광기와 천재 - 루소부터 히틀러까지 문제적 열정의 내면 풍경
고명섭 지음 / 교양인 / 2024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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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


<광기와 천재> 이 책의 또 다른 미덕은 천재들이 호흡했던 역사의 현장으로 독자를 데려간다는 것이다. 18세기에서 20세기까지 유럽사의 격변의 장소. 그 현장을 생생하게 목격하는 듯하다. 저자가 묘사하는 한 시대의 모순과 질적인 변화가 너무 흥미진진해서 역사 자체에 다시 호기심을 갖게 됐다. 인물을 읽다보니, 시대가 읽혔다. 머릿속에 전구불이 번쩍하고 들어오는 순간들.


모순덩어리 루소의 사유의 궤적을 통해 본 18세기의 사상의 변천사, 지식과 권력의 관계를 밝혀낸 푸코가 늘 현장을 지켰던 20세기 중반의 정치적 소용돌이, 비트겐슈타인이라는 천재의 요람으로 방문해보는 세기 변환기의 빈, 그가 참여한 양차 세계대전, 나쓰메 소세키의 변화와 식민지 남성성으로 돌아본 근대 일본, 그리고 기시감에 빠져드는 푸셰의 프랑스 혁명, 네차예프의 러시아 제국, 그리고 히틀러와 2차 세계대전, 그 광기의 역사.


국민의회, 국민공회, 총재정부, 통령정부... 나폴레옹 황제 즉위. 중학교 시절, 시험을 위해 암기했던 프랑스 혁명. 현재와 단절된 박제된 역사였다. 저자가 기록하는 희대의 기회주의자 푸셰의 일대기로 프랑스 혁명을 되돌아보니 정말 너무 흥미로웠다. 프랑스 혁명을 다룬 많은 책과 영화로도 이해가 어려웠던 것이 이 장을 읽으며 드디어 흐름이 보였다.


문제적 인간의 탄생, 그들이 사유와 실천을 확장해가는 과정. 이 모든 극적 변화를 역사적 조건과의 상관관계로 밀도 높게 설명하는 저자의 묘사와 분석이 놀랍도록 정치하다. 그 문장 또한 깊이가 남달라 각각의 장이 매우 공들여 잘 만든 영화 한 편씩을 감상하는 것 같았다. 문장을 읽는 동시에 머릿속에 영사기가 돌아가며 손에 잡힐 듯 맥동하는 시대와 인물의 일대기가 전해진다. 긴 시간이 지난 후에야 조감할 수 있는 시대와 인물이 나누는 서사시가 철학적 울림과 여운을 남긴다. (호기심에 이 문제적 인물들과 그 시대를 다룬 영화들을 다시 찾아보기도 했다)


“그는 간청하지 않고 명령하고 선포하고 자극하고 억센 손아귀로 끌어당겼다. 그러나 그의 말들은 대중의 은밀한 소망, 곧 복수욕, 증오심, 원한 감정에 아부하는 것이기도 했다. 그는 마치 신탁을 말하는 자의 당당한 권위로 대중의 비위를 맞추었다. 대중이 듣고자 하는 말이 그의 입에서 튀어나오는 것이었다. 그러므로 ( )의 연설장은 빈곤과 궁핍과 좌절의 시대에 휩쓸린 대중의 자기 확인, 자기 탐닉의 현장이었다.” 336면


- ( )안에 들어갈 그는 누구일까. 북아메리카의 그, 광화문 광장 연단 위에 섰던 무수한 그들. 이스라엘의 그. 구치소에 있는 그들. 러시아의 그, 00인 3대 쇼핑 방지법을 당론으로 추진한다는 그들, 대선토론에서 여성혐오로 판세를 뒤집으려 했던 그... 그리고 무수한 그들. 이 모든 그들이 ( )안에 들어가려 경쟁하는 듯하다.

“의회주의적 방법을 거부하고 급진적, 혁명적 전망을 제시했다. 대중의 힘을 동원해 폭력적으로 정권을 타도하고 권력을 잡아야 한다는 것이 그의 생각이었다.” 336면


-의회를 해산시키고, 대중을 선동해 그 폭력으로 권력을 장악하려 했던 그는 누구일까?


“( ) 주변에서 ‘지도자 숭배’가 시작됐다. .... 중략 .... ( )를 구세주의 모습으로 그려냈다.” 337면


- 손에 왕자를 쓰고 대선 토론회에 나오고, '하늘이 우리에게 보내주신‘이란 생일 노래를 들었던 그는 누구인가?


“탁월한 선동가는 다시 한 번 법정을 자신의 선전장으로 바꾸었다. 내란 수괴로 법정에 선 ( )는 자신에게 부과된 모든 죄목을 스스로 떠맡아 그것을 국가와 민족을 위한 의로운 거사로 바꾸어냈다.” 342

- 이 내란 수괴는 우리가 아는 그 내란 수괴인가?


“( )는 내란죄로 (중략) 금고형을 선고받았다. (중략)로 이송됐다. ( )는 특별한 대접을 받았다. 거대한 회의실에서 추종자들을 놓고 강연했고, 하루 여섯 시간씩 방문객을 맞았다. (중략)은 사실 ( )당 중앙당사나 다름없었다.” 342



- 구치소에서 특별 혜택을 누리며 추종자들을 선동하는 그는 누구인가?

“그는 대중을 설득하려면 하나의 적만을 제시하라고 말한다.” 344면


- 앞뒤로 이어지지만 다음 독자를 위해 멈춘다. ( )에 들어갈 인물은? 당장 떠오르는 인물이 있다. 하지만 히틀러다. 하지만 저 문장들의 주어 자리에 다른 이름이 어른거린다. 히틀러가 선전과 선동으로 대중을 장악하고 폭력으로 권력을 장악해가는 과정은 최근 몇 년간 우리가 겪은 일들과 너무도 유사해, 읽는 내내 불안감이 엄습했다. 그리고 이 불안이 매우 구체적인 근거가 있는 것이라 더 두려웠다. (오늘 뉴스를 보자. 여전히 그들은 태연하게 역사를 노골적으로 왜곡하고, 혐오로 대중을 선동하고, 원색적인 선전으로 국민을 기만하고 있다.)


이 책에서 자세히 분석하고 있듯이 히틀러의 폭력은 대중의 결핍과 소외에 뿌리내린 박탈감과 원한을 동력으로 삼았다. 대중의 증오와 분노를 해소시킬 분출구를 그는 혐오에서 찾았다. “청중의 흥분과 전율과 열광은 그에게로 다시 돌아와 더 사나운 고발의 폭포수가 되었다.” 약자에 대한 혐오로 화력을 얻고, 다시 약자에게 그 화력을 분사하는 정치적 전략은 불행하게도 우리에게 너무도 익숙한 것이 됐다.

저자는 히틀러주의의 교과서인 <나의 투쟁>의 집필 배경, 과정, 그 내용 또한 자세히 다룬다. 저자의 분석을 통해 <나의 투쟁>을 살펴보면 히틀러는 매우 철저하고 치밀한 광기의 소유자였다. 폭력적 광기가 인간성의 미덕이라 할 수 있는 강한 의지와 실행력을 만나면 세계에 어떤 재앙을 가져오는지 히틀러는 예증한다. 그런데 그 히틀러, 그 <나의 투쟁>의 망령이 지금 우리 주위를 배회하고 있지 않은가.


내란중요임무종사 혐의로 재판 중인 000 전국방장관이 즐겨 읽은 책이 <나의 투쟁>이라는 건 12.3 내란과 그 전후의 시국을 이해하는 중요한 열쇠이다. 내란 혐의로 재판 중인 전직 대통령의 그간 행적에서 드러나는 세계관과 전국방장관의 <나의 투쟁>은 우리가 호흡하는 시대에 어떤 광기가 깊게 침윤되어 있는지 보여준다. 히틀러 장은 마치 예언서를 읽는 듯했다. 히틀러와 나치당이 치밀한 선전 전략으로 대중을 선동해 성장하고 의회 민주주의를 파괴해 독재를 완성해가는 과정은 우리가 최근 몇 년 동안 목격한 정치의 흐름과 너무나 유사하다.


1923년 내란죄로 수감된 히틀러는 1924년 12월 형집행정지로 출감했다. (“당은 거의 종교적 공동체로 변신했다”) 나치당 재창설 대회를 연 그는 나치당을 제국의회에 입성시키고, 1933년에는 총리가 되고, 1934년 1인 지배 총통국가를 완성했다. 그리고 그 뒤의 역사는 우리가 아는 대로다.


“참으로 위대한 민중 지도자의 기술이란 민중의 관심을 분열시키지 않고 언제나 어떤 유일한 적에게 집중시키는 데 있다. 민중의 투쟁 의지의 이용이 집중적이면 집중적일수록 운동의 흡입력은 점점 커지고 타격의 강도도 더해지는 것이다.” (344면 히틀러, 저자 인용)


비극의 과거를 과거로만 읽을 수 있는 독자는 복되다. 폭력의 광기가 무덤 속에 있기를 거부하고 대기 속을 떠돌며 후대의 정신에 뿌리 내리고, 개화하는 것을 볼 때 어떻게 전율하지 않을 수 있을까.

그들은 우리가 편하게 웃고 즐길 수 있는 희화화의 대상이 아니다. 그들은 그저 감정적이고, 제멋대로인 멍청이들이 아니다. 그들은 확실한 신념 아래 치밀한 전략과 결집력을 갖췄다. 내란 세력의 강고한 심층을 이해하고자 하는 독자에게 이 책을 권한다. 역사의 반복이 우리 세대에게만은 예외일 것이라는 기대가 얼마나 허망한 것인지 이 책은 확인시켜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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광기와 천재 - 루소부터 히틀러까지 문제적 열정의 내면 풍경
고명섭 지음 / 교양인 / 2024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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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신의 한계상황까지 밀어붙이고 그럼으로써 삶의 모순을 스스로 드러내 보였던 인간이 이 글이 추적하는 인간이다.” 18 면.

저자는 머리말에서 이 책에서 방점이 찍히는 것은 천재와 광기가 아니라고 말한다. 그가 집중한 것은 인간 자체이다. ‘인간이란 무엇인가.’ 저자가 이 책 전반에 걸쳐 던지는 질문이다. 이 물음에 대답을 찾는 과정의 실마리가 바로 인간성의 두 요소. 무한한 인간성의 스펙트럼을 펼쳐 보이는 천재와 광기이다. 인간이라는 미궁을 탐색해 들어가는데 끝없이 이어지는 실타래가 광기와 천재이다.

인간의 불행에 관한 외면 없는 대면, 그 불행한 조건을 벗어나고자 하는 극한 모험으로의 투신, 한계 상황에서 드러나는 인간의 숭고함, 인간의 취약함, 종래에는 드러나고야 마는 인간과 삶의 모순, 모순, 모순. 그리고 그 모든 과정에 불쑥불쑥 찾아와 인간의 의지를 무색하게 하는 운명의 가차 없음.

천재도 광기도 역사의 자장 안에서, 운명의 소용돌이 안에서 명멸하며 휘몰아치다 사라진다. 책을 읽으며 경이로움과 진저리를 오간다. 인간이란 무엇인가라는 질문은 인간으로 사는 것은 무엇인가라는, 삶은 무엇인가라는 질문으로 변형되고 증폭된다. 책을 덮을 때쯤이면 하나의 질문이 오롯이 떠오른다. 그러니 어떻게 살 것인가. 미궁에서 돌아온 자가 가져온 질문이다. 내 안의 미궁으로 초대될 때마다 잊지 말아야 할 질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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언월딩 : 아마존에서 배우는 세계 허물기 이동시 총서 2
김한민 지음 / 워크룸프레스 / 2025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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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언월딩>은 거울 같은 책이다. 작가가 들려주는 아마존과 원주민 이야기는 동시대를 사는 비원주민의 삶을 역으로 비춰준다. 자본주의가 먹이고 입히고 놀아주며 사회화된 나는 자본주의의 일부이다. 아무리 그 밖을 상상하려 해도, 그 얽힘이 너무 강해 나는 시작부터 주춤한다. 자본주의를 생각함은 내 연루됨을, 내 회피와 방관, 타협과 합리화를 직시하는 것이기에 나는 멈칫한다.


아마존의 어제와 오늘은 제국주의와 자본주의를 빼고는 이야기할 수 없다. 제국주의와 자본주의가 결합한 강력한 힘으로 추동되는 정치경제문화의 자장 안에서 안락하게 살아가는 북반구 선진국의 내가 그들의 삶에 대한 글을 읽는 것은 어떤 의미일까. 김한민 작가가 책에서 우려했듯이 나 또한 타자화로 미끄러지는 건 아닐까? 그들에게서 나 역시 무언가를 ‘추출’하려고 하는 건 아닐까? 읽는 내내 자기 검열은 어쩔 수 없었다. 타자의 삶, 그것도 진행 중인 착취의 한 가운데에 있는 공동체의 삶을 들여다보는 것은 나와 그들에게 어떤 의미를 지닐까. 이 부분에 대한 작가의 고민과 생각을 여러 부분에서 읽을 수 있어서 독자로서 안심되고, 배운 것이 많다.


비명 속에 살아가기. 나는 무수한 비명 속에 살아가고 있다는 느낌을 이명처럼 지니고 산다. 투입과 배출 모두 과잉으로 연명되는 과잉의 체계. 과잉을 유지하기 위해 갈려나가는 존재들의 비명. 김한민 작가는 이러한 현상태를 이렇게 쓰고 있다. “우리는 이미 죽어가는 세계에 대한 무의미한 ‘연명 치료’만 영속화하고 있다. 이러한 세상은 더 많은 것을 파괴함으로써 자신의 종말을 늦추는 방법만 알 뿐이다.” 얼마나 정확한 진단인가. “지구의 모든 자양분을 빨아들여 임종을 연장하면서 새로운 싹이 트지 못하게 가로막고 버티는”낡고 비대해져 죽어가는 괴물이 된 시스템.


어떻게 자본주의로부터 지구를 지켜내고 새로운 세계의 싹을 틔울 수 있을까? 작가는 “언월딩”이 선행되어야 한다고 말한다. 언월딩이 제대로 이뤄진 후에 비로소 다른 세계를 구축할 수 있다는 의미다. 언월딩은 우리에게 익숙한 세계를 괄호 안에 넣어, 낯설게 바라보고, 질문하고, 다른 세계를 상상하는 것이다. 작가에 의하면 언월딩의 출발은 본질주의적 세계관을 의심하고, 지금까지 “행해진” 것들의 배경을 인식하고, “다르게 행해질 수 있음”을 아는 것이다. 소비와 생산의 무한 반복으로 유지되는 단일 세계의 굴레에서 내려와 그 세계의 폭력성을 인지하는 것이다.


나는 다른 세계를 상상할 수 있을까? 내 생존과 생활 방식이 깊게 연루된 그 체계의 균열과 무너짐을 감당할 수 있을까? 이 세계와 불화하며 자기기만과 모순 속에 이런 질문을 하는 이가 나뿐일까. 작가는 언월딩을 먼저 경험한 이들, 세계의 허물어짐을 몸소 경험한 사람들, “세계는 단일하지 않다”는 사실을 보여 주는 사람들을 만난다. 그들은 아마존 원주민 카리푸나족이다. 이 책은 그들과의 만남을 통해 경험하고, 발견한 것들을 담고 있다.


김한민 작가는 현재 리스본 고등사회과학연구원(ISCTE) 박사 과정에서 인류학을 공부 중이다. 이 책은 학위 논문을 쓰는 과정에서 작성한 에세이들을 기반으로 쓰여졌다. 그런 만큼 책은 인류학 연구자의 시선으로 작가가 가진 문제의식을 벼려낸다. 작가가 자본주의 세계 속에서 전투중인 아마존 원주민의 복잡한 삶의 맥락을 드러낼수록 자본주의의 폭력성과 취약성, 그 존재의 상대성(자본주의 또한 하나의 패러다임일 뿐이다.) 또한 드러난다.


자본주의라는 단일세계 속에 사는 우리는 하나의 이야기에 따라 살아가기를 교육받고 권장 받는다. 이윤 추구와 경쟁이라는 자본주의의 가치를 내면화하고, 사회적 생산자로서 역할을 근면하게 완수하고, 부를 축적한다. 그리고 소비하고, 소비하고, 소비하는, 더 많이 축적하고 소비하는 것이 ‘성공한’, ‘좋은’ 삶이라 평가한다. 하지만 과연 그런가?


세계 80억 인구가 하나의 이야기를 담은 하나의 노래만 부른다면 얼마나 기괴한 일인가. 그런데 세계는 이미 하나의 멜로디에 맞춰 집단적인 군무를 추고 있지 않은가. 작가는 아마존의 이야기는 숲에서 만들어지는 동시에 그 이야기 자체가 숲이라고 말한다. 밀림의 기호를 해석해 가며 “존재하지 않는 길”을 만들어가기. 밀림 속에 새로이 만든 길은 새로운 이야기, 다른 삶의 가능성이다. 단일 세계를 풍요로운 이야기의 숲으로 변화시키려면 “우리의 수용기를 다공적으로 만드는 것이 비결”이라고 저자는 말한다. 숫자에만 민감하게 반응하는 우리의 수용기에 무수하게 열린 창을 만드는 것은 어떻게 가능한 일이 될까.


책은 아마존 원주민과 숲의 현실을 보여준다. 저자에 따르면 카리푸나족 땅에서 자행되는 삼림 파괴는 비유로써가 아니라 전쟁 그 자체이다. 그 전쟁은 아주 오래 시간을 걸쳐 지속적으로 진행되고 있기 때문에, 국제 사회에 만연한 묵인과 방관, 침묵 때문에 주목받지 못할 뿐이다. 저자의 말대로 누군가의 시작이 그들에게 지속적인 종말을 의미해왔다.


카리푸나족은 대대로 이어온 세계가 허물어지는 것을 목격하며 종말 전문가가 되어 싸우고 있다. 이 부분을 설명하는 저자의 글을 읽으며, 또 그것을 저 한 문장으로 옮기며 나는 머뭇거린다. 계속 맴도는 단어들, 한 세계의 붕괴와 종말 전문가. 그들이 살고 있는 현실을 도저히 가늠할 수 없다. 종말을 사는 사람들이 감각하는 세계는 과연 어떤 모습일까? 진행 중인 상실과 절멸의 예감은 어떻게 감각되어질까. 그 감각은 나에게 낯설기만 한 것일까? 나도 이미 세계의 종말을 감각하고 있는 건 아닐까? 그럼에도 나의 막연한 불안을 그들의 저항과 어떻게 비교할 수 있을까.


이들은 저항한다. 그들이 내외부의 이들과 상호작용하며, 어떤 방식으로 어떻게 변화를 수용하고 새로운 길을 만들어 가는지 저자는 이 책에 자세히 기록한다. 동시에 저자는 원주민들의 삶을 지지하고 도움을 주는 방식, 그들에게 합당한 보상을 주는 방안과 관련한 다양한 쟁점들 또한 보여준다. 언론에서 아주 가끔, 반짝하고 스치는 아마존 관련 기사처럼 매끈한 서사는 어디에도 없다.


10장은 이 책이 던지는 중요한 의문을 잘 보여준다. 거대 테크 기업 아마존이 상징하는 자본주의의 기만성에 새삼 아찔하다. 아마존이 상징하는 생명의 다양성과 풍요로움을 파괴하면서 그 이름과 이미지를 재전유하는 그들의 폭력적 전복성과 놀라운 영업력. 소수의 기상천외한 이윤 추구를 위해 자원과 노동 착취로 유지되는 기업 아마존이 번창할수록 생명 그 자체인 아마존이 죽어간다는 사실을 우리는 모르고 있었다고 말할 수 있을까. 국제적 유통망의 365일 24시간 멈춤 없는 흐름은 자원 투입과 탄소 배출의 멈춤 없는 흐름을 의미한다. 아마존 대 아마존은 자본주의의 부조리와 폭력성을 드러내는 메타포, 아니 지극한 현실이다. 아마존을 살(buy)것인가. 아마존을 살(live)것인가?


인류의 역사에서 자본주의 역사는 500년에 불과하다. 하지만 그 폐해는 이미 그 이익을 넘어서고 있다. 자본주의가 자초한 기후 위기로 인류의 자멸이 예상되는 상황에서, 자본주의의 수혜를 계산하는 것은 어리석다. 절벽에서 추락하며 지갑 속 현금 생각에 웃을 수 있을까. 저자가 제안하는 언월딩은 패러다임을 전환하는 것이다. 우리에게 익숙한 관념과 경험을 재사유하고 재구성, 재배치하는 것이다.


자본주의 너머, 그 이후의 세계라는 과제에는 공감하면서도 그 실행의 격변성에 주춤한다. 어디서부터 시작하고 어떻게 그것을 가능하도록 할 것인가. 언월딩. 저자가 제안하는 언(un)-하기는 인식과 실천의 영역에서 영감의 원천이 된다. 익숙한 세계관과 생활양식을 재고하기, 취소하기, 해체하기, 다르게 살기 위해 이제까지와는 ‘다른 함’을 연마하기. 욕망을 언월딩하고, 일상을 언월딩하고, 관계를 언월딩하기. 구조를 언월딩하도록 힘을 모으기. 무엇보다 상상력을 언월딩하기. 작가가 그랬듯 다른 세계와 접속하기.



어떤 독서는 완결되지 않는다. 이 책을 읽는 것이 그렇다. 이 책의 독서는 행동으로만 앞으로 나아가기 때문이다. 이타카로 떠나는 시로 시작한 이 책의 맺음말에서 작가는 “오디세이 같은 ‘해피엔드’도 없이, 이 이야기는 완결을 모르고 끝없이 이어지기만 한다.”고 쓴다. 한 배에 올라탄 독자도 끝없이 이어지는 그 항해를 계속해야할 운명을 공유한다. “얽힘이란 그렇게 우리의 질긴 참여를 요구한다.” 160 페이지 얇은 책이 주는 무게가 무겁기만 하다. 질문들이 무겁고, 제일 무거운 것은 내 몫으로 주어진 대답과 그 실천의 무게이다. 하지만 그럴수록 웃으며 가볍게 한 발을 내딛는 전략의 언월딩 또한 갖춰야겠다.


책의 마지막, 원주민 노인 아라파는 작가에게 카리푸나족 샤먼에 대한 이야기를 들려준다. 카리푸나족은 자연존재와 자연현상에 영혼, 정령이 있다고 믿는다. 그들은 “꿈-기술”(오몽거) 속에서 비인간존재들과 춤을 춘다. 따삐르 혹은 페커리와 나란히 서서 팔이 얽힌 상태로 스텝을 밟는다. 인간과 숲의 존재들이 “모두가 정령이 되어” 춤을 추며 하나가 된다. “평범한 환자로 보이는 한 노인이 이토록 풍요로운 세계”를 품고 있음에 작가가 그랬듯 나도 놀란다. 아마존의 영혼들은 인간과 비인간이라는 분별 너머의 공간에서 만난다. 자신들이 거주하는 대기와 대지만의 독특한 리듬에 맞춰 이들은 서로 얽혀 춤을 춘다. Shall we dance? 저마다 다른 자연 환경 속에서 각각의 환경이 연주하는 서로 다른 리듬에 맞춰 팔을 걸고 스텝을 밟는 비인간과 인간의 모습을 상상해본다. 우리의 몸과 마음을 유연하게 다른 존재에게 여는 것으로부터 언월딩은 시작되는지도 모르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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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나무, 손수건, 그리고 작은 모자가 있는 숲 열다
로베르트 발저 지음, 자비네 아이켄로트 외 엮음, 박종대 옮김 / 열림원 / 2025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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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형언할 수 없이 즐거운 영혼과 함께 아름답고 경건한 어둠 속을 계속 걸어갔다.” 이 책 속 산문 <풍경1>의 마지막 문장이다. 이 책을 읽으며 내가 받은 인상을 요약한 문장 같다. 이 인상은 내가 발저에게 늘 매료되는 이유이기도 하다.


발저는 계속 걷는 사람이다. 그가 늘 변함없이 산책하는 곳은 그가 거주하는 곳의 숲과 들판, 산과 호수, 강가와 마을이다. 이 장소들은 그의 눈길과 발길이 구석구석 반복해서 닿아 선명하게 빛난다. 따라서 이곳들은 세상 그 어떤 특별한 곳보다 각별한 장소가 된다.


그는 어둠 속을 걷는다. 그가 아무리 찬란한 봄날의 환한 햇살 속을 걸을지라도 그의 속눈썹 아래는 그늘졌다. 눈은 어둠을 보았으며, 마음에는 어둠의 입자들이 떠다닌다. 발저는 장소를 지배하는 “무한한 슬픔”을 본다. 이때 그의 심장과 상상력은 “안개와 잿빛”에 활짝 열린다. 그는 어둠을 안다.


그러나 그의 어둠은 아름답고 경건하다. 그 어둠은 씻기고 씻겨져 말개진 어둠이다. 나는 발저의 글들을 읽을 때마다 한참을 눈물 흘린 사람의 말간 시선을 느낀다. 한차례 비를 쏟아 부어 퀭해진 대기 위로 뿌려지는 햇살 같은 맑음. 어떤 시간들을 비워내고 덜어낸 사람만이 볼 수 있는 경건한 광휘. 발저의 어둠은 찬연하다.


발저는 그 어둠을 형언할 수 없이 즐거운 영혼과 함께 걷는다. 자기 정화를 통과한 혹은 통과중인 사람의 홀가분함. 이 홀가분함이 그의 문장을 날아오를 듯 가볍게 만든다. 어둠을 아는 발저는 빛의 채도에 민감하다. 그는 자신을 “둘러싼 아름다움에 매혹되어 걸음을 멈추고 사위를 주의 깊게” 둘러볼 줄 아는 마음의 폭과 깊이를 가졌다. 사물의 경이를 시시각각 느낄 수 있는 능력을 지닌 영혼만큼 즐거운 영혼이 있을까. 그 즐거운 영혼은 발저 자신이다. 그는 어떤 순간에도 자신을 잃지 않는다. 그는 언제나 그 자신과 동행한다.


이 책에 포함된 한 에세이에서 발저는 호수 수면에 비친 숲을 바라보는 청년의 입을 빌려 말한다. “우리 자신도 그렇게 흘러가는 것이 돼. 지금도 우리는 흘러가고 있어. 우리 가슴 속에 더는 정지된 것은 없어. 이제 우리는 갑자기 사랑하게 돼. 그건 모든 것을 안에서부터 뒤집어엎어 무너뜨린 다음 다시 새롭게 쌓아 올리는 사랑이야”


자신을 포함해 우리를 둘러싼 모든 것은 흘러간다. “저기 숲이 있어. 아름답고 또 아름답게 누워 있어. 그렇게 숲은 죽어가. 안녕. 잘 자!” 청년은 이렇게 호수에 드리운 거대한 숲과 구름을 향해 인사한다. 세계의 아름다움은 이렇게 “작디작은 것”들의 덧없음으로 이루어졌음을 발저는 소박한 문장으로 이야기한다. 나는 놀란다. 문장이 묘사하는 풍경의 아름다움과 그 풍경에서 낚아챈 발저의 직관에 놀란다. 이것들을 표현하는 문장의 간결함에 전율한다.


발저의 글들은 매번 이런 방식으로 나를 전율시킨다. <전나무, 손수건, 그리고 작은 모자가 있는 숲>에 포함된 에세이들은 발저에게 성큼 더 가까이 데려간다. 이 산문집은 그가 산책을 통해 그를 둘러싼 자연 세계를 주의 깊게 바라본 섬세한 인상들로 가득하다. 그가 자연 세계를 어떻게 지각하고 인식했는지 충분히 엿볼 수 있다. 발저의 오랜 독자라면 특히 만족스러울 것이다.


“우리는 초록을 알지 못한다. 이해하는 건 불가능에 가깝다. 초록은 무섭고, 섬뜩하고, 압도적이다.” <초록>이란 타이틀을 가진 산문의 일부분이다. 나는 여러 이유로 여름을 어려워하는데 바로 이 맹렬함 때문이다. 맹렬하고 아우성치고 살기등등한 한 여름의 초록. 지금 내 앞 창문 전체를 꽉 채우고 있는 바로 이 계절의 저 초록. 발저의 <초록>은 이 산문집의 백미이다.


“사랑 같은 무언가가 숲을 가로질러 희미하게 빛난다.” 숲에 살고 분명히 느껴지는 무언가. 어린 새들의 합창을 지휘하는 무언가. 이 무언가는 “숲에 사는 침묵의 존재들”이며 “새들의 세계와 우정을 맺는 존재들”이다. 발저는 이것을 그저 “사랑 같은 무언가”라고 부른다. 나는 이래서 발저가 좋다. 이 책을 읽은 나는 그것들을 숲의 영혼들이라고 가만히 불러본다.


“거봐! 고통은 행복이야. 난 숲에서 그걸 배웠어. 이 사랑스럽고, 또 사랑스러운 숲에서!” 고통은 행복이야. 고통은 행복이야. 반복해서 읽어본다. 눈물이 나오려고 한다. 얼마나 많은 세월 숲을 걸어야 했을까. 걸어야 할까. “상처받기 쉬운 인간은” “그저 꿈같이, 부드러운 숨결같이 잠시 피었다 사라질 뿐이다.” 숲 속의 <하이덴슈타인>이라는 바위를 보며 발저는 이렇게 생각한다. 숲으로 걸어 들어간 발저는 자기 내면을 깊숙이 걸어 돌아 다시 숲으로 걸어 나온다. “당당하고 자유로운 것은 모두 고통을 겪는다.” 따라서 숲은 “고통 속에서도 침착함과 당당함을 유지하는 법을 아는 것처럼 보인다.”


숲은 “자기들 방식으로 시이고 이야기인 미소 짓는 침묵의 형체들”로 분주하고 수다스럽고, 때로는 고요하고 평온하다. 감각을 과감히 열어젖혀야만 숲의 노래를 들을 수 있다고 발저는 말한다. 숲 속에서 발저의 사유는 오감을 열고 “이리저리 헤매는 나비처럼 아름다운 것 주변을 날아다닌다.” 그 나비가 무수한 날개를 접고 살포시 내 책상 위에 앉는다. 나는 책날개를 열어 그 나비가 채취한 생의 찬란함과 적막함을 혀끝으로 맛본다. 진한 숲 향기가 전해진다. 차갑고 향긋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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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나무, 손수건, 그리고 작은 모자가 있는 숲 열다
로베르트 발저 지음, 자비네 아이켄로트 외 엮음, 박종대 옮김 / 열림원 / 2025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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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기 작은 숲에서

 

 

여기 작은 숲에서

햇빛은 나를 벌써

스무 해 넘도록 보았다.

무수한 세월이

이 초록빛 공간 위로

흘러갔다.

시간은 가장자리도 경계도 없는데

우리네 짧은 삶은

그에 비하면 얼마나 하찮은가.

 

(하략)

 

 

한 장소를 수십년 산책을 해보면 느끼게 된다. 나만이 장소를 바라보고 인식하는 것이 아니라 장소 또한 나를 인식하고 바라보고 있다는 느낌. 발저의 이 산문 곳곳에서 발저도 이 느낌을 공유하고 있음을 읽을 수 있었다. 너무도 익숙한 산과 숲, 들을 걷고 있으면 그 장소들의 품에 내가 안겨져 있는 느낌. 그 장소들이 나를 넉넉하게 품고 있다는 느낌. 이 느낌이 강렬해지면 내가 안긴 그 자연과 하나가 된 듯한 느낌에 사로잡히고, 말할 수 없는 평온함에 둘러싸인다. 내가 산책을 가장 중요한 일과로 생각하는 이유다. “나는 이제 물결이고, 물이고, 강이고, 숲이다.” , 발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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