Snowcat의 혼자 놀기 - 개정 증보판
권윤주 지음 / 열린책들 / 2009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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학교다닐적에는 혼자서 밥먹으러 가는것 영화보러가는 것 등에 익숙하지 않았다.

그래서 가끔 같이 밥먹으러 갈 사람이 없으면 식사를 거르기도 했고, 보고싶은 영화가 있어도 그냥 놓치는 경우도 있었다. 혼자서 한다는 것이 왜인지 남들도 나를 이상하게 볼꺼 같고, 나 스스로도 쑥쑤러웠던 것 같았다. 하지만 학생신분을 벗어나고 사회에 발을 디디고 나서는 혼자 하는 것에 익숙했졌던 것 같다.

 

혼자놀기라는 것이 그저 인간관계가 좋치못하다거나, 사교성이 좋치 못하다는 것을 보여주는 것은 아니라고 본다.

항상 남들과 더불어라는 것이 때론 불편하기도 하다. 따라서 때때로는 홀로 시간을 갖는것이 얼마나 좋은 것인지를 그저 어렸을 때는 느끼지 못했을 뿐이라고 생각한다. 

 

때론 하던일을 과감히 던져버리고서 홀로 여행을 떠나고 싶은 생각이 든다. 그리고 몇번 해보기도 했었다. 지친 현실에서 벗어나서 한숨 돌릴수도 있었고, 생각을 할수도 있었다.

 

혼자놀기가 그리 쑥쑤럽지 않을때 그 때 비로소 어른이 되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닐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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위기
로빈 쿡 지음, 박종윤 옮김 / 열림원 / 2007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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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가 저자를 처음 만났던 것이 아마도 대학생이었던 걸로 기억난다. 그때 < 코마 >라는 것을 처음 읽고 나서 몇편을 더 읽었던 기억이 났다. 저자는 안과의사 출신으로 보다 맛깔나는 의학소설을 쓴다. 출간된지는 좀 됬지만 이 책을 읽으면서 다시 '로빈 쿡'의 소설을 만난것에 기뻤고, 극중 인물의 렌트카가 '현대 엑센트'라는 것이 또한 반가웠다. 아무래도 외국소설에 등장하는 국내 브랜드인지라 반갑기도 하고.. 은근 살아나는 애국심이 이런것일까?

 

< 코마 >, < 열 >, < 브레인 >... 그리고 또 그의 책을 읽었던 것 같은데 기억이 나지를 않는다.. 1990년대 중반쯤에 읽었다가 오랫동안 그를 잊고 있었기에 - 솔직히 그당시에는 요즘처럼 작가 위주로 읽지 않는편이라.. 금세 다른 책에 관심을 가졌을지도 모르겠다. - 제목을 보고 읽었는지 아닌지 가물가물하다.. 어쨌든 내가 그동안 '로빈 쿡'이라는 작가를 잊었던것은 명백한 사실이다.

 

그의 소설은 처음에는 조금 지루한감은 없지않아 있다. 아지만 그 모든 것이 뒤에 나오는 이야기를 이해하는 것이 도움이 되긴 한다. 하지만 곧바로 속도감을 붙일수 있다는 장점을 가지고 있다. 그리고 마지막에 오는 충격적 반전!!! 역시 그의 작품과 나 사이의 오랜 공백기간이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전혀 예측할수 없었던 충격적 결말에 다시한번 감탄하지 않을수 없었다.

 

의료소송에 휩싸인 '크레이그 보먼', 그야말로 어렵게 의사로서 성공한 그에게는 의료소송이라는 것은 이제껏 명성을 깎아내릴 만한 일이었다. 특히 법정에서의 원고측 변호사에 의한 보먼에 대한 인신공격.. 거짓말이 난무하는 법정에서 진정 진실을 얻어 내기 위해서 당해야 하는 고통이 어떤것인지 알기에 더 그를 측은하게 생각한것 같다. 지루하게 오랫동안 끄는 우리나라의 재판과는 다르에 미국에서는 참으로 속전속결로 이루어지는 듯하다. 아마도 우리나라 같은 형태라면 진실을 알기도전에 피가 말라 죽지 않을까 싶다. 과연 그 사람이 과실이 있든 없든간 말이다. 항상 법이라는 것은 선량한 사람에게 손을 들어주는 것이 아니라 나쁜 일이더라도 법에 저촉되지 않는 사람에게만 희망을 주기 때문이다. 그래서 어쩐지 보먼에게 더 연민을 느낄수 있었고 그의 처남인 법의관 잭이 어서 부검을 해서 진실을 밝혀주기를 기대했지만.. 결과는 의외였다. 결과를 믿을수 없어 다시 읽어 볼 정도로 놀라운 반전이었다.

 

사실 뒤의 내용이 궁금해서 읽던 중 살짝 들여다 보긴 했다. 과연 부검이 이루어지는지 아닌지가 엄청나게 궁금했기 때문이다. 마지막의 보먼의 아내의 대사!

 

" 지금은 죽었어. 1년 전에 림프종으로 죽은 크레이그의 환자야."

 

라는 대화로 이 소설을 끝이난다. 처음에는 전혀 알아듣지 못했는데, 이 대사 한마디로 모든 의문이 그냥 해결되어 버렸다. 아무래도 난 또다시 로빈쿡의 다른 소설을 들고 다닐것이다. 또 다른 스릴을 느끼기 위해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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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억을 가져온 아이 - 제3회 마해송문학상 수상작 문지아이들 85
김려령 지음, 정문주 그림 / 문학과지성사 / 2007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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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 3회 마해송문학상 수상작

 

김려령 작가의 프로필에 항상 나오는 '마해송문학상'이라는게 궁금했다. 어린이 동화작가였던 마해송선생님의 업적을 기리기 위해서 문학과지성사에서 만든 상이다. 요즘에 너무나도 재미있는 창작동화가 많이 있어서 딸아이가 너무나도 부럽다. 그림도 한껏 들어간 책을 지하철을 타고다니면서 읽고 있을라치면 한번쯤은 이상한 눈초리로 쳐다보는 사람들이 있지만서도.. 어떠랴.. 아이들의 창작동화라든지, 청소년 소설이라든지.. 읽으면서 그네들의 생각도 곁눈질 해보기도 하면 우리딸과의 세대차이라는 것도 줄일수 있고 나도 심적으로 젊어지지 않을까 싶은데 말이다.

 

"< 기억을 가져온 아이 >는 판타지 형식을 빌려서 기억과 망각에 대해서 이야기하고 있다. 살아 있는 것과 기억되는 것, 잊힌 것과 죽은 것 사이를 연결하는 매개자로 꼬마 무당을 등장시켜 무속의 세계와 잇닿아 있는 우리의 정신세계를 보여 준다"라는 심사평을 받은 이 이야기는 우리의 상상력을 자극시키는 이야기라고 말하고 싶다.

 

아파트 생활에 적응하지 못한 할아버지는 다시 산속으로 들어가셨고, 그리고는 실종되었다. 그리고 차근이의 부모님도 이혼을 하셨다. 그래서 학기중에는 엄마와 방학중에는 아빠와 생활하게 된다. 하지만 차근이는 방학전에는 늦게 오는 엄마 대신 엄마 집을 지키게 되고, 방학하면 아빠 집을 지키는 신세가 되어 버리는 것 같다. 그러다가 어느날 꼬마 무당인 다래와 함께 할아버지댁 벽을 통해 기억의 세계로 들어가게 된다.

 

기억의 호수에 모인 기억들은 누군가가 잊어버린 기억들이며 잊힌지 오래된 기억은 플라스틱처럼 단단해진다고 한다. 그 다양한 기억들은 주인이 기억을 떠올려 주기를 호수에서 기다리고 있다고 한다. 내게는 얼마나 많은 잊혀진 기억들이 있을까? 어쩌면 내게는 잊혀져야 할 기억들이 많은것 같기도 하다. 때론 기억하고 싶지 않은 것들이 떠올라서 괴롭기도 한다. 잊고 싶은 기억들은 왜 그렇게 또렷해지는지... 내 기억들은 떠올려 주기를 호수서 기다리고 있지 않고 틈만나면 내게 오는것 같다. 한치에 오차도 없이 정확하게 내 머리속으로 말이다... 가끔은 떠올리고 싶지 않은 내 기억들도 그곳에서 플라스틱처럼 단단해져버렸으면 좋겠다.

 

플라스틱처럼 단단해진 기억이 누군가에게 잊힌 이들이 모여 쓸쓸하게 살고 있는 마을을 가르쳐 주었다. 차근이 할아버지도 이것에 있을까.. 차근이는 한번도 할아버지를 잊은적이 없는데 왜 할아버지는 이곳에 와 계시는 것일까?

이 곳 사람들은 잊혀진 사람들이 아니라 스스로 지우고픈 기억이 많은 사람들이 아닐까도 생각해본다. 자신에게 너무나도 아픈 기억이라 스스로를 지워버린 사람들인것 같다. 그곳에서 새로운 삶을 시작하고픈 바램들이 아니었을까.. 물론 아이들의 창작동화이기때문에 심각하게 받아들일 필요는 없지만 누군가에게서 잊혀진다는 것은 슬픈일이다. 그리고 누군가에게 나도 모르게 아픔을 줘서 나도 모르게 잊혀지지는 않았나 생각해보게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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요란요란 푸른아파트 문지아이들 96
김려령 지음, 신민재 그림 / 문학과지성사 / 2008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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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려령 작가의 작품에 포옥 빠져서 두서없이 찾아서 읽고 있다. 이 책은 초등학교 3, 4학년 이상에게 권장되고 있는 책이지만서도.. 나이 많은 어른이면 어떠랴.. 재미있으면 그만이지...ㅋㅋㅋ

요즘은 딸이 참 부럽다. 내가 어렸을적에는 이렇게 도서관도 많지 않았고, 그리고 또 그렇게 책들이 많치 않았던것 같았다. 그저 집에는 동화책 전집과 위인전 전집을 읽고 또 읽었을 뿐이다. 물론 그때 대형서점을 알았더라면 그야말로 죽치고 앉아서 읽지 않았을까 싶기도 하다. 물론 요즘 세대처럼 학원에 다니질 않았고, 케이블 방송이 없던때였기에 가능했던 일이였을까?

 

이곳 재개발이 취소된 푸른 아파트엔 뭔가가 있다. 주변에는 재건축이 되어서 고층 아파트가 즐비한데 이곳 푸른 아파트만이 저층 아파트이다. 그때만 해도 5층높이의 아파트라 고층에 속했다. 그걸 보면 나도 초등학교 시절 5층아파트에 살았었구나.. 제법 아파트단지가 형성되어 있는 곳이었다고 생각된다. 25년전 아파트인데 거기도 벌써 재개발이 되었을려나.. 궁금타...

 

벼락을 맞아 좀 이상하게 변한 1동, 데리고 사는 사람들에 대한 정이 깊은 2동, 재개발 취소로 시위하느라 검은 띠를 두른 3동, 귀신이 산다는 소문이 퍼진 4동 그리고 계산이 빠른 상가.. 40여년을 함께해온 건물들이다. 작가는 모든 사물과 이야기하는 할머니에게서 어쩜 이런 상상을 했으리라.. 건물이 살아 움직이는 듯한 상상... 마치 아파트가 감정이 있는것처럼 묘사된 소설에 감칠맛이 난다고나 할까, 조금 독특한 소재에 아이들의 상상력이 커갈수 있을꺼 같다.

 

딸아이도 어렸을 때 모든 인형에 부르기도 힘든 이름을 붙여가면서 이름을 이야기해줬다. 실은 나도 우리집에 처음으로 자동차가 생겼을적에 차번호판에서 이름을 따서 '공팔'이라고 지어주었던 적이 있었다. 모든 가족들이 마치 우리집 막내인양 오랫동안 공팔이라고 그녀석을 불렀었다. 우리집에 온지 얼마 안있어 사고(?)로 옆이 약간 찌그러져 처량해 보이던 모습도, 그리고 헤어지게 되던 그날도 이 소설을 읽으면서 문득 생각해내게 된다. 지금도 난 내 차를 보고 '빠방'이라고 부른다. 마치 내가 힘이들거나 속이상하면 길가에서 퍼지거나 견인차에 매달려가면서 나를 웃게 만드는 그런 차다.

 

아직도 가끔은 내 주위의 모든 것이 생명이 있는것 마냥 대화를 하기도 한다. 주로 고장났을때 '병원가서 주사한대 맞고 오자'라는 정도이긴 하지만, 모든 사물에 생명이 있다고 상상하게 된다면 내 주위의 모든 것을 소중히 여기게 되지 않을까도 싶다. 내가 사는 아파트도 그리 단지가 큰편은 아니지만 모두가 잠든 밤에 그들만의 대화가 있는건 아닌지 모르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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방황하는 칼날
히가시노 게이고 지음, 이선희 옮김 / 바움 / 2008년 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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당신은 그의 복수에 동의할수 있는가?

 

<탐정클럽>과 마찬가지로 히가시노 게이고의 소설은 독자를 확 잡아끄는 마력이 있는것 같다. 그다지 적은 분량이 아님에도 불구하고 금세 이야기에 빠지고 말았다. <탐정클럽>에서 느꼈던 그 허를 찌르는 반전에 감동해서 찾아봤던 책이었다. 이 이야기에서는 미성년자인 청소년이 범죄의 가해자가 된다. 우리나라에서는 정확하게 어떤지 모르겠지만 일본에서는 성년이 되기전의 청소년이 가해자가 되는 경우 갱생을 하여 사회로 돌려보내자는 의도에서 이름도 공개를 하지 않고, 좀더 낮은 형을 받게된다고 한다. 그것이 아무리 잔혹한 범죄일지라도 말이다.

 

소설속 나가미네는 얼마전 아내를 잃고 외동딸과 함께 살고 있다. 그런데 어느날 불꽃놀이를 구경 간 딸이 집에 오지 않는다. 그리고 며칠이 지나서 딸은 시체로 발견되고 만다. 성폭행을 당한후 끔찍하게 살해당한 것이다. 그러다가 어느 이름모를 제보자에 의해 범인의 집에서 범인이 찍어놓은 성폭행 당시의 비디오테이프를 보게되고, 갑자기 들어온 범인을 우발적으로 살해하고 만다. 이제 나가미네는 피해자의 아버지에서 살인 용의자가 되었다. 그리고 그는 나머지 한명의 범인을 뒤쫓는다. 그에게만 복수를 하고 나면 당당하게 자수하여 죄값을 받으리라 다짐한다.

 

자 이제 우리에게 혼란이 생기기 시작했다. 분명 나머지 범인은 나가미네 딸뿐 아니라 평소에 친구들을 괴롭히기도 했고, 성폭행을 했고, 또 신고를 할까봐 모든 장면을 비디오로 증거로 남겨두는 파렴치한이다. 하지만 그는 미성년자다. 그리고 그는 쫓기고 있다. 나가미네는 마지막에 괴로웠을 딸을 생각해서는, 그리고 그들이 딸에게 한 짓을 생각하면 그들을 가만둘수 없다. 결국 법은 그들이 미성년이라는 이유로 잔혹한 범죄에 대해서도 넓은 아량을 베풀것이다. 내 손으로 복수를 해야만 내 딸에 원수를 갚을수 있다고 생각한다.

 

과연 법은 누구를 지켜야 하는가? 파렴치한 소년범을 잡아야 하는건지, 아니면 살해위협을 당하고 있는 소년범을 감싸야 하는지 말이다. 법원 과연 정의의 칼날이라고 할수 있는가? 과연 정의의 칼날은 옳은 방향으로 향하고 있는가?

 

우리나라도 별반 다르지는 않은것 같다. 요즘은 약간은 범죄자의 신상을 공개하기도 하지만 여전히 대부분은 그들은 얼굴노출을 해주지 않는다. 물론 그 범인들의 가족들이 당해야 하는 면에 있어서도 그렇게 해줘야 한다고 생각은 하지만 그렇다고 피해자나 피해자의 가족들은 어찌해야한단 말인가? 과연 이 법이라고 하는 정의의 칼날은 옳은 방향으로 향하고 있단 말인가? 만약 그것이 옳은 방향으로 향하고 있다면 억울한 사람이 없어야 한다고 생각한다. 하지만 현시대에서는 그 정의의 칼날이라는 것은 옳은 방향보다는 그 칼날을 교묘하게 잘 이용하는 사람들을 향해서만 친절한것 같다. 정의의 칼날이 올바르게 서게 하기위해서는 아직도 먼 여정을 해야할것만 같다. 많은 희생이 따라야 되고, 많은 억울함이 생기고 나서 외쳐야만 과연 그 칼날이 올바른 방향으로 설수 있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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