리투아니아 여인
이문열 지음 / 민음사 / 2011년 11월
평점 :
절판


이문열 선생님의 신작이면서 내가 좋아하는 민음사 에서 출판한 작품이라 눈여겨 보아 두었던 <리투아니아 여인> . 이 소설의 내용에 대해 전혀 문외한 수준으로 처음 겉 표지를 열기 전 , 소설의 내용을 온갖 상상으로 채웠다. 이문열 선생님이 리투아니아 여행을 다녀왔나? 아니면 리투아니아 여인을 알고 있나? 도대체 유럽의 조그만 나라 리투아니아가 왜 등장해야 하는 것일까?하는 여러 의문에 휩싸였다. 그런데 막상 읽고 보니 앞 부분이 <무릎팍 도사>에 나왔던 <박칼린>씨의 어린 시절에 너무 비슷했다. 더 읽어 갈수록 이 소설은 이문열 선생님이 아마도 <남자의 자격>에서 지휘자로 급부상 했던 우리 시대의 아이콘 <박칼린>씨를 모델로 한 작품이구나 확신이 들었다. 그래서 리투아니아 여인에 대한 이문열 선생님의 보도 기사나 작가의 말에서는 꼭 그사람이라고 지칭하여 같은 인생으로 생각하지 말아 달라는 부탁을 하고 있다. 작품 구상의 모델이었긴 하지만 소설이 그 사람의 일생과 같지 않은 허구에 바탕을 두고 있으므로...

 

한국계 아버지와 미국계 어머니 사이에서 태어난 줄 알앗는데, 어머니가 리투아니아계 였다. 소련 제국주의 당시 식민지로 핍박을 받으면서 살아야 했던 발트 3국 (라트비아, 에스토니아, 리투아니아) 중 한 나라 , 리투아니아에서 미국으로 오기 까지의 한가족의 이민사와 이산가족의 아픔이 서려 있었다. 코카서스 인종의 외모를 지닌 이 소설의 주인공 김혜련에 대한 혈연과 지연에 의한 정체성을 어떻게 생각하는지, 굵직한 주제 의식을 가지고 접근한 작품이었다. 단 한번의 결혼, 한국인 과의 결혼에서 두 정체성의 알수 없는 불협화음과 마지 못해 인내하면서 살아야 했던 결혼생활의 종결을 보면서 말로 표현되지 않은 주인공 혜련의 아픔이 서려 오기도 한다.

 

163 그 사람이 한 말을 내편에서 좀 더 절실하게 말한다면 아무래도 두 정체성의 불협화음이겠지요. 어느 날 내가 사랑이라고 믿었던 것이 실은 억지스러운 인내이고 관용이고 자기 포기에 지나지 않는다는 깨달음을 얻게 될때 느끼는 섬뜩함 말이에요.

 

화자로 나오는 '나'도 연극 연출 감독으로 인생을 살아오면서 늦은 결혼생활 속에서 아내의 연극적인 삶이 진실성의 결여로 보이면서 파탄을 맞이 하게 된다. 오스카 와일드의 <도리언 그레이의 초상>에서는 도리언이 사랑한 시빌이라는 연극배우의 연극 때의 화려한 모습과 연기 할 때 당시의 예술품으로 모습을 사랑했다가 시빌이 도리언을 현실적인 사랑으로 받아 들이면서 연극배우로서의 연기가 잘 되지 않자 도리언은 시빌을 버리게 된다.이 작품과는 대조적으로 화자인 '나'는 부부 생활속에서도 연극속의 연기를 하고 있는 아내의 모습이 가식적으로 보여 힘들어 하고 있었던 것이다. 연기자들의 삶이 이토록 어려운 것일까? 연기에 몰입을 하게 되면 현실과 연기가 구분되지 않게 살아가지는 연기자들도 있을 것이다. 그런 감정들을 떨쳐 버리지 못해 자살로 마감하는 배우도 있듯이 말이다.

 

143 나는 배우자가 아니라 우리 결혼 생활에서 아내 역을 맡을 배우와 결혼 한 것이었고, 스스로는 원관념이 되는 삶을 함께 할 남편이기보다는 우리 결혼을 성공적인 연극을 이끄는 연출자이기를 바란 것인지도 모를 일이었다.

 

시대의 명사, 아이콘으로 떠오르다 보면 대중들의 구설수에 오르기 쉽고, 질투와 비난 어린 인터넷 악플과 의견들이 생기기 마련이다. 김혜련도 그런 도마위에 놓여있게 된다. 어떻게 보면 정체성의 문제일수도 있다. 이국적인 외모에서 한국적인 정서를 담은 음악을 작곡하여 대중화하려는 시도가 문화적 정체성이라는 말로 민족주의 아첨하는 성향으로 변질될수도 있게 된다는 것이다. 혜련의 다국적성과  혼합성을 무슨 중요한 문화적 흠결인 양 몰아가다가, 눈 한번 깜짝 않고 혜련의 음악적 재능과 성취를 '튀기의 곁눈질'로 폄하하기도 해 상처를 입히게 된다. 하지만 혜련은 이에 굴하지 않는다. 정체성의 의미를 다음과 같이 스스로 정의 하기도 한다.

 

"저는 정체성이란 돌아보는 게 아니라 앞을 바라보는 개념이고, 돌아가기 위해서가 아니라 나아가기 위해서 가다듬어 보는 자기 파악의 노력이라고 봐요."

 

이보다 더 긍정적인 정의가 있겠는가? 혈연과 지연에 바탕하는 정체성이란 무의미함을 다시 한번 피력하고 있다.

 

혜련의 혈연의 정체성은 꼭집어 정의 하기 어렵다. 자신의 조국이 어디인지 정확히 말하기도 어렵다. 한국, 미국, 리투아니아....

하지만 많은 고민끝에 그녀는 자신의 조국이고, 동족은 자신의 음악을 이해하고 사랑해주는 사람이라는 결론을 내린다. .. 문학적 노마드(유목민적인 생활)를 향해 떠나는 목부처럼 자신의 음악을 찾는 새로운 소비자를 위해 찾아 나서는 그녀의 삶에 박수를 보내고 싶어진다. 지금도 그녀는 그렇게 살아가고 있으리라. 자신의 정체성을 가지고 왈가 왈부하는 사람들의 말을 외면한채 자신의 정확한 정체성과 조국을 가지고 있으므로, 그녀는 외롭지 않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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