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리스 비극은 개인의 몰락을 그리는 동시에, 공동체 전체의 상실과 애도를 그리는 장르다. 죽음은 단지 한 사람의 운명으로 머물지 않고, 살아남은 자들의 고통과 공동체의 균열로 확장된다.이러한 특징은 1장, 『페르시아인』에서 강하게 드러난다. 아이스퀼로스는 승자의 입장이 아니라, 전쟁에서 패한 타자의 목소리를 통해 비극의 본질을 묻는다.
페르시아의 땅, 아니 어머니 아시아의 땅이 낳고 길러낸 “꽃”(anthos, 59-62행)인 전사들이 전장으로 떠난 뒤 “아시아 전체……가 슬픔에 젖어 그들을 그리워하며, 부모들과 아내들은 그들이 돌아올 날을 손꼽아 기다리면서 자꾸만 늦어지는 귀환에 몸을 떨고 있다.”(58-64행).
그리스에서 죽은 페르시아 전사들이 파도에 찢긴 채 “… 바다의 소리 없는 자식들”인 고기떼들의 밥이 되었다.
살아 있는 자들의 상실의 슬픔을 전하며, 이 비극에서 파멸하는 것은 크세르크세스 개인이 아니라 ‘아시아’라는 공동체 전체다.
그래서 코로스는 크세르크세스의 패배가 아닌, 전 아시아의 전사들과 그들의 죽음을 함께 애도한다.
살아 있는 모든 존재, 모든 사물의 덧없음, 그리고 그 덧없음의 “운명”에 크게 슬퍼하면서 프로이트는 이 사실이 고통스럽다 할지라도 이 고통스럽다는 것이야말로 진정 “진실”이 아니냐고 말했다.(Sigmund Freud, “On Transience”, The Standard Edition of the Complete Psychological Works of Sigmund Freud, James Strachey 편역(London:Hogarth Pr., 1953~74), 14:305쪽.)
가장 고통스러운 것이야말로 가장 진실한 것일지도 모른다. 모든 존재의 덧없음, 덧없음의 운명은 그 자체로 고통이면서 동시에 진실이다. 그러한 고통의 진실에 과연 어떤 도 다른 진실이 개입될 수 있는가.
갈기갈기 찢긴 옷을 걸친 크세르크세스는 우리에게 말한다. 고통스러운 것이야말로 가장 진실한 것이라고.
지금껏 제국의 주체들이 일으킨 수많은 전쟁은 우리에게 크세르크세스의 옷처럼 찢긴 역사, 고통의 역사 외에 무엇을 남겼는가.
죽은 자는 말이 없고 산 자는 통곡뿐인, 죽은 자의 침묵과 산 자의 통곡이 고통의 불협화음을 만들어내는 이 역사의 현장에서, 아이스퀼로스는 그러한 고통을 애도하는 시선으로 우리를 이끈다.
여기서 알 수 있듯이, 저자의 문체가 이 그리스 비극을 이해하는 데 큰 역할을 하고 있다. 쉽고, 흥미롭고, 문장이 아름답다. 저자는 서문에서 문학의 역할은, "전쟁 · 폭력 · 억압으로 인해 삶이 산산이 부서진 채 죽어간 수많은 시대의 희생자, 삶이라는 허무의 바다에서 허망한 몸부림을 치다 한낱 포말처럼 사라져간 숱한 존재를 망각의 바다에서 끌어올려 그들이 남긴 상처를 어루만져주고, 그들의 죽음을 애도하는 것"이라고 설명한다. 이 책 역시, 문학에 대한 뚜렷한 목적성을 가지고 이를 감성적인 문체로 그려내는 책이다. 읽으면서 비극의 내용 자체에 놀라기도 하고, 이를 해석하는 연구들과 저자의 생각에 감탄하고, 몇몇 문장에 감탄했다.
다만, 나는 사실 개인적으로 담백한 문장들을 선호하는 편이라서 반복되는 감성적인 문장들이 피로하게 느껴지는 순간들도 있었다. (아름다운 문장 사이에 쿨타임이 필요하다고 생각하는 편이다.) 그럼에도 이토록 명쾌하게 그리스 비극 전체를 조망하는 책이 드물다는 것을 알고 있기 때문에, 또 학문에 대한, 그리스 비극에 대한 저자의 깊은 정성과 애정이 드러나는 책임이 느껴졌기에 재미있게 읽었다.
고대에는 신화와 역사가 혼재된 시기인 만큼, 그 모호함 속에서 오는 어떤 신비로움이 있다. 우리가 흔히 신화는 많이 읽지만, 비극에 대해서는 큰 관심을 두지 않는 것 같다. '죽은 자들을 식탁에 초대하는 사자'로서, 그리스 비극은 가장 오래된 죽음의 이야기를 통해, 오늘날 우리를 되돌아보게 한다. 그리스 비극을 읽어보고 싶었던 이들뿐만 아니라, 그리스 비극에 대한 학술적인 활용이 필요한 이들에게 추천하고 싶은 책이다.
● 이 책을 읽을 이들에게.
고대사를 알고 있다면 더욱 풍성하게 읽을 수 있겠지만, 그렇지 않더라도 충분히 흥미롭게 따라갈 수 있는 책이다. 전체 분량은 600쪽에 달할 만큼 두껍지만, 각 비극이 평균 50쪽 안팎으로 구성되어 있어 한 편씩 나눠 읽기에도 부담이 없다. 서사와 분석의 균형이 잘 맞아 읽는 내내 호흡이 끊기지 않고 유지된다. 나 역시 그리스 비극을 너무 오래전에 읽은 터라, 기억나는 건 <오레스테이아>나 <오이디푸스 왕>, <안티고네> 정도의 줄거리뿐이었고, 신화와 엮인 맥락은 흐릿하게 남아 있었다. 낯선 단어나 맥락이 나올 때는 찾아보며 읽었는데, 참고할 만한 내용을 공유하고자 한다.
비극의 구성에 대한 내용은 <아리스토텔레스 외, 『시학』 , 천병희, 문예출판사, 2014. 6장, 12장>을 참고했다.
1) 그리스 비극
"고전주의 그리스 비극 또는 좀더 정확하게, 기원전 5세기의 아테나이의 비극으로 일컬어지는 그리스 비극은 매년 디오뉘소스 신을 기리는 축제의 일부로서 아테나이에서 공연되었다".(서론, 19쪽)
(비극을 뜻하는 'tragodia'라는 말은 '상(賞)'으로 내놓은 염소를 얻기 위하여 다투는 노래, 혹은 제물로 바친 염소를 둘러싸고 부르는 노래라는 뜻으로 해석된다- 『시학』 41쪽)
2) 그리스 비극의 구성
"양적인 관점에서 본다면 비극은 프롤로고스(prologos)와 삽화(epeisodion)와 엑소도스(exodos)와 코로스의 노래로 구분되며, 코로스의 노래는 다시 등장가(parodos)와 정립가(stasimon)로 구분된다"( 『시학』 12장. 74쪽)
- 이 책을 읽는 데 이해해야 할 부분은 '코로스' 정도인 것 같다. 아리스토텔레스 시학에서 찾을 수 있는 비극의 구체적인 구성에 대한 설명은 참고하고 싶은 이들을 위해 서평 맨 마지막에 덧붙이겠다.
- 코로스는 같은 옷을 입은 이들이 함께 움직이고 노래를 하면서, 관객들에게 방향성을 제시하는 역할을 한다. 비극이 만들어졌을 무렵에는 코로스의 역할이 절대적이고 대화가 부분이 부차적이었는데, 차츰 개량되면서 배우의 역할이 중심이 되고 코로스의 역할이 부차적인 것이 된다.
3) 지리적 개념
- 읽으면서 헷갈릴 수 있을 만한 부분은 '아시아'의 지역 개념인 것 같다. 어렴풋이 아나톨리아 반도를 소아시아로 불렀다고 알고 있어서, 그렇겠거니 하고 넘어갔다가 다시 찾아봤다. 그리스 비극에서 나오는 아시아는 소아시아(아나톨리아) 서부 지역을 의미한다. 대체로 오늘날의 튀르키에 서부 해안과 그 주변 지역이다. 지금의 리디아, 프리기아, 이오니아 정도가 있다.
* 고대 그리스인들의 세계는 크게 세 지역으로 나뉜다.
1) 유럽: 그리스 본토, 마케도니아, 이탈리아 등
2) 아시아: 소아시아와 그 너머의 동방(지금의 튀르키에 서부에서부터 내륙 동방을 모두 의미한다)
3) 리비아: 아프리카 대륙 북부(이집트, 리비아 등)
4) 표기
이 책은 현대어식 표기보다는, 고대 그리스어 원형 표기를 따르고 있다. Dionysus(디오니소스), 아테네(Athens), 테베(Thebes)처럼 친숙한 영어표기가 아니라, 학술서에서 볼 수 있는, Dionysos / Διόνυσος → 디오뉘소스, Athenai / Ἀθῆναι → 아테나이, Thebai / Θῆβαι → 테바이와 같이 번역하고 있다.
난 페이시스트라토스를 피시스트라토스(Πεισίστρατος)라고 해서 처음에 못알아봤다.
5) 이외 단어
- 토포스(Topos): 관객이 이미 익숙하게 인지하고 있는 정형화된 주제나 장면, 감정 구조를 말하며, 특정 문맥에서 반복적으로 사용되어 강한 의미 효과를 창출하는 장치를 말한다. 운명, 가족, 신, 추방 등 핵심 주제를 둘러싼 상징적 장면이 대표적인 예다.
- 성격비극: 비극적 몰락이 외부 요인(신, 운명)보다는 그의 성격적 결함 혹은 과도한 성향에 기인한다고 보는 비극 유형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