야생의 책
후안 비요로 지음, 보탬 옮김 / 열림원 / 2026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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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생의 숨박꼭질 대상이 있다면, 내게는 싱겁게도, 아니 거창하게도 책이다. 10대 시절, 대학생이던 10살 터울 친족의 책장 안 책들은 미지의 세계로 통하는 수많은 문들과 같았다. 책 한권을 빼 읽으면, 그 책이 있었던 빈 공간만큼 세계를 보고, 이해할 수 있으리라는 막연한 기대와 들뜸.(순진도 하지!!) 징글징글하게 몸과 마음에 든 습에 취약한 종인지라, 수 십 년이 지난 지금도, 나는 여전히 책에서 무언가를 찾는다.(순진도 하구나...) 책과 책 사이의 빈 공간에 눈을 대고 금붕어처럼 눈을 끔뻑인다.

하지만 일생의 연애에도 권태는 찾아오는 법, 책과의 연애도 예외는 아니다. 책에게 무엇을 원하나(진리, 진실, 믿음, 웃음, 깃발, 장미, 빵, 나무, 기차, 바다, 생크림, 맥주, 소화제, 해열제.. 해독제...근육이완제....... 수면제, 박멸제,............ .... &%$%&........구원.......... ??), 너무 시끄러운 책(과잉), 너무 과묵한 책(결핍), 거추장스러운 책(다른 의미의 과잉과 부담), 찾을수록 꽁꽁 숨어버리는 책(밀고 당기고). 사랑의 연료라 할 수 있는 호기심이 말라붙어 만사(책사)가 심드렁해진 이때 이 책의 카피가 눈에 들어왔다. 스스로 움직이고, 독자를 선택하는 책이라고?? 제목도 <야생의 책>. (제목을 볼 때마다, 반사적으로 ‘야성의 엘자’, 동시에 사자의 포효가 울려 퍼진다. ..연식이...)

제목으로 호기심에 기름을 붓는 <야생의 책>. 야생성을 간직한 책이라는 설정 자체가 매혹적이다. 야생성이란 무엇인가? 길들여지지 않고, 제 본성대로 살아가는 성질이지 않은가. 책춘기, 책태기 중인 내가 찾던 책이 바로 이것 아닌가. 세련된 포장으로 무한 복제되는 동어 반복의 책이 아니라, 제 생명력으로 오래도록 살아남아 성질대로 으르렁대는 책. 그래서 펼쳤노라, 읽었노라.


과연 그랬다. 소년 후안, 소녀 까따리나가 탐험에 나선 띠또 삼촌의 도서관에 꽂힌 책들은 살아있을 뿐만이 아니라 본성대로 제 삶을 살고 있다. 그 책들은 각자 움직이고, 창조하고, 꿈꾸고, 찾아 나섰다. 동시에 서로 교류하고, 시샘하고, 상처주고, 충고하고, 위장하고, 훔치고, 달아나고, 협력한다. 후안과 까따리나는 이 기묘한 도서관에 머무는 동안 책들의 삶과 생태를 깊게 관찰한다. 소년이 내게 들려준 책의 생리와 생태는 이렇다.


한 권의 책은 거울이자 호수이다. 책은 세상을 비춰 독자에게 길을 제시할 뿐만이 아니라 독자 자신을 비춰 자신을 직면하게 한다. 용기 있는 독자는 책의 수면에 투영된 자신을 받아들인다. 좋은 책일수록 수심이 깊다. 이런 책은 깊이 들어다 볼수록 많은 이야기를 들려준다. 책은 “소리 없이 작동하는 모터”를 가진 “가장 훌륭한 교통수단”이다. 빛과 에너지를 가진 글자는 독자에게 삶의 심해를 탐험할 수 있는 용기와 지혜의 힘을 길러준다. 과거로, 미래로, 지하로, 대기권 밖으로 멀리, 멀리까지 오염 없이 데려간다.


훌륭한 책은 훌륭한 독자다. 이 놀라운 책들은 독자를 읽는다. 사람마다 지문이 다르듯 저마다 다른 삶과 마음을 가진 독자를 유일무이한 존재로 알아보고, 그들과 친구가 되어 오랜 세월에 걸쳐 길고 긴 대화를 나눈다. 책에는 저자의 영혼이 잠들어 있다. 책과의 교분은 잠자는 책의 영혼과 내 영혼을 흔들어 깨우는 것으로 시작된다. 약효를 얻기 위해 약병을 흔들 듯, 타인과의 만남과 성장을 위해 영혼이 흔들리는 것을 두려워해서는 안 된다.

책은 시간이 합류해 소용돌이치는 장소다. 책은 “인류의 외부 기억장치, 즉 기억의 창고이다.” 동시에 책은 인류의 상상력이 만들어낸 미래의 인큐베이터이다. 하지만 그 책을 지금 이 순간 펼치지 않으면 과거도, 미래도 현재로 끌어올 수 없다. 책을 읽는 행위는 기억의 과거와 희망의 미래를 현재라는 순간에 포개놓는다. 내 위치를 파악하는 것은 모든 것의 시작이다. 책은 되어 진 세계와 되어 질 세계, 되어 진 나와 되어 질 나 사이의 거리를 측정하고 조정해준다.


하나의 책은 하나의 계단이다. 충성스러운 책들은 독자가 가려고 하는 목적지를 향해 기꺼이 계단이 되어준다. 한 권의 책은 다른 한 권의 책을 부르게 마련이다. 이렇게 연쇄적으로 호명된 책들이 모여 지상으로, 혹은 지하로 이어진 책의 계단이 만들어진다. 독자는 그 계단을 딛고 호기심이 이끄는 대로 낯선 세계로 나아간다. 발밑에 내 눈길이 속속들이 닿은 지지대가 느껴지면 그 낯선 세계로의 모험이 조금은 덜 두려워진다.



책의 삶은 함께 읽힐 때 더 풍요로워진다. “강물처럼” 책을 읽는 독자들은 서로의 독서 경험을 나눔으로써 책의 흐름을 계속 바꿔놓는다. “강물처럼” 책을 읽는다는 건 세계가 흘러가는 맥락을 책의 맥락에 이을 줄 아는 능력이 아닐까. 독자가 생각해 낼 수 있는 맥락의 양과 질에 따라 한 권의 책은 다르게 독해된다. 하나의 책에 대한 저마다의 독해가 한 자리에 모인다면 그 책은 더 이상 한권의 책이 아니다. 함께 읽은 독자의 배수만큼 겹겹의 책을 품은 비옥한 책이 된다.

신비한 도서관에 관한 소년의 이야기는 이어진다. 계속되는 책의 비밀들은 미래의 독자들을 위해서 남겨둔다. 이 책을 읽다보면 비유가 아닌, 진실로 도서관은 영혼의 숲이라는 생각을 하게 된다. 세계의 소리를 듣고, 다시 쓰여 지고, 잠자고, 침묵하고, 깨어나고, 말 걸고, 독자를 하염없이 기다리는 영혼들. 그들이 거주하는 장소. 책의 피부가 나무의 섬유로 만들어진 사실까지 얼마나 근사한가. 그래서 영혼의 숲, 도서관에서는 나무의 살결이 전하는 촉감과 향기로 책의 영혼을 느낄 수 있다.



이 멋진 장소에서 진정한 독자는 진정한 저자가 된다. 영혼의 미로와도 같은 도서관은 보이지 않는 기억의 문신들로 빼곡하다. 그 문신들은 읽고자 하는 간절함 앞에서만 모습을 드러낸다. 독자의 간절함이 텍스트를 세상에 내놓는 것이다. 현재 진행형으로, 매 순간 쓰여 지기를 원하는 책. 그런 만큼 세계의 생생한 현실을 살아가며 과거와 미래를 현재의 시점으로 해석할 지혜를 갖춘 독자, 자신을 간절하게 원하는 독자에게만 빈 페이지를 열어 보이는 책. 길들여지기보다는 차라리 사라지기를 선택하는 책. (성깔!!)



이 책이 소년이 그토록 찾아 헤맨 야생의 책이다. 만만치 않은 책은 만만치 않은 독자를 원한다. 고집스럽고, 까다롭기 그지없는 것이 영락없이 삶과 닮았다. 내가 원하는 내용을 읽기 위해서는 내가 직접 써야하는 빈 페이지들의 삶. 내 앞에 펼쳐진 빈 시간의 페이지. 이 책은 이렇게 책과 독서, 삶에 대한 은유로 가득하다. 책이 시공간의 경계를 넘어 우리에게 도착하듯, 후안의 동생 까르멘이 존재의 경계를 넘어 인형들과 대화하듯, 이 책은 책과 책, 책과 독자, 저자와 독자 사이의 경계를 허물고, 교란하고, 전복시킨다. 책과 독서, 삶의 관계에 대해 근본적인 질문을 던진다.



“내 생각에 우리는 좋아하는 책을 진심으로 열심히 찾는 지극히 평범한 독자일 뿐이었다.” 좋아하는 책의 내용이 무엇이든, 열심의 강도가 얼마이든, 관건은 ‘진심’이 아닐까 싶다. 마지막에 야생의 책을 알아본 것은 까르멘의 봉제 인형 토끼였다. 까르멘이 진심으로 믿은 인형의 생명이 이 탐험의 마지막 퍼즐을 맞춘 것이다. 야생의 책은 “글자 없는 책”이다. 빈 공간을 어떻게 채워야 할지 소년도 나도, 이 탐험으로 배웠다. 내 삶의 최초 독자도 나, 최후 저자도 나이다. 괜히 심각해질 필요는 없다. 우리에게는 언제나 빈 페이지들 앞에 전전긍긍하는 다른 친구들이 있으니까. (없다고? 이 책을 펼쳐보시라. 여럿 만날 수 있다.)

PS. 미래의 독자는 과거의 맛이 나는 짭짤한 쿠키와 미래의 맛이 나는 달콤한 쿠키, 오묘한 맛의 현재의 쿠키를 준비하고 책 읽기를 권한다. 이 책은 입맛도 야생으로 돌려놓아 온갖 음식과 레시피로 식욕을 자극하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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리스펙토르의 시간
엘렌 식수 지음, 황은주 옮김 / 을유문화사 / 2025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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느른한 혼침에서 흔들어 깨우는 음성과 향기. 내면의 가장 어둡고 외진 바닥에 무겁게 침전되어 있던 존재의 입자들이 누군가의 향기로운 입김에 동요하며 먼지처럼 가벼이, 사방으로 부유하며 떠오른다. 그 입김은 클라리스 리스펙토르의 날숨이며, 엘렌 식수의 들숨이다. 달큼한 그 숨결에 나라고 불리는 그것이 사방으로 흩어져 은빛으로 날아오른다. 이 텍스트는 시인가. 주문인가. 기도인가. 응답인가. 아니면, 오렌지의 황금빛 노래? 시초에서 들여오는 누군가의 부름? 천둥? 모든 것인가, 그 어떤 것도 아닌가.


오래된 동굴 속 벽화를 만지듯, 클라리스 리스펙토르의 단어들을 더듬다보면, 내가 읽힌다는 숨죽인 기쁨에 가슴이 죄어든다. 은총이란 이런 것일지도 모른다. 늘 거기에 머무르기에 가장 익숙하지만 가장 외진 장소. 그곳에 도달하는 한 줄기 빛, 발견됨의 안도감, 기이한 공포감. 탐독되기를 바래온 묵은 페이지, 독해를 기다려온 뭉개진 비문. 비석의 축축한 이끼에 닿는 따스한 손길. 섬광 같은 구원. 하지만 이내, 궁극의 무명으로 되돌려놓는 섬뜩한 지혜, 자애로운 배려, 최후의 은총. 내가 너무도 간절하게 원하고 원하는 그것.


“나에게는 말하고 싶지 않은 여자들이 있다.” (9p)


엘렌 식수는 이 책을 여는 글, <오렌지 살기>를 이 한 문장으로 연다. 망설임과 유보의 유혹, 그럼에도 말해야 한다는 당위가 문장을 압박한다. 나는 단번에 알아차린다. 내가 들은 목소리를 원형으로 간직하고 싶은 조바심, 그 목소리와 함께 달아나야한다는 절박함. 언어가 그 목소리를 얼어붙게 할 거라는 불길한 예감. 세계를 직관으로 알아채는 커다란 귀이자 “고통을 끊임없이 기쁨으로 맞바꾸는” 선한 목소리. 이 책은 그 목소리에 대한 사랑으로 출렁인다. 그 목소리는 클라리시 리스펙토르이다.


“그것은 단순한 글쓰기 이상이었고, 위대한 글쓰기, 먼 과거의 글쓰기, 대지와 식물의 글쓰기였다.” (13p)


혀가 전부 죄어든 시대에 글쓰기의 자기 심판에 절망하던, “눈물 한 방울이 된 영혼”, 엘렌 식수다. 그에게 반짝이는 손이 다가온다. 그 손은 식수를 찾아내 열망과 믿음과 음악을 되돌려 준다. 그것은 놓아주고, 보살피고, 구원하는 손이다. “무한히 섬세한 손길”은 존재에 빛을 비추고, 신비를 보호했다. 생명을 감싸고 흙을 어루만졌다. 우리의 영혼을 만나러 “손으로 변모한 목소리”, 약속과 기도로 번역된 목소리. 리스펙토르의 목소리가 식수를 울린다.


“오렌지는 하나의 순간이다. 오렌지를 잊지 않는 것이 중요하다” (17p)


리스펙토르는 “오렌지를 구해야 해”라고 식수의 귓가에 속삭인다. 말라가던 식수의 심장이 오렌지의 힘으로 솟구친다. “현전하는 빛의 구”, “초록빛 밤으로부터 내려온 붉은 낮”, 오렌지. 태양과 대기와 대지로부터 잉태된 오렌지. “모든 오렌지는 기원적이다.” 무한한 시간을 응축한 오롯한 한 순간인 오렌지. “근심 없이, 두려움 없이” 시간의 과즙을 탐하여, 오직 생명의 기쁨으로 찬란한 과육을 길러내는 오렌지. 순간이자 영겁인 오렌지. 리스펙토르의 “기원을 향한 사랑”이 식수를 가늠조차 어려운 시간으로 데려간다. 오렌지의, 오렌지를 위한, 오렌지로 사는 것. 시간은 그렇게 과거와 미래로, 현재로 순환하며 황금빛 알갱이로 영글어간다.


“그것은 누구도 되지 않는 것, 마치 장미처럼, 모든 이름을 앞선 순수한 기쁨이 되는 것이다.” (30p)


리스펙토르는 이름들을 벗어던진다. 그가 무한히 변신하며 관통해온 시간의 터널 속에서 호명되었던 무한한 이름들. “벗어던짐의 규모는 무한힌 뻗어간다.” 왜냐하면 이름 속에서 그녀는 질식해 죽어버리기 때문이다. 자아의 막을 벗어던지고 “아무것도 아닌 자”가 되는 것은 나라고 불리는 그것이, 본래 세계와 하나였음을 지각하는 것이다. 세계의 맥박, 그 혈류와 한 몸임을 자각하는 것. 그렇게 껍질을 벗어던진 리스펙토르가 당도한 장소는 “원초적이고 온전한 우리, 번역 이전의 살아있는 우리”로 차오른다. “죄의식의 신분증”없이 현존할 수 있는 이 공간은 “숭고한 야생성”으로 충만하다. 이 장소로의 여행은 오렌지, 오직 오렌지로부터 시작되어야 한다. 오렌지는 장미이며, 동시에 바퀴벌레이다. 리스펙토르이며 식수이며, 나이다.


"그녀는 나를 읽었다, (중략) 나는 그녀가 나를 읽게 했다. 그녀는 내 안에서 자신을 읽었다.” (34p)


이 문장을 읽고 놀라 안으로 탄성을 삼켰다. 클라리스 리스펙토르를 읽으며 늘 해온 생각, 이 문장으로 밖에는 표현이 안 되는 어떤 것. 이해, 공감, 교감 같은 언어로는 턱 없이 부족한 것. 이 책을 처음 펼치는 순간에도 이 생각이 스쳐 지나갔다. 그녀는 나를 읽어. 세상은 참 신기해. 식수가 썼듯 “어떤 여자들은 경계심 없이 창문을 열어두는 힘을 지녔다” 그 창문으로 뜻밖의 은총이 찾아든다. 어떤 저자와 독자는 서로를 알기도 전에, 영원히 만나지 못해도, 서로를 읽는다. 서로를 쓴다. 세상은 참 신기한 곳이다.


“별과 나 사이의 거리는 얼마나 먼가, 얼마나 믿을 수 없을 만큼 가까운가.” (148p)


식수가 더없이 느리게 노 젓는 배에 올라 <리스펙토르의 시간>을 나아간다. 희부연 은하수 안에 별의 항로를 떠간다. 영영 길을 잃기 위해 나아간다. 그러나 언제나, 영영 돌아온다. 그 길을 따라 광대하고 둥근 존재의 불빛이 환하게 밝혀진다. 별의 시간이 내 안으로 흘러들어온다. 나라 불리는 그것이 별의 시간 안으로 쏟아져 흘러나간다. 나는 무궁한 자유 속에 헤엄친다. <리스펙토르의 시간>, 그러니까 <별의 시간>은 마카베아의 시간이며, 리스펙토르와 식수, 그리고 나의 시간이다. 가난하고 부유한 시간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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리스펙토르의 시간
엘렌 식수 지음, 황은주 옮김 / 을유문화사 / 2025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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을유 문화사가 발췌한 내용에 따르면

<탐독>의 뜻은 이렇다.


1. 다른 일을 잊어버릴 정도로 어떤 글이나 책을 열중하여 읽음

2. 어떤 글이나 책을 특별히 즐겨 읽음.


리스펙토르와 식수야말로 탐독이라는 매혹적인 행위에 어울리는 작가들이 아닌가. 그들의 텍스트를 읽다보면, 그들이 풀어놓은 언어의 그늘 아래에 시간이 농밀하게 고임을 느낀다. 행간에 고여 그들이 이끄는 대로, 전혀 다른 시간대로 다시 밀려 흘러가는 시간들.


그건 어쩌면 ‘별의 시간’인지도. 별에게 시간은 어떤 것일까. 작품을 읽다보면 인식하게 되듯이, 리스펙토르에게는 전혀 다른 차원의 시간이 흐른다. 식수는 그 ‘리스펙토르의 시간’에 배를 띄운다. 그 배가, 오늘 잠깐 멈춰 서, 나를 태운다.


지난 4월 23일 ‘세계 책의 날’을 맞아 을유문화사에서 <탐독>이라는 주제로 연 행사에 선정되어 선물로 받게 된 책. 더없이 싱그러운 계절, 5월을 열어준 선물이 클라리시 리스펙토르와 엘렌 식수라니. 꽉 쥐었던 손바닥을 푸르게 쫙 편, 저 연둣빛 잎새들처럼 내 마음도 사방으로 펼쳐진다. 감사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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누가 제인 오스틴을 두려워하랴 - 새로 읽는 버지니아 울프 에세이와 두 편의 시
버지니아 울프 지음, 이루카 옮김 / 아티초크 / 2026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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울프와 함께 제인 오스틴을 읽는다는 것

- 제인 오스틴, 모두가 두려워하는 부지깽이

한 작가를 사랑한다는 것은 어떤 일일까. 우선, 그의 작품을 반복해서 읽는다, 누군가 제일 좋아하는 작가를 묻는다면 그를 제외한 나머지 작가를 얘기한다, (그것은 조금은 비밀 연애 같은 것이다.) 그 작가와 자주, 어디든 동행한다. 어떤 장면이나 사건 앞에서 그 작가와 침묵의 대화를 나누곤 한다. 이럴 때 작가와 독자의 관계는 내밀한 어떤 것이다. 사실 그 작가에 대해 말하는 것은 어렵다. 소중한 감정이 잘못 전달되어 훼손되는 느낌을 피하고 싶고, 무엇보다 짧게 전달할 수 없는 깊은 내면과 연관되기 때문이다. 그들은 같은 별의 거주민이다.

그 은밀한 연인이 또 다른 작가에 대해 “여성 작가 중 가장 완벽한 예술가”, “작품으로 영원히 살아남을 작가”라는 찬사가 담긴 정성어린 에세이를 남겼다면? 그 에세이를 읽는 것은 더 없이 충만한 데이트가 된다. 연인을 성장시킨 사람과의 만남을 통해 연인에 관한 이해의 조각을 하나 더 갖게 되니 흥분되는 일이다. 제인 오스틴에 관해 쓴 버지니아 울프의 비평을 읽으며, 버지니아 울프에 의해 쓰여 진 제인 오스틴을, 제인 오스틴을 쓰는 버지니아 울프를 동시에 대면한다. 별에 먼저 살고 있던 거주민이 있었던 것!

에세이 <제인 오스틴, 모두가 두려워하는 부지깽이>를 읽는 일은 버지니아 울프와 함께 제인 오스틴이라는 견고한 성으로 입장하는 일이다. 작은 목사관을 넘어 “우주라는 좌표” 속에 자리한 그 성은 요람에서부터 이미 선택해 놓은 문학의 왕국이었다. 울프는 제인 오스틴이 “그 영토를 다스릴 수 있다면 다른 것은 탐하지 않기로 요정에게 약속했다”고 쓴다.



울프에 의하면 제인 오스틴은 어린 나이에 이미 타인에 대한 환상은 물론이고 자신에 대한 환상은 더욱 없었다. 냉철한 관찰과 글쓰기는 감상이나 연민, 격정의 외풍을 일찍부터 차단했다. 스스로 쌓은 경계를 지킴으로써 자신의 문학적 왕국을 냉정하게 통치했고, 그 결과 “영속적 품격”을 지닌 문학의 성채를 완성해갔다.

“사람은 본래 그런 존재다. 열다섯 살 소녀는 그것을 알고 있었고, 성숙한 여인이 된 저자는 그것을 증명해냈다.” (39) 서늘한 문장이다. 뜨거운 문장이다. 세상을 그저 말없이 바라볼 뿐인 침묵. 놀랍지 않은가. 제인 오스틴의 침묵은 정말 무섭다고 울프는 쓴다.


침묵이 낚아챈 인간에 대한 통찰. 제인 오스틴은 그것을 정교하게 조율된 “감정의 흐름과 구성의 균형”을 품은 이야기에 담았다. 그리고 “인내심 있게, 정확하게” 그것을 독자에게 들려준다. 제인 오스틴은 어떤 재료를 어떻게 다뤄야 하는지를 “본능적으로” 이해했다고 울프는 기록한다.

훌륭한 비평은 언제나 독자의 성마른 독서 습관을 돌아보게 한다. 문학을 읽는 의미에 대한 근본적인 질문을 던진다. 샘솟는 궁금증으로 비평의 주인공이 구축한 문학 세계로 독자를 이끈다. 이러한 비평은 독자의 독법에 깊이 있는 안목을 심고, 독서 경험의 외연을 확장시킨다.

제인 오스틴에 관한 울프의 이 비평이 그렇다. 그런 만큼 버지니아 울프와 제인 오스틴의 애독자들에게 이 에세이는 각별하다. 두 작가의 숨결을 하나의 에세이에서 호흡할 수 있다니, 거기에 읽는 이의 숨결까지 더해지니, 시공을 넘어 두 대가가 연주하는 문학의 파동에 독자는 감동하고, 전율한다.

최근 국내 출판계에도 제인 오스틴 다시 읽기가 한참이다. 이 에세이야말로 제인 오스틴을 다시 펼치게 한다. 작가의 재능을 두고 울프는 “요람 옆에 있던 요정 하나가 갓 태어난 그녀를 데리고 세상을 한 바퀴 날아다녔음이 틀림없다.”고 쓴다. 그 소녀는 무엇을 보았을까. 나도 제인 오스틴이 세운 왕국의 상공을 다시 날고 싶다. 버지니아 울프의 손을 잡고 날아올라, 이 에세이의 페이지들을 깃털 삼아 더 높이 그리고 더 깊이, 문학이라는 창공을, 그 심연을 자유롭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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누가 제인 오스틴을 두려워하랴 - 새로 읽는 버지니아 울프 에세이와 두 편의 시
버지니아 울프 지음, 이루카 옮김 / 아티초크 / 2026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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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말이여, 말이여! 너란 존재는 얼마나 무력한가! 너는 사람을 얼마나 지치게 하는가! 늘 너무 넘치거나 늘 너무 모자라구나! 아, 침묵할 수 있다면! 아, 차라리 화가가 될 수 있다면! 아, 한마디로 카프가 될 수 있다면!”


이 문장은 신간 버지니아 울프의 <누가 제인 오스틴을 두려워하랴> 중 화가 카프(Edmond Xavier Kapp)에 관한 에세이의 마지막 문장이다. 작가로서 울프가 늘 직면했을 언어의 한계에 대한 고민, 그리고 회화의 직관적 표현력에 감탄, 화가 카프에 대한 존경이 엿보인다.




이 에세이는 국립 미술관과 국립 초상화 미술관이 서 있는 거리의 풍경 묘사로 시작된다. 울프는 바다로 뻗은 곶처럼 서 있는 두 미술관을 중심으로 풍요로운 물살처럼 밀리고 빠지는 군중과 다종한 대중교통의 흐름을 격랑에 요동치는 해변의 풍경처럼 역동적으로 그려낸다.



이 동적인 장면을 절벽처럼 마주하고 서 있는 국립 초상화 미술관으로 향하던 울프는 생각한다. “회화는 너무 조용하고, 너무 정적이다.” 변화무쌍한 현실과 대비해 미술관에 걸린 초상화의 침묵은 얼마나 정적인가. 하지만 울프는 회화의 이 압도하는 침묵에서 자아를 소멸시키고 정화시키는 힘을 발견한다. 웅장한 회화의 침묵은 감상자를 말의 “소란과 성가심”에서 벗어나게 해준다.


언어를 상실해야만 열리는 세계의 진상이 있다고 느낀다. 시간이 갈수록 이 느낌은 더 짙어진다. ( 때문에 갈수록, 이 믿음을 공유할 수 있는 작가들에게 끌린다.) 어떤 장면이나 소리(음악) 앞에서 사고가 정지되고 어떤 틈을 본 순간을 경험하지 않았던가.


“눈을 색으로 씻자”라고 울프는 말한다. 색의 바다 속에서 해체된 자아는 물감이 증류한 언어를 보게 된다. 하지만 이 언어는 작가의 언어가 아니라고 울프는 쓴다. 종이를 물들이는 회화 언어의 절묘함을 작가의 언어로 어떻게 번역할 수 있을까.


울프의 탄식처럼 늘 너무 넘치거나 늘 너무 모자란 언어. 소진되는 한편 무력한 언어에 대한 혐오와 의심. 울프가 징글징글하게 붙들고 싸웠던 것들. 언어의 불가능성에 대한 회의와, 그럼에도 마지막 순간까지 아슬아슬하고 팽팽하게 부여잡고 있던 언어의 가능성을 향한 신뢰와 도약. 그 사이에서 소진되고, 소생했던 울프. 내가 울프를 경외하고 사랑하는 이유다. 언어를 의심하지 않는 작가를 어떻게 신뢰할 수 있겠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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