무라카미 하루키 잡문집 비채 무라카미 하루키 작품선 1
무라카미 하루키 지음, 이영미 옮김 / 비채 / 2011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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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본 문학에 대해서 '그냥 싫다'는 생각만 가지고 있던 나에게 그나마 관심을 가지게 해준 일본 작가 두사람이 있습니다. "무라카미 하루키"와 "히가시노 게이고"입니다. 그래서 차츰 일본 문학에 대한 저 혼자만의 높은 장벽을 무너뜨리고 접근하기 시작할수 있었던 것은 이 두사람의 역할이 무척 컸습니다. 그리고 저에게 독서의 세계로 빠뜨리게 해준 두사람의 작가가 있습니다. "베르나르 베르베르"와 "무라카미 하루키"입니다. 여기서도 무라카미 하루키씨는 빠지지 않네요. 그만큼 저에게 영향이 컸던 작가기도 합니다. 하지만 가만히 따져 보면 이분의 책을 그리 많이 읽은 편이 아닙니다. 장편을 읽어서 그런지 전 엄청 많이 읽었다는 착각속에 빠져 살고 있었습니다. 물론 베르나르 베르베르씨의 책은 몇권 빼고 거의 다 읽었지만 말이죠. 무라카미 하루키의 <상실의 시대><해변의 카프카><1Q84> 와 에세이 <먼북소리> 단 4권의 책이 전부이네요. 하지만 그의 세계는 어느정도 들여다 보입니다. 물론 다는 아니지만요.그래서 저는 제가 무라카미 하루키의 팬이기 때문에 당연히 새로 나온 <무라카미 하루키 잡문집>을 사서 읽어야 된다고 생각을 하게 된 것입니다.

 

잡문집이니 크게 뭔 줄거리나 주제의식을 얻고자 한다면 이 책은 실패입니다. 그저 하루키씨도 밝혔듯이 자신의 잡다한 심경의 모음집에 불과하니까요. 저는 그래도 팬이기 때문에 이 책에서도 하루키에 대한 어떤 메세지를 건져야 했습니다. 물론 건졌습니다. 일단 저는 하루키씨가 가진 엄청난 음악적 지식에 대한 이야기를 알고 싶었습니다. 해변의 카프카나 1Q84에 나오는 팝이나 재즈, 클래식에 대한 해박한 지식을 읽으면서 감탄을 하고, 그의 팬이 되어 버렸기 때문입니다. 그의 음악에 대한 이야기는 정말 상세하게 잡문집에 실려 있습니다. 그가 젊은 20대 시절에 했던 재즈카페 경영에서 부터 팝과 재즈에의 몰입, 그가 사랑했던 음반들, 그리고 가수들에 대해 어느정도 정보를 얻을수 있었기 때문에 이 책을 읽은 값어치는 저에게 충분했습니다.

 

음악에 대해 문외한인 저에게 이런 음악적인 정보를 참 유익합니다. 전에 읽었던 박웅현씨의 <책은 도끼다>에서 알게 된 제이슨 머라즈와 핑크 마티니의 노래도 이 때부터 즐겨듣게 되었습니다. 잡문집을 통해서도 알게 된 오래된 팝과 재즈로 귀를 즐겁게 할수 있을 것 같습니다. 다 익히 들어 알고 있는 노래이긴 하지만 가수와 노래를 연결 시키지 못했던 문외한의 비애를 이책을 통해 어느정도는 극복할수 있어 좋네요. 일단 재즈의 대명사 <빌리 홀리데이>의 구슬픈듯, 정겨운 목소리가 귀를 즐겁게 해줍니다. 도어즈의 싱어 짐모리슨의 <Light My Fire>와 <소올 키친>은 선동가 다운 음악적인 그의 재능에 리듬과 함께 어깨를 들썩일수도 있습니다. 음악이라는 새로운 언어와 리듬감이 하루키의 스토리를 만들어 냈다는 고백을 실감할수 있을 것 같습니다.

 

많은 장편을 써 낸 저력이 바로 하루키씨가 취미로 해온 번역의 힘이 컸다고 합니다. 영문을 일본어로 번역하는 가운데 아름다운 문장을 만들어 내는데 많은 도움을 받았다는 것이지요. 그래서인지 미국문학에 대한 해박한 지식도 자랑하고 있네요. 우리가 익히 알고 있는 <스콧 피츠제럴드>의 <위대한 개츠비>나 제롬 셀린저의 <호밀밭의 파수꾼>에 대해서도 번역 작업을 한 경험이 있다고 합니다. 1920년의 아름다운 청춘문학을 대표했던 피츠제럴드의 이야기도 흥미진진했고, 자신과 같은 반항심이 강했던 셀린저의 삶에서도 공감을 느끼는 하루키였습니다. 호밀밭의 파수꾼에 대한 평가도 '사회에서 이탈하고자 하는 소년의 공포심을 아주 생생하게 묘사한 이야기'라고 정의내려 주고 있습니다. '반세기가 넘는  세월이 지난 지금도 수많은 독자가 피츠제럴드의 작품들에 열광하는 가장 큰 이유는 '멸망의 미학'이 아니라 그것을 능가하는 '구원의 확신'임이 틀림없을 것이다.'(314쪽)라고 피츠제럴드에 대한 고전을 존경하는 뜻을 내비치고 있습니다. 여러 미국 작가에 대한 번역을 거치면서 <레이먼드 카버>는 직접 찾아가 인터뷰까지 했던 기록도 있습니다. 최근 제가 <대성당>이라는 책으로 알게 된 레이먼드 카버. 참 평범한 것 같지만 너무 평범해 저를 어리 둥절하게 만들었던 그의 작품에 대한 평가를 하루키씨의 설명으로 그제야 저는 이해 할수 있었습니다.

 

322 무슨일이 있어도 절대 '잘난 척하는 소설'을 쓰지 않았다. 달변을 싫어하고, 요령을 싫어하고, 지름길을 싫어했다. 있는 것으로 대충 때우기를 철저하게 꺼렸다.....카버는 이른바 '솜씨 좋은 소설'을 추구하지 않았다. 그가 쓰고자 한 것은 단 하나의 레이먼드 카버 이야기였다. 레이먼드 카버만이 포착해낼수 있는 세상의 풍경을 레이먼드 카버만이 풀어낼수 있는 어법으로 픽션에 담아 이야기하는 것.

 

324 이 사람은 신뢰할수 있는 사람이다.-소설로도 인품으로도 라는 것이 그때 내가 레이먼드 카버라는 살아있는 인간에게 받은 인상이었다.

 

잘난 척하는 소설에 익숙해 있던 저에게 레이먼드 카버 식의 어법이 잘 이해 되지 않았던 이유를 알게 되는 순간이었지요. 역시 잘아는 사람의 설명을 들어야 이해되는 부분이 있는 것 같습니다.

또 새롭게 일본에 대해 알게 된 부분은 1995년 3월 20일에 있었던 옴진리교 지하철 사린가스 테러사건의 대목이었습니다. 그 사건을 가지고 인터뷰를 하여 작품으로도 발표한적이 있었던 하루키는 이에 대한 자신의 생각을 글로 표현해 놓고 있습니다. 아사하라 쇼코라는 교주의 초능력을 신봉해온 뛰어난 엘리트 출신의 신자들이 저지른 어처구니없는 사건은 픽션과 현실을 구분해 내는 능력을 상실한 현세대를 반영하고 있다는 사실입니다. 살아가는 현실의 팍팍함에서 탈피하고자 하는 신자들의 폐쇄성이 자신들만이 구원받고자 하는 배타주의로 엄청난 살상이 일어난 것입니다. 이런 신자들의 특징은 어릴적 픽션에 근거하는 소설을 많이 읽지 않았을 거라는 하루키의 생각은 범죄심리학적으로 어느정도 타당한 이야기 일겁니다.

 

소설을 쓰는 저자의 사명을 '개인이 지닌 영혼의 존엄을 부각시키고 거기에 빛을 비추기 위함이며, 우리 영혼이 시스템에 얽매여 멸시당하지 않도록 늘 빛을 비추고 경종을 울리자' 에 두고 있기도 합니다. 그런 소설은 크게 뛰어난 작업이 아니라 '그 어디에도 새로운 말은 없다. 지극히 예사로운 평범한 말에 새로운 의미나 특별한 울림을 부여하는 것이 우리가 할 일이다.' 라는 말도 소설가들의 역할을 말하고 있답니다. 그런 다짐을 가진 소설가로서의 하루키씨 모습에서 우리는 또한번 소설을 읽는 의미를 찾게 됩니다. 이런 소설가들의 노력이 끊임없이 이어져 갔으면 좋겠다는 희망을 가지며 잡문집에 대한 생각을 마무리 해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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