광해군 - 역사인물 다시 읽기
한명기 지음 / 역사비평사 / 2000년 7월
평점 :
구판절판


쫒겨난 군주, 영창대군을 죽인 비열한 왕....

나도 그렇게 알고 있었는데 언제부턴가 의문이 들었다. 아마 그 계기가 예전에 SBS의 '왕의 여자'였던것 같다.

그때까지 내가 알고 있기에는 광해군은 쫓겨난 왕이었다는 사실이었는데.. 그 드라마에서 보여지는 광해군은 임진왜란 당시 전장에서 지휘를 하던 한 나라의 당당한 왕세자였다. 그리고 한참동안 소현세자에게 정신이 빼았겨서 관심을 두지 않았었던 것 같았다. 그런데 작년 '연평도 사건'이 생겼고, 딸아이와 '서대문형무소'를 다녀오면서 또 다시 의문을 품기 시작했다. 왜 우리는 이런 분단의 아픔도 나라를 잃어버렸던 불운한 역사를 가지게 되었는지...

 

소현세자가 왕위에 올랐다면 이런 슬픈역사를 가지게 되었을까... 감히 우리나라를 넘볼수나 있었을까 하는 생각을 하게 되었다. 그러다 보니 소현세자의 일가를 비극으로 몰아붙힌 인조가 광해군을 내쫒고 왕위에 오르지 않았던가.. 자연스레 광해군에 대한 궁금증이 생기기 시작했다.

 

왕릉이나 대군들의 무덤에 참배하려면 대개 무덤 입구에서부터 언덕으로 '올라가야' 한다. 광해군 무덤은 정반대다. 자물쇠가 달린 녹색 철문을 열고 들어와 능선을 '내려와야' 한다. '어차피 쫓겨난 임금'이니 마음놓고 '내려다보아도'된다는 심리에서 이런 곳에 무덤을 썼을까? 광해군은 죽은 뒤에도, 지금까지도 철저히 외면당하고 있었다.(본문 p.17)

 

초반에 이 글을 읽으면서 너무나도 마음이 아팠다. 왜 그만이 유독 내려봐야 하는 것일가? 그는 왜 여전히 외면당하고 있는 건지 말이다. 영창대군을 죽인것이 문제였을까? 인목대비를 유폐시킨 것이 문제였을까? 왕권강화에 너무 집착한 나머지 민생이 피폐해지는 것을 나몰라라 하고 궁궐짓기에 몰두했기 때문일까? 명나라와 후금사이에서 중립외교를 폈던것이 문제였을까? 그래서 그는 왕위에서 쫓겨나야만 했던것일까?

 

왕자의 난으로 혈육들을 죽음으로 몰고간 이는 어떨까? 조카를 왕위에서 몰아냈던 이는 또 어떨까? 반정으로 왕위에 오른 이라서 타의에 의해 왕위를 아들에게 빼앗길까 아들일가를 벼랑끝으로 내몬 이는 또 어땠을까? 권력의 틈바구니에서 아들을 뒤주속에서 죽여간 왕은 또 어떠했을까?

 

과연 광해군만이 그렇게 왕위에서 쫓겨날만큼 문제가 컸던 것일까? 물론 사람이 죽고사는 문제에서 이런 것을 흠이라고 일컫는다면 27명의 왕들중에서 떳떳한 사람이 몇일까? 왜 유독 광해군만이 문제였을까? 여전히 의문은 한두가지가 아닌것 같다. 내가 역사를 연구하는 학자도 아니니 뭐라 꼭 짚어 이야기할 정도는 아니지만 이 책을 내내 '과유불급'이라는 말이 생각났다. 주변사람들의 지나침이 아니 못간만큼 만들어 버린 것은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들었다. 물론 광해군이 모든 면에서 완벽하지는 않았을테다. 그는 선천적으로 약산의 우유부단한 성격을 가지고 있었다고 한다. 어쩜 복잡한 대외정세속에서 그가 펼친 중립외교만큼이나 내정에 힘썼더라면 과연 일이 이지경까지 됐었을까 한다.

 

비록 그는 신료들을 조정하는데는 실패했지만 외교적 행적 속에서는 우리가 배울만한 것들이 적지 않다는 것을 저자는 말하고 있다. 첫째, 명과 후금의 실체를 있는 그대로 간파했던 광해군의 냉철함이며, 둘째로는 명과 후금의 동향을 파악하려고 노력했던 광해군의 자세이다. 그리고 마지막으로 유연한 외교를 통해 얻어진 '평화의 시간'동안 자강책을 마련하려 했던 광해군의 자세다. 그 옛날 '탁월한 외교정책을 펼친 군주', 그가 내정에 힘써서 왕위를 빼앗기지만 않았더라면 우리의 현재는 많이 달라지지 않았을까. 역사에서 가정은 부질 없는 것이라지만 한번쯤은 그런 상상을 해본다. 그래서 우리나라가 다시는 예전의 과오를 반복하지 않으면서 강력한 나가가 되기를 소망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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