비그포르스, 복지 국가와 잠정적 유토피아 GPE 총서 1
홍기빈 지음 / 책세상 / 2011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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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주차 강의 후기는 저도 생소한 내용이어서 곱씹을 겨를도 없이 내용요약에 머물렀습니다. 홍기빈 선생님은 뜨거운 열정으로 풍부한 지식과 사례를 말씀하시다 보니  강의가 책의 순서대로 진행되고 있지는 않습니다. 필기를 하다보면 말씀을 놓치기도 쉽구요. 그래서 이번에도 전처럼 내용을 요약하려 했으나 좀 시간이 많이 걸려서^^ 오늘은 제 소감 위주로 간략히 쓸까 합니다. 하지만 좀 늦더라도 정리된 글을 다시 올릴 것을 약속드립니다.
 
한국을 대표하는 복지제도는 무엇일까요? 누구 말대로 '가족복지'라 생각됩니다. 우리는 워낙 국가로부터 뭘 받는 게 익숙하지 않습니다. 그대신 부모는 자식 교육비부터 결혼비용(혼수, 집)까지 부담하는 걸 본인들의 역할이라 생각하고 자식은 그 대가로 부모의 노후를 어느 정도 지원(용돈, 병원비)합니다. 그러니 가족외 누구한테 기대지도 않지만  자기보다 못한 약자의 처지를 이해하고 도움을 주는 데에도 인색합니다. 제가 생각하는 대한민국 가족복지시스템의 성공적인 순서도는 이렇습니다. 사교육 ->좋은 학벌(신분)->좋은 직업 -> 경제력, 권력 획득->특권층 진입 -> 안정궤도 진입 ->자식들에게 경험 전수, 물질적인 지원.  
 
스웨덴 사회를 보면서 동시대를 살면서도 같은 시대를 산다고 할 수는 없다는 생각이 듭니다. 비르그스포그가 스웨덴에서 잠정적 유토피아를 듣고 나온 게 1920년대라고 하면 우리사회는 스웨덴보다 최소 100년 뒤쳐졌다고 할 수 있겠죠. 작년에 서울시교육청에서 초등학생들에게 '무상급식'을 한다고 했을 때 서울시, 여당, 청와대 , 주류언론, 심지어 본인 자식이 대상자인 사람들조차  반대를 하지 않았습니까?  지금은 선거를 앞두고 여당에서 고등학교 무상교육까지 얘기가 나오는 것 같던데  궁극적인 복지 좌표, 그림은 있지도 않겠지만 시류에 따라 입장을 바꾸면서도 낯간지러운 줄도 모르는 자들이죠. 설사 복지제도가 어느 정도 시행된다고 해도 그건  표를 얻기 위한 '잠정적 복지'일 뿐이겠죠.
 
좀더 깊게 알아 보고 싶은 건 웨덴에서는 비그포르스의 정책 어떻게 실행 가능했을까 하는 점입니다. 물론 책에서도 비그포르스의 정책에 보수당, 농민당, 자본가 집단이 반대하는 장면이 나오고 '잠정적 유토피아'실현을 위해 애 쓴 정치가인들이 공부하고, 정책 개발하고 반대자을 설득하는 모습이 나옵니다. 하지만 왜 우리 사회는 아직 이런 모습이 보이지 않는지, 그것이 스웨덴과 우리사회가 역사적인 경험에 있어 근원적이 차이가 있기 때문인지, 언제쯤 우리는 이런 정치가와 정책을 볼 수 있을런지 궁금하고 부럽기만 합니다. 
 
스웨덴은 공산주의자, 사회주의 등 극좌파를 비롯해서 사민주의자, 자유주의자, 보수주의자 등 다양한 정치적 스펙트럼을 가진 정치집단이 공존했고 집권을 위해 치열하게 논쟁하고 정책을 통해 경쟁했지만 우리에게는 우파와 싸울 만큼 강력한 좌파는 존재하지 않았다는 생각이 듭니다.  
 
결국 노동자, 농민 등 경제적으로 열악한 자들을 대변해 줄 수 있는 힘 있는 정당이 존재하지 못했고 설사 간혹 있었다 하더라도 너무 쉽게 권력의 유혹에 넘어 갔기에 힘 없고 백없는 서민들은 한정된 파이를 놓고 서로 경쟁하면서 생존을 강구할 수 밖에 없었고 그런 경험이 축적되면서 약자끼리의 연대는 매우 생소한 단어가 되어 버리지 않았나 싶습니다.
 
우리사회에서 상류층의 '오블리스 노블리쥬'가 기대되기 힘든 이유는 그 성공이 나와 가족과의 투자와 노력으로 힘든 경쟁에서 성취한 승리이기 때문에 그 과실을 결코 외부와 나눌 수 없다는 심리가 있기 때문이 아닌가 싶습니다. 경쟁에서 패배한 자들도 자신들은 특권층에 진입하는 데 실패했지만 아들, 딸들은 부모가 못배워서 무시당하고 가난하게 살았던 한을 풀어줬으면 하고 이 뜻을 받들어 자식들도 부모의 대를 이어 끊임없이 사다리 위로만 오르려고만 하기 때문에 자기들과 비슷한 처지에 있는 사람들은 경쟁상대일뿐이지 결코 연대의 대상으로 보이지는 않겠죠. 
 
10년 전에는 결코 상상할 수 없었던 무상급식이 의미가 있는 것은 밥은 돈이 있거나 없거나 같이 나누어 먹어야 한다는 가치를 아이들에게 심어 줄 수 있다는 것이라 생각됩니다. 더 나아가 무상교육, 무상의료 등 확대된 복지정책은 그동안 각개전투로 싸우느라 만성피로에 빠진 구성원들에게 최소한 인간적인 삶을 사회가 책임진다는 사회연대의 경험을 느끼게 해 줄 수 있다는 데 의미가 있다고 여겨집니다.  
 

 

출처 : 독서대학 르네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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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그포르스, 복지 국가와 잠정적 유토피아 GPE 총서 1
홍기빈 지음 / 책세상 / 2011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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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마르크스주의의 성립

(1)아나키즘과 국가 사회주의 사이에서

1890년대 제2인터내셔널이 성립되기 이전 국제혁명운동에서는 바쿠닌의 초기 아니키즘, 라살레의 국가 사회주의가 마르크스주의보다 큰 영향력을 발휘함. 마르크스주의는 아나키즘과 국가 사회주의라는 서로 정반대에 위치한 두 개의 사상운동을 경쟁자로 하여 이들을 극복하는 과정에서 형성되었음.

 

바쿠닌의 아나키즘은 혁명의 주체로 도시노동자, 농민, 도시 빈민 등이 포함했으며 이들의 혁명적 봉기를 통해 모든 권위체계-자본, 국가, 종교-를 철폐하는 것을 이상으로 삼고 있음. 그 일이 실현된 뒤에는 선장 없이도 잘 가는 배와 같이 자율적이고 인간적인 사회질서가 생겨날 것임. 따라서 혁명 운동이 정당의 형태를 취하는 것도 거부했고, ‘과학적이론으로 무장한 엘리트들이 지도부를 구성하는 것도 반대했음.

 

라살레의 국가사회주의는 아나키즘과 정반대되는 입장으로 부르주아들에게 맞서 노동계급이 사회주의를 얻어내기 위해서는 강력한 국가의 힘을 활용해야 하며 이를 위해 국가에 두 가지 조건을 요구함. 첫째, 노동자들에게 보편적인 선거권을 부여할 것. 둘째, 무기력한 야경국가 夜警國家를 포기하고 경제영역에서 노동자들을 보호하는 적극적인 정책을 펼 것.

 

마르크스주의는 아래로부터의 혁명적 봉기를 통해 자본과 국가 등의 현존 사회 기구를 철폐한다는 아나키즘의 전망을 공유했지만, 또 동시에 무모한 직접 행동을 삼가고 지도부의 과학적지도에 따른 일사불란한 행동을 통해서 국가권력을 장악하고 이를 다시 사회주의 건설의 도구로 활용한다는 라살레의 비전 또한 공유함.

현실에서 자본주의, 국가, 종교는 역사 속에서 출현할 수 밖에 없는 이유를 과학적으로 해명하면 그것들이 소멸할 역사적 계기와 이유도 해명할 수 있음. 사회주의를 가져올 수 있는 주체는 오직 노동계급인데, 이들을 과학적인 능력을 가진 지도부 아래 정당으로 조직하는 것이 제1인터내셜널의 과제임. 이 정당은 바쿠닌 집단과 달리 현존지배체제를 즉각적으로 파괴하는 것을 목표로 삼지 않으며 프롤레타리아 독재를 사적 소유를 철폐해야 함. 따라서 이 정당은 노동계급이 권력을 장악할 수 있는 세력으로 성장하는 데 도움이 되는 각종 개량적조치 도 마다하지 않음.

 

(2)2인터내셔널의 마르크스주의 노선

역사상 존재했던 모든 사회는 그 사회가 가진 기술적 생산력에 의해 기본적으로 형태가 결정되며 이에 조응하는 생산관계-직접적으로 노동을 수행하는 이들과 그 노동 생산물의 잉여 부분을 수취하는 자들 간의 계급적 관계-가 나타나며 생산력과 생산관계의 종합으로 생산되는 생산양식을 기초로 국가, , 제도, 종교, 윤리 등의 관념 형태-상부구조-이 생겨나 사회적 구성체를 이룸.

이러한 사회구성체는 생산력이 발전해 생산관계에 긴장이 생겨나고 그 긴장을 추동하는 새로운 계급이 출현하면서 위기에 처하게 됨. 새로운 생산력에 조응하지 못사는 생산관계뿐만 아니라 그 위의 상부 구조 일반이 아래로부터의 생산력의 발전, 그리고 이에 따라 나타나는 새로운 계급의 역동성 때문에 모순에 처하게 되고, 결국 새로운 계급이 주체가 되어 새로운 생산력에 조응하는 생산관계, 나아가 상부 구조 일반의 형태를 만들어나감으로써 역사적 발전 단계의 들어서게 된다(역사적 유물론 material conception of history). 이러한 사회적 모순을 해결할 대안은 더 높은 생산력을 담보할 수 있는 생산 관계와 상부 구조를 갖춘 사회구성체, 즉 사회주의뿐이요, 이러한사회를 건설할 수 있는 대안세력은 오직 노동계급뿐임. 따라서 사회주의 건설에 필요한 두가지 필수조건은 첫째, 사회주의적 의식으로 무장한 강력한 노동 운동 및 사회주의 정당, 둘째, 높은 수준의 생산력임.

 

2.마르크스주의의 위기

(1)필연인가 자유인가 라브리올라와 크로체

라브리올라 : 마르크스주의의 핵심은 자본주의라는 주어진 조건속에서 어떻게 그것을 극복하는 사회를 만들 것인가를 고민하는 노동계급의 의지와 실천에서 사회주의 운동의 근거를 찾는데 있으며, 역사적 유물론이나 정치경제학은 그렇게 스스로 해방시키고자 하는 이들이 자신들의 주어진 조건을 과학적으로 파악하기 위한 수단, 즉 연구계획에 불과하다고 보았는데 철학적으로 자유/필연의 문제와 닿아 있을 뿐만아니라 운동 이념의 차원에서는 대중적 설득의 근거를 객관적 과학에서 찾아야 하는가 아니면 사람들 마음속의 윤리적 도덕적 결단에서 찾아야 하는가의 문제와 닿아 있음. 크로체의 비판 : 역사적 유물론과 정치경제학은 과학인 아닌 역사와 경제를 바라보는 하나의 도구에 불과하다는 말인가?

크로체 : 마르크스주의의 역사관과 정치경제학은 사람들을 선동하고 자극하는 하나의 신화이며 그런 의미에서 마르크스는 노동 계급의 마키아벨리. 소위 과학적 사회주의의 이론적 공백을 드러내었음.

 

(2)수정주의 논쟁 마르크스주의는 정말 과학안가?

●베른슈타인 : ‘혁명주의의 수사학을 걷어 치우고 의회에서의 다수 석 점유를 통한 권력 장악과 각종 제도 및 입법 개혁을 통한 현실 개혁에 이론과 실천을 집중하자고 호소함. 요컨대 마르크스주의는 더 이상 과학적 사회주의가 아니라는 것임. 자본의 지속적 독점화로 중간 계급이 소멸하면서 노동 계급이 급증할 것이라는 전망은 전혀 현실화되지 않고 있으며 노동 계급의 실질임금이 저하하면서 궁핍화가 진행되기는커녕 실질 임금은 꾸준히 상승하고 있음.

→ 카우츠키, 룩셈부르크의 비판 : 너는 마르크스주의를 배반했다.

→ 레닌의 비판 : 마르크스주의의 과학성이 부족해서가 아니라 자본의 세계 진출로 야기된 ‘’제국주의라는 세계 자본주의의 새로운 구조 때문이다.

 

이렇게 전면화된 마르크스주의의 위기앞에서, 1차 세계대전을 전후해 마르크스주의적 사회주의 운동은 세 갈래로 나누어짐.

 

3.마르크스주의의 해체

(1)볼셰비즘

레닌이 이끄는 러시아 볼셰비키는 제3인터내셔널, 즉 공산주의 인터내셔널(코민테른)을 결성함.

제국주의 덕분에 자본은 위기와 공항으로 치달을 수 밖에 없는 스스로의 모순을 식민지로 전가해 생존을 이어갈 수 있었고 그렇게 해서 생겨난 경제적 여유분으로 노동 운동 상층의 지도부를 매수해 노동 귀족을 만들어 냈음. 이렇게 자본주의가 세계적 체제로 전환된 이상 혁명은 영국이나 독일 같은 선진 자본주의 국가에서 일어나는 것이 아니라, 세계적 자본주의 체제의 가장 약한 고리인 러시아 같은 나라에서 일어날 수 밖에 없음.

그러나 유럽 각국에서 1차 세계대전 이후 대규모 혁명은 일어나지 않았고 1920년대에 볼셰비키도 유럽혁명의 꿈을 포기함

→러시아 혁명 권력은 점차 폭압적인 국가 사회주의로 변해감(1921크론슈타트 수병 반란 사건)

 

(2)사회민주주의

1차 세계대전의 끝난 뒤 카우츠키의 정통주의와 베른슈타인의 수정주의는 다시 봉합되어 사민당 안에서 공생하게 됨 → 교조 없는 실천과 실천 없는 교조가 결함되어 있는 기묘한 꼴.

원하든 원치 않든  하나의 국민정당으로서 국민 정치 national politics’ 전반을 책임지고 통치할 수 있는 정당으로 거듭나야만 했음. 그러나 정통주의자들은 국가 권력 참여에 어정쩡한 태도를 보였고 결국 베른슈타인의 수정주의 노선은 실현되지 못하였음.

 

(3)생디칼리슴

생디칼리슴은 노동조합을 뜻하는 프랑스어 생디카syndicat’에서 나온 말로 전세계 노동자들이 노동조합으로써 스스로를 조직해 산업을 운영하는 권력을 장악하고 이를 통해 현존하는 국가와 자본가들을 일소해버리는 혁명적 방법-총파업-을 통해서만 새로운 사회를 만들 수 있다고 믿었음.

→조르주 소렐은 생디칼리슴이야말로 마르크스주의의 정수라 주장하였음.

문제는 이렇게 극단적인 주의주의主意主義, voluntarism, 즉 모든 것이 노동자들 스스로의 주체적 결단과 실천에 달려 있고, 노동자들 스스로의 행동에 의해 이상적인 사회를 얼마든지 건설할 수 있다는 생각이 과연 다수 대중을 끌어들일 만큼 설득력 있는 변화 전력을 제시할 수 있는가?

극단적 주의주의voluntarism는 이탈리아의 무솔리니의 파시즘, 독일 슈트라서 형제의 나치즘, 일본 기타 이키의 일본 파시즘의 사상적 지주가 됨.

 

4.1920년대의 새로운 흐름들

(1)대안 과학의 필요성

과학적 사회주의가 난관에 봉착한 이유

첫째, 사회주의 운동의 철학적 기초가 객관적 필연에 있는지 아니면 인간 집단의 도적적 결단과자유의지에 있는지가 명확히 가려지지 않은 채 소위 변증법에 의해 뒤죽박죽 되어 있었음.

정당이나 운동이 지향하는 유토피아는 사람들 마음에 내재한 것이기도 해야 하고 또 초월적인 이론과 분석으로 검증되어 비판될 수 있는 것이기도 해야 함. 즉 정치학에서 말하는 신중함Prudence’의 덕목을 필요로 함.

둘째, 노동계급이라는 협소한 집단을 넘어 다수의 사람들에게 지금보다 나은 세상이 정말로 가능하다는 확신을 심어줄 수 있을 만큼 현실적이고도 일관성 있는 총체적 계획을 내놓지 못했음.

셋째, 20세기에 새롭게 변모해가는 자본주의 사회의 현실을 과학적으로 분석할 수 있는 정치경제학이 없었음.

 

(2)1920년대와 새로운 노선들

●오토 바우어 등이 이끈 오스트리아 사회민주당의 소위 오스트리아 마르크스주의

마르크스주의를, 오스트리아 제국의 민족 갈등, , 경제학, 문화, 사회 심리학 등을 포함한 사회 문제들을 과학적인 방법으로 연구 조사해 그 결과로써 내용을 채워야 할 사회 조사 연구 계획으로 보았음 수도 빈을 노동자들의 문화 운동과 사회민주주의적인 제도적 장치들이 아주 높은 수준에서 결합되는 도시로 만들어 소위 붉은 빈을 꽃피웠음.

 

●안토니오 그람시

노동계급은 우선 자신들의 협소한 계급적 이익을 내세워 배타적으로 행동하는 대신, 사회 전체의 국내적•국제적 상황을 두루 살펴 민중 전체가 마음으로 열망하는 국민적민중적 요구를 찾아내고 그것을 전투적으로 옹호해야 하며, 필요할 경우에는 자신의 이익조차 희생할 각오가 되어 있어야 함.

 

●앙리 드 망

노동자들이 마음속으로 열망하는 것은 물질적문화적 생활수준 개선을 통해 부르주아들과 똑 같은 시민의 삶을 얻고자 하는 것뿐이며, 그들의 의식 속에 선천적으로 사회주의 사회를 지향하는 유전자가 박혀 있다는 마르크스주의의 믿음은 터무니 없는 것이며 사회주의 운동은 중산 계급 출신 지식인들의 의식과 열망을 노동 계급에 씌워놓은 것일 뿐임.

→사회주의 운동은 공동체 의식에 기초해야 함. 따라서 노동계급이라는 협소한 집단이 아니라 공동체를 실현할 전국적 단위가 요구됨.

→혁신적 제안을 담은 저서 <노동의 계획> 1933년 벨기에 사회당에서 채택되었음.

 

출처 : 독서대학 르네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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강아지똥 민들레 그림책 1
권정생 글, 정승각 그림 / 길벗어린이 / 1996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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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요인문강좌 세번째 강좌, 강사는 김민웅 교수다. 오늘은 권정생 선생님이 쓴 『강아지똥과』, 이솝 우화에 나오는 「늑대와 소년」으로 활발한 토론을 했다.

『강아지똥』은 더럽고 냄새 나는 강아지똥이 새, 흙 등에게 무시 당하다가 민들레가 거름이 되어달라는 요구를 하자 비로서 자신의 존재가치를 찾게 되었다는 이야기이다. 이 이야기는 세상에 하찮은 존재가 없다는 교훈을 준다고 해석되어 왔는데 김민웅 교수는 강아지똥이 민들레의 규정에 의해 자신의 정체성을 찾게 되는 이야기 전개를 아쉬워 하였다. 물론 강아지똥이 민들레와 교감을 통해 주체적인 의사결정을 하는 전개도 괜찮아 보인다. 하지만 기독교 신자였던 권정생 선생님은 민들레와 강아지똥의 관계를 기독교적인 ‘부름과 응답’의 관계로 설정한 게 아닌가 싶다. 예수가 어부인 베드로에게 ‘나를 따르라, 사람 낚는 어부가 되게 하리라’ 고 했지 ‘나를 따르면 사람 낚는 어부가 되게 해 줄 수 있는데 그렇게 할래?’라고 묻지 않은 것처럼. 신(神)이 떠나 버린 오늘날에 맞게 현대적인 용어로는, 스스로 설정한 내 안의 신이 나에게 명령하는 것을 따른다는 ‘소명의식’ 정도가 될 수 있을 것같다.

그런데 주체적 삶의 가능성과 타인의 나에 대한 인정 중 어느 것이 인간에게 보다 중요한 욕구일까? 공자가 말했듯이-人不知而不慍, 不亦君子乎- 사람들이 나를 알아주지 않더라도 성내지 않을 수 있는 사람은 ‘오로지’ 군자뿐일 것이다. ‘남자는 자기를 알아주는 사람을 위해 목숨을 바치고 여자는 자기를 이뻐해 주는 사람을 위해 치장을 한다」(士爲知己用, 女爲悅己容)’는 말처럼 평범한 사람들은 주체적으로 살지 못해서 겪는 고통보다 인정받지 못하기 때문에 겪는 고통이 더 크지 않을까? 『사람은 왜 인정받고 싶어하나』 (이정은, 살림, 2005)는 사람에게 인정이란 것이 얼마나 중요한지 생각할 거리를 제공한다.

김민웅 교수가 동화를 새로운 시각으로 해석한 책을 낸 다는 얘기를 들었을 때 두명의 사람이 떠 올랐다. 『백설 공주는 공주가 아니다?!』 , 『신데렐라는 재투성이다』의 저자 이양호씨와 『마가복음의 기적 이야기』 , 『산상설교 그 사람됨의 가르침』 의 저자 강일상 목사. 내가 익숙하게 알고 있던 옛이야기와 성서 해석을 새로운 시각으로 보게 한 책들인데 이양호씨는 자신의 저서 머리말에서 새로운 동화 해석에 대한 영감을 강일상 목사에게서 얻었다고 하였으니 사실은 강일상 목사가 이 분야의 원조라고 해야 할 거 같다. 재미있는 건 김민웅 교수도 목사라는 것인데 성경에 나오는 난해한 이야기들과 상징을 해석하던 사고와 훈련이 동화로까지 확장된 게 아닌가 싶다. 참고로 이양호씨는 『공부를 잘해서 도덕적 인간에 이르는 길』 이라는 우리 상식에는 아이러니한 제목의 책을 내고 지금은 대안 중고등학교인 다산서원(http://www.dasanseowon.co.kr) 교장을 맡고 있다. 이양호, 김민웅 선생님의 동화책이 그동안 정답이라 생각했던 것들에 대한 새로운 시각을 제시해 줄 수 있기를 기대한다. 

 출처 : 독서대학 르네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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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전, 대중문화를 엿보다 - 젊은 인문학자의 발칙한 고전 읽기
오세정.조현우 지음 / 이숲 / 2010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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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마지막 강의
고전, 대중문화를 엿보다 의 마지막 강의. 오늘 강의의 주인공인 주몽은 온갖 시련을 겪었으나 결국에는 이를 극복하고 고구려를 창건한 영웅이다. 주몽의 아버지 해모수와 어머니 유화는 신적인 존재이다. 이처럼 이중적이고 모순적 성격을 지닌 신화 속 인물을 트릭스터(trickster)라고 하는데 신과 인간, 자연과 문화, 창조자와 파괴, 혼돈과 질서, 총명과 우둔 따위의 양의성(兩意性)을 띠면서 자연히 양자의 중간적 존재, 즉 매개자로 활동하는 특징이 있다.
 
마침 마지막 강의가 있었던 날 서울시장 선거가 있었다. 그리고 강의 중에 박원순씨의 당선을 알게 되었다. 과연 서울 시민들이 바라는 영웅(?)은 어떤 사람이었을까? 박원순씨의 당선에 큰 영향을 끼친 안철수씨가 왜 대중들에게 인기가 있는지를 분석한 재미 있는 기사를 본 기억이 난다. 안철수씨는 대중들이 희망하는 성공의 상징이다. 서울대 박사에 외국에서 공부했고 기업을 설립하여 자수성가 했고 수 천억원 대의 자산을 갖고 있으며 지금은 서울대 교수이기도 하다. 그렇지만 이런 성공은 안철수만 보여 준 것은 아니지 않은가? 안철수가 다른 성공자들과 다른 점이 있다면 그는 주류이면서도 평범한 사람들의 삶을 이해하고 소통하려고 했다는 것이다.
 
고전 속의 매개자는 그를 필요로 했던 인간의 아픔을 이해하고 해결해 주는 역할보다는 신-매개-인간으로 나열되는 능력의 중간자를 표현하는 것에 불과해 보인다. 그리고 고전 속의 매개자는 기다림의 대상이지 선택의 대상은 아니다. 오늘날 서민들이 기다리는 중간자의 모습은 능력과 소통할 자세를 갖고 있는 사람인지도 모르겠다. 그리고 이제 그런 영웅은 우리 힘으로 선택할 수 있다는 것. 고전 속의 상황보다 오늘날의 현실이 훨씬 나아 보인다.
 
 
2.그동안 강의를 들으며서
그동안 책과 강의를 통해서 느낀점을 말하라면 살아오면서 당연하게 생각해 왔던 것들에 대해 한번쯤 낯설게 보기를 해 봐야겠다는 것이다. 효녀 심청, 열녀 춘향, 영웅 홍길동으로 듣고 배우고 당연히 그런 줄 알았던 이야기를 다양한 시각으로 볼 수도 있다는 게 놀라웠다. 옛이야기도 이러할진대 내가 옳다고 생각하고 있는 나의 가치관, 사고방식도 알고 보면 얼마나 많은 편협함으로 이루어져있을까?
 
이번 강의를 들으면서 홍세화씨의 『생각의 좌표』란 책을 많이 떠올렸다. 사람들은 누구나 자기만의 생각을 갖고 살아간다고 생각지만 과연 그 생각이란 게 과연 내가 스스로 사고하여 갖게 된 것일까? 몇 년 전 홍세화씨가 아주대학교에서 강연한 동영상을 인터넷으로 보았는데 강연제목이 너는 무식한 대학생이었을 게다. 한창 지적으로 왕성한 활동을 하고 있는 대학생들에게 이런 모욕적인 딱지를 붙이다니. 무슨 근거로 대부분의 대학생들은-사회인도 다를 게 없지만- 고등학교 때까지는 교과서 중심의 입시교육을 통한 지식 습득으로 사고를 형성하게 되고 그 이후에는 주로 주류언론을 통해서 사회를 바라보는 관점을 갖게 되는데 이렇게 형성된 나의 생각은 사실은 외부로부터 주입된 것이지만 나는 마치 내 생각인양 착각하면서 살고 있다는 것이다. 
 
이런 상황을 극복하기 위하여 홍세화씨가 제시한 대안은 독서와 자아성찰이다. 그러나 생각하는습관은 힘들다. 왜냐하면 생각할 줄 아는 힘은 결국 비판적인 사고와 더 나아가서는 현실 개혁에 대한 의지를 낳기 때문에. 서점가에도 긍정적인 사고방식을 갖으라는 책이 많이 팔리고 직장인들에게도 긍정 마인드가 성공을 위한 중요한 덕목으로 간주되고 있지만 긍정이란 무비판적인 현실 수용이 아니라 현실이 암울함에도 '불구하고' 그것을 극복하겠다는 위안과 용기를 줄 수 있을 때에만이 의미가 있을 것이다.
 
어쨌든 6주간 정답이 없는 문제를 다양하게 풀어보는 연습을 많이 했다. 정답은 각자의 몫. 인문학의 힘이라는 게 이런 건가 보다

출처 : 독서대학 르네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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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전, 대중문화를 엿보다 - 젊은 인문학자의 발칙한 고전 읽기
오세정.조현우 지음 / 이숲 / 2010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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절판


유대인에게 <창세기>가 있다면 우리민족에게는 <창세가>가 있습니다.  
선을 대표하는 미륵과 악을 대표하는 석가라는 두 신이 인간세상을 놓고 겨루다가 석가의 속임수에 화가 난 미륵이 인간세상을 포기하면서 저주를 퍼부었고 그후 세상은 석가의 지배하에서 악이 횡행하게 되었다는 이야기입니다. 저자는 <대홍수와 목도령>이라는 이야기를 <창세가>와 연결시켜 바라보면서 선과 악이 공존하게 된 이유를 설명하고 있습니다.
 
기독교는 악의 근원이 선악과를 따먹은 인간에게 있다고 보는데 반해 <창세가>는 악한 신인 석가에 원인이 있기 때문에 우리 조상들은 미륵이 도래하여 선이 지배하는, 새로운 세상을 염원했다는 해석이 흥미로웠습니다. 순간 기독교인들이 언젠가 재림하리라 고대하는 예수와 미륵이 오버랩 되면서 대한민국에서 기독교가 서구사회보다 잘 되는 건, 조상들이 그러했듯 현실에 대한 불만을 초인의 힘을 빌어 해결하고픈 욕구가 크다는 반증이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악의 원인과 그것을 개혁하려는 의지를 인간 스스로에게서 찾지 않고 저항할 수 없는 외부의 힘으로 숙명처럼 받아들인 것이 아닌가 해서 좀 씁쓸하기도 했습니다.  
 
<유충렬전>은 선을 상징하는, 영웅 유충렬과 악당 정한담의 대립이 결국 영웅의 승리로 끝난다는 이야기입니다. 영웅이야기가 옛날이나 오늘날이나 여전히 인기가 있는 이유는 무엇일까요? 현실에는 선과 악은 뚜렷이 구분되지 않고 오히려 평범한 사람들에 의해 의외성을 띄고 나타나는 경우가 많기 때문에 악당이 뚜렷이 구분되는 이야기나 영화가 훨씬 더 덜 공포스럽고 더 편안(?)하기 때문이랍니다. 즉 현실에서 누가 악당인지가 모호해질수록 뚜렷이 드러난 악당을 제압하는 영웅 이야기는 더 인기를 끌게 된다는 것이지요.
 
악당이나 귀신이 나오는 이야기보다 현실이 더 공포스럽다는 이야기에 동감이 갑니다. 인간은 지킬박사와 하이드처럼 선과악을 동시에 품고 살아 가니까요. 어떻게 하면 지킬박사가 하이드로 변하는 것을 막을 수 있을까요?
 
식이위천(食以爲天) 이라고 인간으로서 최소한의 품위를 유지하면서 살아갈 수 있는 경제적 여유와 삶을 가꿀 수 있는 시간, 아름다움을 느낄 수 있는 눈이 있다면 좀 낫지 않을까요?
 
가끔씩 하이드로 변하는 스스로를 반성하면서 균형잡힌 삶의 중요성을 생각해 보았습니다.  

출처 : 독서대학 르네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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