진리와 방법 2 - 철학적 해석학의 기본 특징들 문학동네 인문 라이브러리 3
한스 게오르크 가다머 지음, 임홍배 옮김 / 문학동네 / 2012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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품절


진리와 방법을 읽었다. 이 대작을 읽자니 머리가 지끈 지끈 아파오기도 한다. 30분에 30페이지씩 천천히 음미해가며 읽었다. 재미있는 책이다. 아무튼 1권에서 주된 이야기를 하는 것은 첫째, 이책의 방법론과 주된 이야기를 하게 되는 이유를 이야기 한다. 즉, 존스튜어트 밀의 논리를 이용하여 이책이 어떤 방향으로 나가는지에 대해서 논했다. 철학이나 다른 인문학적 고찰은 될수 있으면 역사를 고려하는 귀납적 방법을 채택한다고 말한다. 어찌보면 이것은 타당한 이야기가 아닐지 모른다. 우리가 가지는 미학적 고찰과 그로 인한 해석을 다루는 문제이기에 해석적 고찰이 넓혀지는 한에서 귀납적 방법은 맞는 말이다. 물론 경험이라는 것 자연미에 대한 경험으로 인한 연역적 과학 추리도 이 해석학에서 다루어야 하는 내용임에도 틀림없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귀납적 논리를 채택한 이유는 아무래도 자신이 주장하고자 하는 내용을 어떻게 전개해나갈지에 대한 논의이기 때문이다. 이책은 아무래도 자신의 주저인 이 책을 쓴 나이만큼이나 노신사가 쓰는 자신의 지적 노력이 다담겨 있는 대작이다. 그렇기에 자신의 지식을 버리기는 아깝고 그로 인한 좋은 시각을 발전하는 과정이 이 책이다. 귀납적 방법으로 책은 천천히 자신이 주장하려고 하는 것에 대해 발전 하는 모습을 보여준다. 이책의 첫번째 책은 내가 보기엔 미학에 대해서 어떠한 이야기를 하려고 노력한 모습이 보인다. 어느 연유인지는 모르겠지만, 해석학으로 점점 그 고개를 트는 모습이 보여준다. 12년이라는 세월동안 사람은 변하지 않겠는가 그만큼 이책도 다양한 변화에 직면하게 된다. 맨처음 칸트에 영향을 받은 티가 너무많이 난다. 특히, 판단력비판에서 이야기 하는 취미에 대한 이야기나 판단력에 대한 이야기를 보면 그 영향이 실로 지대하다. 칸트의 미학에서 추출한 자신의 생각을 정당화하기 위해서는 여러가지의 노력이 필요하기 때문이다. 그러나, 가장 주된 이야기가 해석학이 될거라는 생각을 안한것은 아닌것 같다. 우리의 진리에 대한 탐구이지만, 이책은 우리의 한계를 지적하는 책이기에, 체험이라는것 경험이라는것에 대해서 재미있게 역사적으로 조망하며 분석하고 있다. 우리는 취미를 통해서 여러가지를 배우고 경험하고 체험하게 되는 것이다. 그로 인한 발전과 예술과 미학은 실제로 엄청나다. 또한, 이책에서 주된 이야기가 되는 것중의 하나가 바로 놀이에 대한 개념이다. 우리는 놀이로 인해서 ,지적유희,로인해서 책을 읽으면서 즐거움을 느끼고, 미술작품을 느끼며 재미를 느끼고, 음악감상을 하면서 유희를 하게 되는 것이다. 이 내용에 대해서는 난 신학과 교수님이 신학은 지적유희를 즐기는 상황이 아니라고 했다. 신의언어는 우리가 지적 유희를 하는 도구가 아니라는 것이다. 이것은 그 교수의 말인지, 가다머가 그렇게 말했는지 잘 모르겠다. 맞는 말이다. 즉, 놀이로 인한 인간의 사유는 그 결론은 왜곡으로 가게 될수 밖에 없는 것이다. 인간은 그 사유가 왜곡에 정점을 두고 있다는 것을 알아야 하는 것이다. 올바른 이해로의 접근을 하기 위해서 이책은 아무래도 자신이 지적으로 많이 알고 있다는 것을 이야기 한다. 그게 사실이니까 부인할수가 없다. 사실 60살에 이책을 내놓았는데 맨날 철학책만 주구장창 파고 살았는데 그게 당연한 이야기다. 사실 이책을 이해하려면, 철학사를 읽는것으론 부족할거 같다. 고대 그리스 철학에 대한 이해와 현대 철학에 대한 이해 신학에 대한 이해, 헤겔과 칸트 하이데거의 이해, 슐라이어마허같은 신학자에 대한 이해가 필수적이다. 좀 어렵다는 이야기다. 1권에 대한 내용은 여기 까지다.

 사실 1부에 대한 내용이 있는 이 내용이 왜 쓰여졌는지 잘 이해가 가지 않는다. 해석학적 고찰로서의 발전은 2부에 본격적으로 드러나기 때문이다. 2부에서 하는 이야기는 역사적 고찰로 이끈다. 귀납적 방법이다. 이 책을 쓰게 된 가장 근본적인 역할을 하게 된 사람은 슐라이어마허이다. 이 근본없는 새끼 아무튼 내가 싫어하는 슐라이어마허이다. 그놈때문에 자유주의 신학이 발전하게 되었다. 슐라이어마허의 도전적인 말이 있다. 텍스트를 통해서 그사람보다 더 많은 것을 파악하여 알수 있다는 말이다. 슐라이어마허의 말하나로 신학적 해석학이 촉발되었고 인간이성만능주의라는 꽃을 피게 되었다. 슐라이어마허에 말에 반박하려고 생각해 두었던 나는 아무래도 역사라는 것은 인간 하나가 쓴것이기에 한계가 분명하다 저자의 쓴 내용을 알지 못하고 그사람의 삶의 이해가 전제되지 않고 인간의 근본적인 한계인 역사와 텍스트만 가지고 이해하는것은 불가능하다고 이야기 하고 싶었다. 이걸 안 가다머는 역사적 고찰을 시작했다. 랑케 드로이젠 후설까지 역사의 근본적인 관념론에 가까운 헤겔이 하던말을 반복하는 내용을 이야기 하게 되었고, 이걸 뛰어넘은 가다머의 스승 하이데거가 근본적 해석학에 도달했다고 결론 짓고 자신은 그 해석학을 발전 했다고 여기는 사람이 바로 가다머이다. 하이데거가 이야기 하고자 하는 해석학의 근본은 진리의 빛이 열리는 그 순간을 경험하는 현존재로서의 가능성을 이야기 했다. 이 내용을 이해하고 싶다면 내가 쓴 잠언 글을 읽어보시라! 그렇지만 인간적 상황의 한계가 분명한 그 상황을 직시하라는 내용으로 선이해에 대한 개념이 생기게 되는 것이다. 선이해라는 말은 한마디로 글로 지차면 컨텍스트 문맥이라는 내용이다. 우리의 역사적 상황이라는 것이 어쩔수 없이 모든것을 이해하려면 그 선이해가 동반된다는 것이다. 이 주장은 타당하다고 여겨진다. 다시 말하면, 슐라이어마허가 도전했던 저자보다 더 많은 저자에대해서 더 많이 이해한다는 그 오만한 발상이 거짓이라는 것이다. 그렇지만, 슐라이어마허에게 영향을 받은 가다머는 해석학적 도전을 긍정하고 있다. 이 선이해가 있다는 것을 인지 하면서도 저자의 지평과 독자의 지평이 만나는 지평융합을 이야기 하며 해석학적 가능성에 대해서 이야기 하는게 이책이다. 모든 것에 대해서 해석학적 지평에 대한 언급이 필요하다는 것에 대해서 아리스토텔레스의 해석학적 고찰을 이끌어내는게 매우 흥미롭다. 아리스토텔레스가 형이상학과 윤리학을 나누면서, 윤리학에 대해서 언급하면서 자연법이 분명히 존재한다고 이야기 하며 윤리학이란 인간이 가지고 있는 윤리를 확정하는게 아니라 테두리만 정해 놓는 것이라고 한다. 그로인해서 우리는 그 윤리학으로 해석하는 존재라는 이야기를 하는게 아리스토텔레스라며, 근본적인 해석적 모티프를 얻었다고 자부하는 것이다. 또, 3부에서는 언어적 고찰을 시작한다. 해석이라는 것이 바로 언어에 대한 해석임에 분명하기 때문이다. 사실 미학적 결단과 해석을 원했으면서 언어에 대한 언급은 자기가 문헌학적인 해석학에 대한 지평을 열어야 겠다는 결심을 보여주는 반증이다. 3부에서 플라톤의 이데아론을 착상하여 모상과 모상의 복제품 원상을 이야기 한다. 언어라는 것이 현존하는 존재에 대해서 모방하는 모상과 원상의 모습을 보여주는 이야기를 한다. 또한 소크라테스의 변증법을 이끌어 들어 산파법으로 파고드는 질문과 그로인한 대답과 무지에 대한 발견은 우리의 사변을 통한 변증적 발전을 이끌어주는 해석학적 고찰이라는 결론을 이끌어낸다. 인간의 사변은 끊임없이 자신과 텍스트로 인한 대화로 사변적 변증적 관계라는 것을 밝히는 것은 흥미로웠다. 여기서 이야기 하는 모든 내용은 아무래도 진리를 이끌어내는 방법이라기 보다는 진리를 인간은 전혀 알수가 없고 해석학적 가능성에 갇힌 무력한 인간이라는 사실을 주지하고 있다. 물론 인간이 해석이라는 것을 하면서 자신의 입장을 이야기 할수는 있을 것이다. 그러나 나의 지평과 저사람의 지평을 이야기 한다는 것 본래의 의미를 완벽하게 이해하는것 그것은 허상이라는 것이다. 지평융합이라는 이야기를 하면서 가능성을 이야기 하지만, 근본적으로는 인간의 한계를 지적했다는 점에서 높이 평가받을만 하다. 또한, 하이데거, 비트겐슈타인 이래로 죽었던 현대철학의 가능성을 이야기 해서 다시 학문적 부흥을 이끌어내는 해석학적 가능성을 보여준것이 참으로 놀라운 일이다. 여기까지가 2부,3부 내용인 2권의 내용이다.

 하버마스의 비판과 마찬가지로 이런 비판이 가능하지 않을까 싶다. 사실, 지평융합이 나왔기 때문에 학문적 부흥을 이룰수 있었다. 그러나, 우리가 이 진리의 서광이 비추는 그곳에 머무를수 있고, 저자의 이해에 다가가지 않더라도 텍스트의 올바른 이해에 다가갈수 있는 것인가 라고 반문하고 싶다. 회의적인 이야기가 아닐지 몰라도 우리는 그런 가능성이 전혀 없고 사실 현존재로서의 가능성이 과연 열리는 것인가라고 물어보고 싶다. 현존재 그것 자체가 아무래도 너무 이상적인 이야기가 아닌지 존재물음의 가능성이 계속 유지되어 그것이 존재의 빛이 열리는지 그건 좀 회의적이라고 이야기 하고 싶다. 과연 현시대의 현존재로서의 가능성으로 이어진 기술들이 현존재인지 궁금하고 현존재가 만일 아니라면 진짜 현존재가 가능한것인지 그게 궁금하다. 우리가 존재의 거기에 거할수 있는 것인지 무에서 이끌어내는 현존재로서의 가능성은 아무래도 인간이라면 거의 불가능에 가깝지 않을까 한다. 학문을 하는 사람이나 모든사람이 그게 가당키나 한 이야기 일까? 망치를 쓰는 이야기로 해서 그 존재 가능성을 이야기 하고 현존재에 대해서 이야기 하지만, 과연 그것이 그 존재에 대한 현존재를 밝히는 정당한 이야기 인가라고 반문하고 싶다. 망치라는 존재가 망치라는 도구로서 현존재가 드러난다고 이야기 한다면 그것은 망치에 대해서 조금 다른 생각의 가능성을 축소 시키는게 아닌지 모르겠다. 아무튼 갑자기 하이데거를 비판하는데, 가다머가 하이데거에 너무 영향을 받아서 그 생각에 함몰되어 하이데거의 현존재에 대한 가능성을 선입견과 선이해라고 이야기 하는지 모르겠다. 물론 비판적 발전은 맞다. 그러나 하이데거가 이야기하는 해석학적 틀은 전혀 벗어나지 못하고 있는것 같다. 현존재로서의 가능성 존재물음의 지속 이게 끝이고 지평융합은 거기에 덧붙여진 내용일 뿐이라는 것이다. 가다머는 어쩌면 발전자로 보이기는 하지만 역사에 대해서 하이데거의 생각에 덧붙여 놓은 해석자에 불과하다는 것이다. 그렇다면 결론은 아무래도 우리가 가져야 할 것은 가다머처럼 역사를 통해 발전하는 내용을 점점 발전 시켜야 한다는 내용인데, 이말은 헤겔의 변증법에 나와 있는 내용과 비슷하다. 랑케와 드로이젠이 헤겔에 가까워 졌다고 이야기 하면서 자기도 그 이상을 꿈꾸며 헤겔의 절대정신에 가까워 지려고 노력하는 한사람이라고 보여진다. 물론 해석학적 고찰이 절대정신을 추구하지는 않는다. 그렇지만 해석학적 목표가 랑케나 드로이젠이 이야기 했다 싶이 그 귀결점이 절대적 발전의 이상이라고 보여진다. 자신도 그것을 알고 있는것처럼 마지막에 헤겔의 변증법을 조금 긍정하는 듯한 뉘앙스를 풍겨주었다. 이상적인 이야기지만 우리는 그 역사적 사실에 가까운 것을 접근하는 것 조차 불가능하다. 왜냐하면 우리는 시간적 존재이기 때문이다. 우리는 시간이 흘러가면서 죽음을 향해 달려가는 존재이지, 과거와 완벽한 대화를 할수 없는 존재이기 때문이다.

 여러가지로 회의적인 이야기를 했지만, 이책은 여러모로 좋은 책임에는 틀림이 없고 재미있는 책이다. 읽으면서 많은 생각을 해봤으면 한다. 가다머는 엄청난 학자임에 틀림없다. 그러나 내 생각으로는 선이해를 이야기 하는것으로 끝나 인간의 한계에 지적하기만 했다면 더 좋았을것 같았다. 지평융합이란 인간에겐 사실상 텍스트에게도 거의 불가능에 가깝지 않나라고 생각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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