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랑이라니, 선영아
김연수 지음 / 문학동네 / 2015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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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을 덮자마자 노트북 앞에 앉았다. 무슨 말을 어떻게 해야할지 모르겠는데도 일단은.
실실 웃음이 나고, 더워 죽겠는데도 뜨겁게 발열하는 오래된 노트북에 손을 올리는 일이 그다지 짜증스럽지 않다. 이 책을 읽은 뒤 내 맘 속 무더위가 3.7도쯤 내려갔다. 그러니까 조금 즐거운 기분이다.

 

대략의 줄거리는 이렇다.
지나간 여자를 벤츠를 타고 가다 만나는 재고물품 정도로 생각했던 진우는 그러나, 옛애인이 자신의 친구인 광수와 결혼한다는 이야기를 듣고 마음이 흔들린다. 광수도 오랜동안 혼자 사랑해왔던 여자와 꿈에 그리던 결혼을 하고서도 예전에 그녀가 진우와 사귄 적이 있었다는 사실이 계속 신경 쓰이고 뭔가 잘못된 것 같다는 망상에 사로잡힌다. 둘은 각자의 사랑을 지키기 위해 고군분투하는데...

 

밀란 쿤데라가 홍상수의 영화를 바탕으로 책을 쓴다면 이런 느낌일까?
사실 누군가의 작품을 보고 다른 작가를 떠올리는 것은 꽤나 게으른 감상법이겠지만, 어쨌든 이 둘이 떠올랐다는 것을 부인하지는 못하겠다. 처음부터 끝까지 사랑이라는 감정에 집중하는 한 명의 여자와, 사랑 그 자체 보다는 그것의 부산물인 질투와 시기로 눈이 먼 두 명의 남자라는 설정은 쿤데라를 떠올리게 하고, 그들이 찌질하고 유치하게 싸우면서 술자리를 난장판으로 만드는 모습은 영락없는 홍상수 영화의 한 장면 같다. 거기에 '사랑'이라는 요물에 대한 시니컬하면서도 따뜻한 시선을 숨기지 못하는 작가의 옹호가, 특유의 농담, 그리고 철학적 비유와 함께 버무려지면, 짜잔, 하고 김연수 스타일의 세계가 생겨난다. 이 곳에 낭만과 유머가 있다. 진짜로 존재한다면 진지하게 이민을 고려할 것이다.


김연수 작가의 유머를 적극 지지한다. 소설 안에서 잽을 날리 듯 쏟아지는, 뭔가 약간은 흐드러진 농담들에 웃어버렸다는 것을 인정한다. 얼마나 많은 사람들이 동의할지는 몰라도, 나에겐 가장 유머러스한 작가 중 한사람이다. 깊고 진지한 목소리를 가진 작가이지만 가끔은 이런, 작가 자신만의 유머가 있는 이야기도 많이 써주시면 참 좋겠다.


2016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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웬만해선 아무렇지 않다 마음산책 짧은 소설
이기호 지음, 박선경 그림 / 마음산책 / 2016년 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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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이를 된장에 콕 찍어먹는 것 같다. 호흡이 긴 소설을 재료 준비와 충분한 시간이 드는 찌개나 탕 같은 요리라고 한다면, 이 책은 꼭 오이같다. 간편하고 상큼하다. 그러면서 아삭아삭 생기가 있다.

단편이라고 하기에도 멋쩍은 두세장 짜리 짧은 이야기들이 40편 들어있는데, 아무리 짧다고 해도 모두 다른 마흔가지의 이야기를 생각해내는 일은 결코 쉽지 않을 것 같아 새삼 소설가는 대단해, 감탄했다. 교훈이 직접 읽는이의 정중앙에 꽂히는, 다소 부담스러운 이야기들도 있었지만... 확실히 재미가 있어서 술술 읽힌다. 좋았던 이야기들을 나열해보자면,


타인 바이러스 - 반전이 기가 막히다.
비치보이스 - 잔인한 여름 잔인한 청춘
도망자 - 남자에게 와이프란 존재는...
두고 봐라 - 현실은 언제나 덜 낭만적이다.
초간단 또띠아 토스트 레시피 - 나에겐 초간단하지 않은 일.
봄비 - 아름답다 아아아 정말로.
입동전후 - 아가씨도 한 잔 마셔, 에서 뿜었다.


유쾌하고 즐겁고 좋다.


2016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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보건교사 안은영 오늘의 젊은 작가 9
정세랑 지음 / 민음사 / 2015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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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귀엽고 명랑한 양호선생님의 히어로물을 정말 즐겁게 읽었다. 어떤 내용인지에 대한 사전지식이 전혀 없었기 때문에 이런 오컬트라고 해야할지, 토테미즘이라 해야할지, 코믹미스테리라 해야할지 모르겠는 이야기가 더욱 재미있었던 것 같다. 뭔가 시원한 사이다를 마신 것처럼 상쾌하고 시원한 느낌이 든다. 특히 주고받는 대화들이 얼마나 맛깔나게 쓰여있는지, 황당한 설정과 전개에도 불구하고, 작가의 유머러스하고 노련한 대화술 안에서는 묘하게 설득력을 갖고 마는 것이었다.


소설의 전반적인 스토리는 아예 대놓고 일차원적인 장르물의 설정을 따르고 있다. 해로운 기운을 장난감 무기로 해치우거나 적을 딱밤으로 기절시킨다던지, 주인공의 기운이 떨어지면 큰 기운을 가진 상대남의 손을 잡아 충전을 한다던가 하는 설정은 소설이라기보다 어린이를 겨냥한 명랑만화같다. 그럼에도 이러한 설정이 단순히 유치하다기보다 무척 재치있다고 느껴지는 것은, 이 둥글고 부드러운 이야기 안에 상당히 날카로운 풍자들이 들어있기 때문일 것이다.


세상이 이렇게 분명하다면 얼마나 좋을까?

옳은 것들만 남고, 옳지 않은 것은 사라지는 세상이라면...


안은영을 국회로!

책을 덮는 순간 생각했다. 이 장난감칼과 비비탄총만으로 온갖 해악한 것들을 무찌르는 정의의 여신을 국회로 보낼 수 있다면, 그들이 뿜어대는 모든 사악한 기운과 날카로운 이기심들을 촥촥 잘라 없애버릴 수 있다면, 사명감은 없고 탐욕을 독처럼 뿌리는 거짓 정치인들의 겨드랑이 털을 영원히 묶어버릴 수 있다면, 우리는 좀 더 나은 세상에서 살 수 있지 않을까...!!!



역시 이번에도 후회없는 오늘의 젊은작가 시리즈이다.



2016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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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의 기원
정유정 지음 / 은행나무 / 2016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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단단하고 뿌리깊은 악에 필사적으로 대항하던 그간의 소설들은 펄펄 뜨거운 느낌이었는데, 이번 이야기는 좀 다르다. 심장 박동이 느려지고 체온이 내려가고 감각이 곤두서면서 시작되는 주인공의 사냥을 따라가며 나도 같이 피가 식는 느낌을 받았다. 분명 사회적 관점에서 볼 때엔 용서받을 수 없는 惡이지만, 화자가 '나'인 1인칭 시점으로 이야기를 헤집어 나가다 보면 어느덧 나또한 주인공과 같이 무고한 여성의 뒤를 숨죽여 밟고 있는 것이다. 그러다 누군가 방문이라도 슬그머니 열라치면, 얼른 막아! 랄지, 도망가! 하고는 스스로 깜짝 놀라고 만다...... 1인칭 시점의 함정이다. 얼마나 극악한 존재이든간에 일단 들키지 않았으면 싶어서 심장이 조여진다. 특히 밤 중에 여자를 쫓아갈 때, 여자 입장에서 이 사이코패스에게 부디 희생되지 않기를 하고 바라면서도, 조심조심 따라가다가 뒤를 돌아보는 순간이 되면 나도 모르게 범죄자의 입장에서 들켰다! 하면서 심장이 덜컥 내려앉아 버린다.



사이코패스 중에서도 최상위 레벨이라는 프레데터, 즉 포식자의 눈으로 바라보는 세상은 어떤 모습일까. 주인공이 사람이 죽는 것에 아무런 감정을 느끼지 못하고, 타인의 겁먹은 모습에 모종의 성적 쾌감을 느끼는 장면은 소름이 돋는다. 겉으로 봤을 때 주인공은 수영선수 출신의 강인한 체력에 로스쿨에 합격할 정도로 비상한 머리를 가지고 있다. 만약 인간이라는 종이 우수한, 그러니까 도덕성이나 윤리 같은 만들어진 관념들은 모두 버리고 오직 생존에 더 적합한 성질만을 가지고 진화한다면 이 사이코 패스의 유전자가 다른 어떤 평범한 유전자보다 살아남을 확률이 높을 것이다. 이야기의 결말도 그런 식으로 끝나게 되고.


중간에 일기 형식으로 들어있는 어머니의 이야기에서, 자식을 사랑하는 마음과 자식이 갖고 있는 큰 어둠을 두려워하는 양가적인 마음사이에서 괴로워하는 모습은  '다섯째 아이'나 '케빈에 대하여'를 떠올리게 한다. 아마 관점을 바꿔 어머니의 입장으로 썼다면 상당히 유사한 소설이 나왔을 것 같다. 그리고 그 근원과 깊이를 제대로 파악할 수 없다는 점에서, 그렇다고 자식이기에 포기할 수도 없다는 점에서 어머니의 관점에서 보는 악마성을 지닌 자식에 대한 이야기들이 훨씬 끔찍하게 느껴졌었다.


그러니까 사실은, 약간 아쉽다. 작가의 섬세한 장면묘사에 비해 주인공의 내면은, 스스로 사이코 패스로서 겪는 부조리하고 극악한 심리의 표현보다는, 어떤 조짐을 예감하고 자신을 통제하던 주변 사람들에 대한 분노섞인 리액션에 더 치중되어 있다는 느낌이다. 좀더 세고 좀더 날카롭고 좀더 끔찍해야 할 것 같은데 뭔가 더 나와줘도 받아들일 수 있었을 텐데... 최상위 사이코패스라는 설정에 비해 다소 젠틀한 모습같다는 생각이 든다. 아무래도 가족이 많이 나와서인듯 한데, 그런 의미로 2부가 나와도 재미있지 않을까 싶다.


책을 상당히 천천히 보는 편인데, 가독성은 정말 최고다. 7-8시간 정도면 다 읽을 수 있다.

다음 책은 또 언제 나오려나.



2016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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목련정전
최은미 지음 / 문학과지성사 / 2015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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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쩐지 낭만스러운 느낌이 나는 제목과 산뜻한 산호색 표지만 보고는 이 책의 내용을 가늠하기는 힘들 것이다. 이렇게 예쁜 포장지로 감싸인 지옥이라니. 삶의 빛이 닿지 않는 곳에서 은밀하지만 맹렬히 썩어가는 상처를 들추는 것 같은 이야기들이다. 확실히 그로테스크한 면이 있지만, 분위기가 사뭇 고요하달까, 동양적이면서 은근해서 스티븐킹의 소설만큼 괴롭지는 않다. 솔직히 말하자면 꽤나 즐겁게 읽었다.


인간이란 참으로 훌륭히 자신만의 지옥을 제 손으로 지으며 사는 동물이 아닐까. 책을 덮으면서 그런 생각이 들었다. 삶의 괴로움에서 태어난 욕망이 타인을 가리는 순간, 지옥은 저절로 모양을 갖추어간다. 자신이 제 손으로 공들여 만들고 있는 것이 지옥인 줄도 모르고. 그라목손을 이용한 자살이 끔찍한 것은 내장이 녹아내리는 데도 의식은 멀쩡해서 모든 고통을 오롯이 느끼다가 천천히 죽는다는 점에 있고, 삶 속에 혼재하는 지옥이 끔찍한 것은 그 겉면이 그 누구도 알아채지 못할만큼 평범하고 일상적이라는 점에 있다. 오로지 나 자신만이 나의 고통의 목격자라는 것은 무척 외롭고 슬픈 일이다.



2016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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