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 시대의 선비 안대회에게 홀리다. 옛 글을 읽는다는 것은 오늘을 사는 이에게 어떤 의미일까? 이에 대해 연암 박지원은 “….. 상대의 비위를 맞추는 말을 구차하게 해야 하거나, 억지로 상대의 행동을 똑같이 따라해야 한다면, 차라리 천 년 전 옛사람을 친구로 삼든가 일백 세대 뒤에 태어날 사람과 마음이 통하기를 기다리는 편이 나을 것입니다.” 라고 털어놓는다. 벗을 만나 비위를 맞추는 말이나 구차하게 늘어놓고 상대방의 행동을 억지로 똑같이 따라 해야 한다면, 차라리 책을 통해 천년 전의 벗과 사귀어 보라는 것이다. 다산 정약용은 200년 전 사람인 퇴계 이황을 흠모하여 날마다 아침 일찍 일어나 퇴계의 편지 글 한편을 읽고 그 독후감을 써서 모아두었다. 성급하게 글을 쓰고 남에게 알려지기를 바라는 자신의 성향을 퇴계의 편지 글을 읽고서 반성하게 된다. 수 백 년의 시간을 초월해 옛 스승이 남겨놓은 편지를 읽으며 마치 친절한 가르침을 직접 받는 듯한 느낌을 가질 수가 있었다. 200년 전의 스승에게서 잘 배운 제자라 하겠다. 옛 선비의 글은 우리에게 스승이 되기도 하고 친구가 되기도 한다. 또 시대를 초월하는 뭉클한 감동을 선사하기도 한다. 가인 계섬이 그의 재주를 알고 키워준 이정보의 무덤 앞에서 춤을 추는 장면은 쉽게 잊혀지지 않는다. 선비들의 다양한 삶의 향기를 느낄 수 있게 해준 저자 안대회를 이시대의 진정한 선비로 칭하고 싶다. 스스로를 好古癖이 있는 사람이라 했는데, 방대하게 언급된 분야와 서책들을 언제 읽고 추려 구슬을 명주실에 꿰어 보화를 만들어내듯이 하였을까? 머리말에서도 밝혔듯이 미리 주제를 정하고 대상을 찾는 것이 아니라 옛 글을 읽다가 선비 특유의 모습과 흥미로운 사유의 자취를 찾게 되면 메모하고 글을 썼다고 한다. 이런 식의 글쓰기가 얼마다 방대한 분량과 시간을 투자해야 하는지 짐작이 간다. 옛 글에 대한 애정이 없다면 애초부터 나올 수 없는 책이다. 이런 저자의 노력이야말로 가장 선비다운 모습이 아닐까? 수많은 책과 정보의 홍수 속에서 좋은 책을 찾아 읽을 수 있는 기회는 오히려 줄어들고 있을 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든다. 그래서 저자의 다음 번 저작이 더 기대가 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