실어증 환자
계영수 지음 / 미다스북스 / 2025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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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평 -
<실어증 환자>는 말을 잃은 개인의 병리적 상태를 다루는 이야기이기보다 우리가 살아가는 시대 자체가 어떤 종류의 실어증에 걸려 있는지를 묻는 소설처럼 느껴졌다 말을 이해할 수 있지만 제대로 표현하지 못하는 실어증과 말을 알아듣지 못하면서도 의미 없이 말은 잘하는 실어증 이 두 가지 유형의 실어증은 더 이상 병원의 진단명이 아니라 오늘을 살아가는 우리의 일상 언어가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들었다

소설 속 인물들은 끊임없이 말하고 설명하고 설득하지만 정작 서로를 이해하지는 못한다 가족 안에서도 공동체 안에서도 말은 넘쳐나는데 의미는 사라져 있다 그 모습은 소통의 부재 속에서 인간이 점점 파편화되어 가는 오늘의 현실과 닮아 있다 특히 초현실 탈진실의 시대라는 표현이 떠오를 만큼 진실과 거짓 감정과 계산이 뒤섞인 세계에서 인물들이 겪는 혼란은 낯설지 않았다

이 소설이 인상 깊었던 이유는 실어증이라는 개념을 개인의 장애로만 한정하지 않고 역사와 사회 언어와 권력의 문제로 확장해 나가기 때문이다 1980년대와 90년대 미국 엘에이로 이민을 떠난 두 가족의 디아스포라 서사는 한국 현대사의 격변과 미국 이민 사회의 현실을 동시에 비춘다 한국에서 겪은 폭력과 침묵 미국에서 마주한 차별과 생존의 언어 이 모든 것이 마치 되비우스의 띠처럼 안과 밖을 구분할 수 없게 얽혀 있다

특히 인물들이 과거의 사건을 각자 다른 방식으로 기억하고 말하는 장면들이 오래 남았다 같은 사건을 두고도 누구는 침묵하고 누구는 과장하며 누구는 끝내 말하지 못한다 그 차이는 기억의 문제가 아니라 살아남는 방식의 차이처럼 보였다 말을 잃은 사람보다 더 위험한 존재는 아무 의미 없이 말을 반복하는 사람이라는 생각도 들었다 이해하지 않으면서 말하는 언어는 결국 또 다른 폭력이 될 수 있기 때문이다

수십 년의 세월 속에서 어떤 인물은 좌절하고 분노하며 어떤 인물은 성장하고 화해한다 그러나 그 모든 변화의 중심에는 언제나 말하지 못한 것들 말해지지 않은 진실이 놓여 있다 만약 모순이 가려진 진실이 소통하고 싶어 드러낸 얼굴이라면 우리는 그 얼굴을 얼마나 정직하게 마주하고 있는지 스스로에게 묻게 된다

이 소설을 읽으며 가장 크게 공감한 부분은 인물들이 모순을 자각하지 못한 채 살아가는 모습이었다 모순 속에 있다는 사실조차 인식하지 못하는 상태 그것이야말로 가장 깊은 실어증일지도 모른다 우리는 너무 익숙하게 말하고 너무 빠르게 판단하며 너무 쉽게 편을 나눈다 그 과정에서 의미 있는 언어는 점점 사라지고 이해보다는 소음만 남는다

<실어증 환자>는 한 개인의 회복 서사가 아니라 한 시대에 대한 기록이자 증언이라는 말이 정확하게 느껴진다 이 소설은 독자에게 해답을 주기보다 질문을 남긴다 우리는 지금 어떤 실어증을 앓고 있는가 우리는 과연 서로의 말을 이해하려 하고 있는가 아니면 이해하지 않은 채 말만 쏟아내고 있는가

책을 덮은 뒤 말하는 것보다 듣는 것이 이해하는 것보다 멈춰 서서 생각하는 것이 얼마나 어려운 일인지 다시 느끼게 되었다 실어증 환자는 조용하지만 날카로운 소설이다 읽고 나면 세상의 언어가 이전과는 조금 다르게 들린다 그리고 그 낯설음은 쉽게 사라지지 않는다

@midasbook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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