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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학이론입문 창비신서 74
테리 이글턴 지음, 김명환, 장남수, 정남영 옮김 / 창비 / 1989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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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치 고향을 내려가는 것처럼 언제나 어느 이론에 대해 의문이 있을 때나 글읽기에 대한 식상이 들 때 언제나 이 책을 읽는다. 참으로 방만한 내용을 담고 있지만 흘러 넘기는 법 없이 어디서나 정확하게 여러 이론들이 소개되어짐에 신선한 충격을 받고 자신을 되돌아보게 한다.

이 책에서는 19세기에서부터 들어와 발흥된 이론들 즉 해석학이나 현상학, 형식주의, 수용이론, 정신분석학, 구조주의와 레이몬드 윌리암즈의 최신 이론들을 오해되어짐이나 비약없이 차분히 소개 하고 있다.

문학이 신비평이나 구조주의 비평에서와 같이 그 고유의 영역을 갖기 위해 노력했다 할지라고 언제나 사회와 역사속의 관련속에 존재하고 있었고, 문학이론이란 영역은 궁극적으로 정치적 비평의 성격을 띠지 않을 수 없다.

여기서 이 책의 장점을 볼 수가 있는데, 예를 들어 기호학이란 부분에 대해 이글턴은 단편적으로 소쉬르에서 부터 기원한 것이나 기표나 기의의 흐름, 기호학적 훈련이라는 단순한 롤랑바르트의에 대한 개론에 머물지 않는다. 그들의 후계자로서 크리스테바나 그레마스 등이 가지는 사회적이고 역사적인 의미탐구의 고리들을 설명하고 여성운동에 대해서도 문학이론의 대상으로서 진지한 숙고를 요구하는 것이다.

단순히 문학에만 한정되지 않고 철학, 사회학, 심리학에 결쳐진 이글턴의 해설과 비판은 궁극적으로 인간에 대한 이해와 해방이라는 실천적 과제의 문제를 다시금 생각하게 해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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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49호 품목의 경매 - 오늘의 세계문학 14
토머스 핀천 지음, 김성곤 옮김 / 지학사(참고서) / 1994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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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책의 뒷편에 실린 단편 '엔트로피'에서는 두가지 이야기가 동시에 전개된다. 하나는 유명한 실제 재즈 연주가인 '미트볼'의 이사 파티에서 일어나는 상황과 죽어가는 새를 다시 살리기 위해 노력하는 '캘리스토'에 대한 것이다.

캘리스토는 대학시절에 배운 열역학 법칙에 대한 것이 우주나 엔진뿐만 아니라 인간, 문화 등등 에까지 확장 되어질 수 있음을 깨닫고는 '자신이 지금까지 배워온 모든 것들을 본질적으로 재평가 할 수밖에 없었다.' 하지만 그가 듣고 있는 얼 보스틱의 음악소리 처럼 그녀가 내는 목소리가 자동차의 소음이 내는 '불연속의 무질서와 의미없는 기호 같은'것을 재조정하는 것처럼 그의 체온이 그가 손안에 품고 있는 새에게도 전달 될 수 있으리라는 희망을 갖고 엔트로피의 법칙에 대항하고 있는 것이다.

그럼 두가지 이야기는 어떻게 연결되고 있는가? 먼저 사건이 같은 아파트에서 일어나고 있음을 작가는 암시한다.

< 그 음악은 -서로 소음의 첨단과 반곡으로 절정을 이루는 아래층 파티의 즉흥적인 불협화음과 둔주곡풍으로 경쟁하는 질서의 아라비아 풍의 음악은 - 서로 엉켜진 창문 장식을 통해 솟아 나오고 있었다.>

또 소설의 후반부에 가서 파티에서 일어난 소동을 미트볼이 정리하는 장면은 마치 과학자 맥스웰이 주장한 '도깨비가 있어 평형상태를 다시 분류'하듯이 완전한 혼란으로부터 그의 파티를 다시 질서 있게 다시 만드는 것이다. 하지만 인간의 추상적 관념을 상징하는 이론(음악이 우리들의 마음을 안정시켜주는 것처럼)에서는 그것이 성공할지라도 실제 현실에서는 캘리스토가 품고 있는 새는 결국 죽고 만다. 작가는 여기서 음악이 상징하는 상상적이고 이론적인 질서와 현실에서 일어나고 있는 우리들의 운명을 대비시키고자 하는 것이다.

결국 현대인을 대표하는 캘리스토는 '그들의 각기 다른 인생을 지배하는 이상한 요소들이 영원히 암흑의 으뜸음과 모든 동작의 최후의 부재속으로 환원되는 순간을 기다리고 있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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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인의 별 - 2000년도 제24회 이상문학상 수상작품집
이인화 외 지음 / 문학사상사 / 2000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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평론가 진형준은 이 소설에서의 틀, 즉 고려 충렬왕때의 문인 안현에 대한 역사적 기록과 17세기 필사본의 기록에 적힌 고려인 비칙지에 대한 이야기를 작가가 상상력을 발휘하여, 안현과 비칙지를 동일인으로 상정하고 한 편의 소설로 재구성한 것. 또 이것이 인류의 삶의 원형을 보는 작가의 눈과 결합하여 형식적 겹 외에 역사적 사실과 상상력의 결합, 과거와 현재의 결합, 역사성과 원형성의 결합이라는 여러 겹들을 가지게 된다고 주장하였다.

하지만 그의 평론이 이 소설을 읽으면서 적당하지 않다고 느껴지는 이유는 그러한 겹들을 받쳐줄만한 이인화 작각 자신의 문장력의 부족, 소설적인 치밀한 `거리`감을 창출해 내지 못하는 구성형식의 엉성함에 있다.

예를 들어 안현의 친구가 그의 아내를 설득하기 위해 말하는 대목에서 (...이아치 놈이 성미는 지랄 같습니다만 끗발하나는 죽여주죠...)이나 (몇달이나 궁중에 붙잡혀 있었는데 나도 도끼 몽둥이에 기름칠 좀 하세) (가슴속에 알 수없는 불안이 뭉게뭉게 피어올랐다)와 같은 현재 쓰고 있는 일상 은어들과 상투적 수식이 거침없이 여기저기서 보여짐은 고대 문현의 주석이라는 의미를 퇴색하게 하고도 남음이다.

또 이 소설에서는 몇 가지 심한 비약이 거슬리는데 이아치가 아내를 만나게 되는 것의 우연성과 후반부 아내의 변신에ㅡ대한 서술에서 이미 몽고인의 가족이 되어버린 아내 '아수친'의 말은 개인적인 상황에 그쳐서 정작 주석적(?) 설명으로 평론가 김윤식이 말하는 이 소설의 한 축으로서의 '휴머니즘'으로 끌어올려야 할 대목이 눈에 띄지 않는다. 다시 말하면 개인간의 사랑을 그 거창한 휴머니즘으로 비약시킬 작가의 말을 어디서 찾아볼 수있단 말인가?

순수하게 작품만 보고 얘기 되어질지라도 문학사상사 홈페이지나 여러 언론에서 수없이 거론되고 있는 그 심사경위를 정말 심각하게 의심하게 만드는 책이 아닐 수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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