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당신과 내가 대화할 수 있을까 - 소통 불가능성의 인문학
정희진 지음 / 창비 / 2026년 8월
평점 :
“이것은 생존의 문제입니다, 약자는 말에 예민합니다” 12p
당신과 내가 대화할 수 있을까? 살면서 수도 없이 마음속으로 해온 질문. 발언권 자체, 발언의 내용, 발언의 형식까지, 소통의 요건은 기득권자가 결정한다. 약자는 대화 상대가 아닌, 자기 자신과 협상한다. 무엇을 어디까지 내주어야 할까, 어떻게 전달할까. 이런 고민은 강자의 몫이 아니다. 이렇게 대화는 권력의 차이로 기울어진 링 위에서 오간다.
“인간 사이의 소통이 본디 불가능하다는 사실을 인정하고, 그렇게 인식한 후에야 비로소 가능한 소통방식을 함께 고민해보자는 인문학적 시도입니다.” 20p
그러니 현실의 대화와 소통은 긴장과 불안, 폭력을 동반한다. 가정에서, 학교에서, 군대에서, 직장에서, 사적인 관계에서 순차적으로 소통의 불가능성을 몸으로 체득해간다. 그럼에도 대화와 소통, 두 단어는 평등한 상호성에 바탕을 둔 온정적인 아우라를 장착하고 ‘대화와 소통으로 해결하세요!’라는 빨간약을 여전히 해맑게 유통 중이다.
" 이 책은 소통 가능성을 당연시 여기는 사회적 폭력으로부터 우리 자신을 보호하는 자기 돌봄의 외침에 가깝습니다.” 20p
당신과 내가 대화할 수 있을까? 매번 다른 상황, 다른 상대지만 서늘하게 식은 저 질문만 오롯이 남는 불통의 절벽. 공사의 영역에서 맞닥뜨리는 이 불통 국면은 고해라는 인생의 멈추지 않는 파고다. 개소리(Bullshit, 개들에게 정말 미안하다. 인간은 죄 많은 종이다.)가 증폭되며 메아리치는 거대한 동굴이 되어버린 세계에서 어떻게 귀와 입을 보호하고 단속할지, 어떻게 맑은 정신을 부여잡고 생존할지 늘 고민이다.
“이 책이 제안하는 것은 소통의 포기나 소통 잘하는 법이 아니라 ‘소통에 관한 고민’,‘최소한의 소통’입니다.” 24p
유레카! 정희진 작가의 ‘소통의 불가능성’에 관한 강의를 듣다 안에서 탄성을 질렀다. 작가는 ‘어떻게 소통할 것인가’에서 ‘소통이란 무엇인가’로 질문을 이동시킨다. 발상의 전환은 현상의 본질을 드러내고, 드러난 본질은 달라진 대안을 내놓는다. 이거다! 그 강의에서 제안된 소통법을 듣고 천군만마를 얻은 듯했다. 개인적으로 경험했던 개소리의 역사가 주마등처럼 지나갔다. 이 소통법들을 숙지했었다면, 그때 그 자리에서 수치심을 제 주인인 그 무례한 종자들에게 되돌려줄 수 있었을 텐데!!
이 책은 앞서 말한 ‘소통 불가능성의 인문학’이라는 강의의 주제를 확장시켜 쓴 책이다. 아무리 집중해 들어도 강의의 내용은 많은 부분 휘발되기 마련이어서 몹시 아쉬웠는데, 이 주제에 관한 작가의 심도 있는 사유를 더 자세히 읽을 수 있어 정희진 선생님의 오랜 독자로서 너무도 기쁘다.
“저는 완벽한 소통에 대한 지나친 기대와 욕망, 환상을 걷어내고 소통 불가능성을 이해하는 일이 일종의 위안이 될 수 있다고 생각합니다.” 24p
책을 받자마자 프롤로그만 읽었을 뿐인데 가슴이 벅차다. 불통의 절벽에서 뛰어내려, 면벽의 삶을 살고 있는 독자로서 이 주제로 작가를 만나게 되어 더 각별하다. 우선은 지속가능한 면벽의 삶을 위하여, 그리고 가끔 있을 소박한 외출을 대비하기 위하여 책장을 펼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