센티멘털도 하루 이틀
김금희 지음 / 창비 / 2014년 3월
평점 :
구판절판


김금희 작가의 작품들은 재치가 있고 감각적이며, 유머와 자조를 적절히 배합하면서 경쾌한 리듬을 만들어 낸다. 진지한 것을 '오글거린다'고 느끼는 사람들에게조차 작가의 작품들은 설득력이 있을 것이다. 작가는 설명하기보다 보여줌으로써 '오글거리는' 사유를 대신하고, 독자는 작가의 유머러스한 세계 안에서 이상하게 감동같은 것을 받을 것이다. 요즘 세대가 진지한 철학적 사유를 이해하지 못한다는 뜻은 아니다. 물론 국영수 중심의 입시교육...같은 이유로 그런 것들에 대해 제대로 이해하게 될 기회가 무척 적었던 것은 사실이지만, 그런 것은 배워서 생기고 못배워서 없어지는 것은 아니라고 생각한다. 그야말로 실존의 핵심이기 때문에. 다만 이제 조금 다른 모양으로써 우리들 안에 남아 있는 것이고, 작가는 모양이 바뀐 그것을 제대로 이해하고 건드릴 줄 아는 것 같다. 좀 거창하게 말하면, 새로운 세대의 새로운 작가라고나 할까.


이 책에선 이런 작가의 장점들이 아직은, 조금은 분주하게 느껴진다. 앞으로 달려나간다기보다는 한 지점을 배회하는 느낌이랄까. 아마도 멀리뛰기 전 작가의 준비운동 쯤으로 볼 수 있을 것 같다. 「너무 한낮의 연애 」만큼의 감격적인 한방은 아니었지만, 그럼에도 불쑥불쑥 드러나는 작가 고유의 세상을 바라보는 시선에, 냉소적인데 이상하게 따뜻한 그 시선에, 적극적으로 동의하게 된다. 앞으로의 책들이 벌써부터 기다려진다.


 


 아버지는 공연장 밖에 없었다. 놓쳤다고 생각했을 때, 맞은편에서 자전거가 나타났다. 도로를 사이에 두고 우리는 같은 거리를 밀며 걸었다. 밴댕이 횟집이 몰려 있는 곳에서도 공연 중이었다. 탱크톱과 짧은 치마로 여장을 한 남자가 "어머님, 아버님들 청춘을 확실히 돌려드릴게"하며 노래를 시작했을 때 나는 정류장으로 향했다.

 청추우운을 돌려다오, 젊음을 다오, 흐르는 내 인생에 애원이란다. 아버지는 도로를 가로지르지 않았다. 못다 한 그 사랑도 태산 같은데, 가는 세월 잡을 수는 없지 않느냐. 그렇다고 먼저 사라지지도 않았다. 청추우우운아 내 청추운아, 어...딜....갔느냐. 정류장에 도착해서도 아버지는 맞은편에서 줄곧 나를 지켜보고 서 있었다. 버스 두대가 먼지를 몰고 정류장으로 들어와 사라지는 동안에도 우리 간격은 그만큼이었다. 나는 세번째 도착한 버스를 행선지도 확인하지 않은 채 올라탔다. 걸어오는 내내 아버지가 묵직하게 밀어냈던 것은 자전거가 아니라 나였다.

p.56 「너의 도큐먼트」


 다시 학원에 등록했지만 병원 앞을 서성이면서 더 많은 시간을 보냈다. 오느날은 한강 둔치의 볕이 너무 따뜻해서, 어느날은 길고양이가 내 손을 핥아서, 어느날은 좋아하던 가수가 세상을 떠나서...... 결국 아무것도 하지 못했다. 수업시간에는 종이 위를 경쾌하게 흐르던 여자의 글씨를 연습했다. 글씨체는 엇비슷했지만 그전과 같은 감동은 느껴지지 않았다.

 이러다 인생이 망하겠다 싶어서 병원으로 발을 들여놓기도 했다. 프린터의 롤러 자국이 선명한 수술동의서에는 '자궁 천공' '흡인성 폐렴' '출혈'을 경고하는 문구가 적혀 있었다. 동의서에 연달아 동그라미를 쳤지만 그때마다 물수제비처럼 마음을 건너가는 슬픔이 문제였다. 나는 최대한 냉정하게 주민등록번호를 적었지만 끝내 서명자란에 싸인을 마치지 못하고 나왔다.

 병원 홈페이지에서 받아본 초음파 사진에는 그러데이션으로 펼쳐진 어둠이 있을 뿐 아무것도 보이지 않았다. 심장마저 아주 진한 어둠으로 나타나 있었다. 너무 짙어서 텅 비어 있는 듯한 어둠이었다. 나는 손가락으로 휴대전화의 창을 이리저리 흠들었다. 어딘가를 가리키는 화살표만 아니라면 거기에 무엇이 있는지 전혀 알 수 없었다. 그것이 바로 내 몸이라는 건 더더욱. 삭제 버튼을 누르자 사진은 순식간에 사라졌다. 하지만 언제든 다시 불러낼 수 있었다. 그것은 간단한 일이었다.

p.74 「센티멘털도 하루이틀」



 밤에도 소리가 있다고 믿은 적이 있다. 밤에는 낮보다 소리가 더 잘 들리고 실제로도 멀리 퍼져나가지만, 그런 것 말고 밤 자체가 내는 소리 말이다. 그건 청각이 아니라 촉각에 가깝기도 하다. 창막이 걷히면서 대기가 투명하게 열리는 느낌 아무도 없는 곳에 서있다가 문득 느껴지는 인기척, 잠을 이루지 못해 뒤척이면서 떠올리는 모든 사람과 사물들의 -하지만 실제로는 그것들이 전혀 내지 않는- 어떤 소리들. 그녀가 그런 소리들에 대해 생각하게 된건 어려서부터 혼자 자야 했기 때문일 것이었다. 그때는 '낙원모사'가 꽤 장사가 잘돼서 지금 이 집의 위층까지 빌려 썼는데, 그녀의 방은 현관에서 멀리 떨어진 이층 한구석에 있었다. 할머니는 그녀의 방을 잘 들여다보지 않았고, 할머니가 있든 없든 집은 아주 조용했다. 그래서 그녀는 이웃집이나 동네 어딘가에서 들리는 소리들에 귀 기울이면서 집 안의 괴괴한 침묵을 이겨보려고 애썼다. 하지만 그것도 밤이 깊어지면 모두 그치고 이제 밤의 소리, 정말 밤이 내는 소리들에 위로를 받아야 하는 순간이 오는 것이었다. 그리고 그렇게 생각하고 귀 기울이면 손바닥을 맞부딪치지 않고 누군가 연신 박수를 치는 것 같은 미미한 기척들이 느껴지고. 하지만 지금은 텔레비전을 보거나 휴대전화로 게임을 하며 잠들 수 없는 밤을 견딘다.

p.90-91 「집으로 돌아오는 밤」 



 아버지는 장군이 쫓겨난 건 정치인과 교수들에게 밉보였기 때문이라고 했다. 배운 놈들은 어딜 가나 대접받으려고 하는데 장군에게는 안 통했다는 거였다. "아주 공평무사하셨지." 처음 재단 건물을 세울 때 장군이 직접 포클레인을 몰았다든가, 뒷돈을 요구하는 실세들에게 조인트를 깠다든가, 재래식 화장실을 쓰던 시절에는 선생들도 예외 없이 똥지게를 졌다든가, 참전 경험이 고등학교 졸업장보다 못할 것이 없다며 학력 미달인 아버지를 직원으로 뽑았다든가 하는 것이 그 증거였다. 마지막 대목을 이야기하면서 아버지는 슬쩍 목이 멨다.

사실이기야 하겠지만 뭐랄까, 아버지 말은 철 지난 유행어처럼 핀트가 안맞는 느낌이었다. 아버지가 항로에서 자꾸 벗어나는 건 좌표를 읽지 못해서가 아니라 너무 낡은 나침반을 쥔 탓이 아닐가.

 아버지가 택시를 칠십계단에 세우고 우리를 데리고 올라갔다. 그리고 줄넘기를 건넸다. 도시 전경이 훤히 내려다보이고 맞은편 산 정상의 허니문 카도 손에 닿을 듯 가까웠다. "사람은 늘 바람 부는 쪽으로 가슴을 내밀어야 한다." 아버지는 팔을 한껏 벌리고 가슴을 펴라고 했다. 야생에서도 사자나 호랑이 같은 포식자들은 언제나 바람을 안은 채 위풍당당 사냥에 나선다. 작은 바람에도 떨며 킁킁 냄새나 맡아서는 평생 먹잇감 신세를 못 면한다. 우리는 행인들 눈치를 보며 따라하는 체하다가 곧장 줄넘기를 시작했다. 아버지는 맨손체조를 하며 우리를 독려했지만 일부러 그러는지 정말 운동신경이 없는 건지 오빠는 자꾸 넘어졌다. 그때마다 사수생은 뭐든 남들보다 네배를 더 해야 한다며 아버지는 오빠를 다그쳤다.

 p.197-198 「장글숲을 헤쳐서 가면」

 

 

2016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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