창백한 죽음
안드레아스 빙켈만 지음, 서유리 옮김 / 뿔(웅진) / 2011년 12월
평점 :
절판


독일 작가의 기세가 무섭다. 넬레 노이하우스나 안드레아스 빙켈만은 심리 스릴러의 영역의 주도권을 독일로 옮겨놓았다고 해도 과언이 아닌것 같다. 물론 유럽에서는 예전부터 독일 작품이 꽤 유명했겠지만 우리나라에서 관심을 받게 한 작가가 바로 이 두 작가가 아닌가 싶다.(내 생각만 그런가?) 어쨌든 두 작가의 작품은 꽤 기대가 되고 또한 실망을 안겨주지 않는것 같다.

 

안드레아스 빙켈만의 < 창백한 죽음 >은 발간된다는 소식을 접한후부터 나를 심한 고민에 빠지게 했다. 구입을 하느냐, 도서관에서 기다리느냐... 물론 소장의 가치도 있겠지만.. 요즘 도서관에서 대출에 읽는 재미에 푹 빠진 나로서는 도서관에 신청을 하고 기다릴수밖에 없었다. 근데.. 왜 이리 오래걸리던지.. 신청을 하고서도 4개월이 지나서야 받아볼수 있었다.

 

작가가 전작 < 사라진 소녀들 >에서 보여주었던 것과 같은 흡입력을 이 작품에서도 느낄수 있었다. 요즘 시대의 병폐라고 할수 있는 소시오패스의 등장. 25명중 1명은 소시오패스라 한다. 다른 사람의 권리를 무시하고 침해하는 행태를 전반적, 지속적으로 보인다는 반사회적 인격장애인 소시오패스. 더욱 놀라운 것은 그들은 25명중에 1명꼴로 아주 드문예는 아니라는 것이다. 결국에 그 이야기는 우리는 흔히 볼수는 있으나 느끼지 못했고 현재도 많은 소시오패스를 양성(?)하고 있는 것이며 앞으로 사회는 더욱더 각박해지고 무질서해질수도 있다는 이야기이다. 이런 문제는 결코 소설속 허구적 이야기로만 끝내서는 안된다고 생각한다.

 

요즘 딸아이를 학교에 데려다 주면서도 보면 빨간불임에도 불구하고 당당하게 횡단보도를 건너는 교복입은 학생들을 많이 볼수가 있다. 또한 차들이 다니는 도로가 분명한데도 자전거를 타고 버젓이 차를 오히려 위협하는 학생들을 보게 된다. 사소한 도덕적인 질서도 지키지 못하는 아이들. 마치 그것이 잘못이라는 생각조차 하지 않는것 같다. 물론 운전자가 보행자의 안전을 우선시해야한다는 것을 알지만 도가 지나칠대로 지나쳤다. 갈수록 어려지고, 잔인해지는 청소년 범죄들.. 이를 바로 잡지 않는다면 우리는 그야말로 소시오패스를 양성하는 것이 아닌가 싶다. 어디서부터 우리 사회는 잘못된 길로 접어들게 된 것인가?

 

딸아이가 집중이수제에 따른 도덕 시험공부를 하면서 많은 분량에 지쳐 '커서 이런거 필요하지도 않는데 왜 배워야해?"라는 푸념을 했다. 딸아이 뿐만이 아니라 내가 가르치는 아이들에게서도 종종 듣는 이야기이다. 또한 내가 가장 싫어하는 말이기도 하다. 아이들은 학교에서 배우는 교과에 대한 필요성을 못느끼는 것 같다. 양심, 욕구, 당위 등등 중요한 것이 많음에도 불구하고 한낱 평가에만 위주를 두다 보니 지칠만도 하다. "방정식 몰라도 살아가는데 문제가 되지 않는데..." 그렇다. 살아가면서 방정식이니 샤를의 법칙이니 몰라도 아무런 지장이 없다. 하지만 학교에서 그것만 배우나? 남들과 함께 사는 공동사회, 협력하는 법등 다양한 것을 배우는데 아이들은 숲을 보지 못하고 나무만 본다. 과연 누가 그렇게 만들었을까? 물론 어른들일 것이다. 가정에서도, 학교에서도 늘상 겪는게 남보다 뛰어나야 하는 치열한 경쟁속에 아이들은 하나둘 소시오패스로 길들여지는 것이다.

 

꼭 잔인한 범죄를 저질러야만 소시오패스, 사이코 패스라는 이름을 붙일 필요는 없다고 생각한다. 다른 사람을 배려하지 못하는, 다른 사람의 권리를 침해하면서도 양심의 가책을 느낄수 없는 사람들... 어쩌면 25명중 1명이 아닌 2명중 1명, 혹은 모든 사람이 소시오패스라는 시대가 멀지 않았는지도 모르겠다.

 

이 < 창백한 죽음 >이라는 소설은 꽤 재미있었기도 했지만 씁슬한 현실을 다시한번 생각해볼수 있게 해준 소설이기도 했다. 부족하나마 나부터라도 우리아이를 도덕적인 실천을 할수 있도록 이끌어야겠다. 25명중의 1명이 아닌 소시오패스가 없어지도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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