을 기울였다.

그는 또한 대단한 수집가 여서 자신의 손에 들어오는 것은 무엇하나 버리지 않고 모았다. <어둠속의 관찰자>로서 항상 사진기와 카메라를 가지고 다니면서 그의 동료들의 모습을 담았고, 일기장에 모든 것을 기록 해 두었다.

그런 그의 유산이 6개월을 분류할 만큼 방대한 것이었고, 지금도 그의 유산으로 많은 경제적 이익과 문화적 가치로 부여 되고 있다.

한때 페미니스트 였던 발레리 솔라나스에 의해 저격당해 육체적 고통과 정신적인 상처로 후유증을 남기기도 했다.

 

파격과 특이성이 발산했던 그의 작품들을 구경하고자 하는 분은 과감하게 피츠버그행 비행기를 타면 된다.

팝아트를 전공하시고 싶은 분은 꼭 앤디 워홀을 알아야 하고, 사업가로서 성공하고 싶으신 분들도 앤디워홀의 기지를 배워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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