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무도 사과하지 않았으면 하는 슬픔, 그 시절 우리의 기분.

시절과 기분
김봉곤 지음 / 창비 / 2020년 5월

김봉곤 작가의 신작 '시절과 기분'의 사전서평단으로 선정되어서 가제본으로 먼저 읽었다.

단편들 중 내가 받은 소설은 '시절과 기분'.

김봉곤 작가님은 예전에 김애란 작가님의 북토크에서 사회를 맡으셨을 때 본 적이 있다.

그 전에는 최은영 작가의 '내게 무해한 사람'이 처음 나왔을 때 무슨 이유인지 알라딘에서 김봉곤 작가님의 '여름, 스피드'를 묶어서 팔았던 것이 기억난다.

이야기는 게이인 내가 남자친구 '해준'을 만나기 전에 만났던 여자친구 '혜인'에게서 오랜만에 연락이 오면서 시작된다.

이 소설의 좋은 점은 경쾌하고 긍정적인데 어딘가 슬프다는 것이다.

아무도 사과하지 않았으면 하는 슬픔은 김봉곤 소설의 아름다움이다.

게이의 전여자친구 이야기를 하는데 그녀가 얼마나 똑똑한지, 압도적이었는지에 대해서 계속 이야기한다.

과거를 회상하는 내가 환경이고, 조건이고, 좋을것 하나 없었던 그 시절을 긍정적으로 그리는데 우울한 가운데 어딘가 경쾌하다.

그러다 혜인과 나는 자연스럽게 친구로 돌아가게 된다.

한참 동안 연락을 하지 않고 살다가 혜인을 다시 만나게 되고, 혜인을 배웅하는 장면에서 아래의 문장이 나온다.

"슬픈 것과 사랑하는 것을 착각하지 말라고, 슬픈 것과 사랑하지 않는 것을 착각하지 말라고 생각했고, 아무여도 아무래도 좋을 일이라고도 잠시 생각했다."

김봉곤, '시절과 기분'

슬픈 것과 사랑하는 것을 착각하지 말라는 말이 인상적이었다.

슬픈 것과 사랑하는 것을 착각한 사람,

슬픈 것과 사랑하지 않는 것을 착각한 사람,

그 누구도, 아무에게도 사과하지 않았으면 좋겠다고 생각했다.

"뛰는 심장의 무늬를 구별하고 싶지 않았다. 어떤 답을 찾고 싶지도 않았다. 그저 열차가 멈추기 전까지 이 흔들림이 계속되기만을 간절히 바랄 뿐이었다."

김봉곤, 시절과 기분

남자친구인 '해준'을 향해 뛰는 심장,

여자친구였던 '혜인'을 향해 뛰었던 심장,

뭐가 사랑이었는지 구분하고 싶지도 않다고 말하는 '나'

세 사람의 역사는 점이 아닌 선으로 이어진 관계이다.

"혜인의 이름 아래 '미안하지 않으려고'라는 말을 쓰려 했으나 미안하'고'라 써버리고 말았다. 나는 잉크를 말리는 척 손부채질을 하며 시간을 벌었다. 그러고도 한참을 더 고민하다 그 옆에 '고마워'라고 이어서 썼다. 등에 땀이 흘렀지만, 나는 어쩌면 이게 더 나을지도 모르겠다고, 이 편이 훨씬 더 진심에 가까울지도 모르겠다고 생각했다."

김봉곤, 시절과 기분

내가 가장 좋아하는 장면이다.

작가인 내가 혜인에게 줄 책에 사인을 해 주는데 '미안하지 않으려고'라고 쓰려고 했다가 고민 끝에 '미안하고 고마워'라고 쓰는 장면.

미안하고 고맙다는 말이 딱 맞을지 모르겠어서 이 편이 진심에 '가까울지도' 모르겠다고 생각한다.

내가 혜인에게 느끼는 감정을 뭐라고 말해야 할까.

한 가지 분명한 것은 '미안하고 고마워' 이상의 어떤 감정을 독자도 분명히 짐작한다는 것이다.

나만큼 슬픈 사람, 나한테 사과하지 않아도 돼.

내가 만약 '미안하고 고마워'에 답장을 할 수 있는 혜인이라면 이렇게 말했을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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