슬픔에게 언어를 주자
김명순 외 지음, 이루카 엮고 옮김 / 아티초크 / 2026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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슬픔이 슬픔에 맞닿을 수 있다면,

"고통이 고통에 응답할 수 있다면,

어떤 연민이든 당신을 녹일 수 있다면,

지금 내게로 오십시오.”

79, 에밀리 브론테, 슬픔이 슬픔에 맞닿을 수 있다면

 

어떤 책은 다정하다. 독자의 변덕스런 감정을 인내하며 한결같음으로 독자의 방문을 허락한다. 그 책은 다정하다. 발을 헛디뎌 절룩거리는 독자에게 기댈 어깨를 내어준다. 혼돈과 의심, 수치와 소외로 얼어붙은 독자를 재촉하지 않고 침묵 속에 기다려준다. 책에 숨겨진 촛불 하나로 길을 잃어 헤매는 독자에게 환한 통찰의 빛을 내어준다. 다정한 이 책은 삶에 기진해진 독자를 페이지를 길게 펼쳐 포옹해준다.

 


이제 밤이 오면 잠 대신 고독이 찾아와

내 침대 머리맡에 앉는다.

지친 아이처럼 누워 그녀의 발소리를 기다리며,

나는 그녀가 조용히 불빛 끄는 것을 바라본다.” 177, 캐서린 맨서필드, 고독,

 

<슬픔에게 언어를 주자>는 그 다정한 책이다. 이 책의 다정함은 조금 더 특별한데, 그것은 이 책의 목소리들이 모두 여성들의 입술 사이에서 흘러나왔기 때문이다. 내 앞을 살다 간 수많은 여성들이 자신들의 삶에서 길어 올린 맑은 물 한 잔을 독자에게 권한다. 갈애와 갈증을 안다고, 열기와 냉기를 안다고. 고양과 추락을 안다고. 상실과 추방을 안다고. 그녀들은 고요히 말한다. 멀리서 당도한 시어들은 속삭인다. 안다고, 내가 당신을 안다고, 보았다고.

 


내 가슴속에는 공간이 하나 있습니다.

당신이 문을 닫아버린 곳.

당신의 얼굴을 기억 속에 가두고

열쇠를 가져가 버린 곳” 157, 래드클리프 홀, 기억,

 

기원전부터 현재에 이르기까지 여성들이 공유한 경험과 감정들, 통찰과 지혜가 여성 시인들의 시어들로 생생하게 전달된다. 지극히 개인적이고 내밀한 마음의 풍경을 그리는 시에서 공명이 울리는 까닭은 무엇일까. 여성이라는 젠더가 통과해온 거시사와 미시사, 그리고 그 경험이 체득한 세상을 바라보는 시선 안에 여성의 앎이라는 특수한 상수가 존재하는 것이 아닐까. 젠더를 넘어 인간 조건에 관한 시들에서도 안도감이 느껴지는 건 왜일까.

 

 

우리의 고통 없이 이 세상에 태어난 남자는 없으니,

그 산고를 당신들의 잔혹함을 막는 빗장으로 삼으라.” 41, 에밀리아 라니어, 여성을 위한 이브의 변론

 

세계여성시선집이라는 기획 반가웠던 이유는 이 안도감 때문이었다. 어머니 젖가슴과 땀내에 대한 향수로 절절한 시구, 여성의 몸을 사물과 등치시키는 시구, 역사에 남성사를 의심 없이 합일시키는 시구, 폭력을 사랑으로 전도하는 시구, 가해를 자기 연민으로 연소시키는 시구, 진리의 담지자로 화한 자아 비대의 시구를 읽게 되지는 않을 거라는 안도감. 며칠 전에 본 영화의 도입부. 가정폭력으로 쉼터에 첫 방문한 여성에게, 현관문을 열어준 여자가 퉁명스럽게 말한다. ‘여긴 안전해요.’ 물론 그 안에도 잡음과 갈등이 끊이지 않는다. 하지만 그 안전이라는 단어를 대번에 이해하고 안도하는 ... 우리에겐 아직 여성들만의 방이 필요하다. 이 시선집은 그 방 중 하나다.

 

 

기묘한 신비여라, 말의 힘이란!

그 속에 삶이 있고 죽음이 있다.” 69, 레티샤 엘리자베스 랜던, 말의 힘

 

슬픔에게 언어를 주자, 이 시선집의 이름처럼, 의심받고 폄하되고 부정되었던 여성의 경험과 감정이 여성 시인들의 손끝에서 언어라는 몸을 갖추게 되자, 비로소 눈에 보이게 된다. 이 책은 기원전부터 현대에 이르기까지 국내외 여성 시인들이 남긴 시 100선을 담고 있다. 오른쪽 페이지에는 시가, 왼쪽 페이지에는 시인의 연대기가 소개된다. 시인들의 소개를 읽다보면 숙연해진다. 오랜 세월 이토록 많은 여성들이 이토록 혹독하고 고단한 삶을 치열하게 살아가며, 자신의 감정을 시로 남겼다는 사실이 안겨주는 숙연함. 전쟁과 혁명, 억압과 저항, 사랑과 이별, 외로움과 고독, 탄생과 죽음. 피해갈 수 없는 삶의 관문들을 통과하며 여성들이 느끼는 모든 감정의 파동이 이 책안에 메아리로 울려퍼진다.

 


우리는 만났습니다. 그리고 우리는

서로에게 충분히 그럴 만한 가치가 있는 사람들입니다.”

19, 술키피아, 드디어 사랑이 찾아왔습니다.

 

저 공은 얼마나 저렇게 공중에 떠있었을까. 시선집 표지 위에는 두 명의 여성이 라켓으로 공을 주고받는다. 공은 포물선을 그리며 두 여성의 몸을 오간다. 기원전 1세기경 로마의 여성 시인 술피키아가 뛰어 올린 둥근 마음 하나가 내게 도착한다. 나는 응답한다. 둥근 마음 하나 공중으로 뛰어 올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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