평론가 진형준은 이 소설에서의 틀, 즉 고려 충렬왕때의 문인 안현에 대한 역사적 기록과 17세기 필사본의 기록에 적힌 고려인 비칙지에 대한 이야기를 작가가 상상력을 발휘하여, 안현과 비칙지를 동일인으로 상정하고 한 편의 소설로 재구성한 것. 또 이것이 인류의 삶의 원형을 보는 작가의 눈과 결합하여 형식적 겹 외에 역사적 사실과 상상력의 결합, 과거와 현재의 결합, 역사성과 원형성의 결합이라는 여러 겹들을 가지게 된다고 주장하였다. 하지만 그의 평론이 이 소설을 읽으면서 적당하지 않다고 느껴지는 이유는 그러한 겹들을 받쳐줄만한 이인화 작각 자신의 문장력의 부족, 소설적인 치밀한 `거리`감을 창출해 내지 못하는 구성형식의 엉성함에 있다. 예를 들어 안현의 친구가 그의 아내를 설득하기 위해 말하는 대목에서 (...이아치 놈이 성미는 지랄 같습니다만 끗발하나는 죽여주죠...)이나 (몇달이나 궁중에 붙잡혀 있었는데 나도 도끼 몽둥이에 기름칠 좀 하세) (가슴속에 알 수없는 불안이 뭉게뭉게 피어올랐다)와 같은 현재 쓰고 있는 일상 은어들과 상투적 수식이 거침없이 여기저기서 보여짐은 고대 문현의 주석이라는 의미를 퇴색하게 하고도 남음이다. 또 이 소설에서는 몇 가지 심한 비약이 거슬리는데 이아치가 아내를 만나게 되는 것의 우연성과 후반부 아내의 변신에ㅡ대한 서술에서 이미 몽고인의 가족이 되어버린 아내 '아수친'의 말은 개인적인 상황에 그쳐서 정작 주석적(?) 설명으로 평론가 김윤식이 말하는 이 소설의 한 축으로서의 '휴머니즘'으로 끌어올려야 할 대목이 눈에 띄지 않는다. 다시 말하면 개인간의 사랑을 그 거창한 휴머니즘으로 비약시킬 작가의 말을 어디서 찾아볼 수있단 말인가? 순수하게 작품만 보고 얘기 되어질지라도 문학사상사 홈페이지나 여러 언론에서 수없이 거론되고 있는 그 심사경위를 정말 심각하게 의심하게 만드는 책이 아닐 수 없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