라스트 데이즈 제프 다이어 선집
제프 다이어 지음, 서민아 옮김 / 을유문화사 / 2025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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삶의 마지막 전에 마무리해야 한다고 느끼는 작업이나 어떤 종류의 정리. 어느 나이 대를 지나며 가끔 혹은 자주 생각하게 되는 주제이다. 황혼을 향해 돌진하는 열차에 이제 막 올라탄 제프 다이어는 이 책의 마무리가 그 중 하나였다고 쓰고 있다.


“이 책은 여러 가지 이유로 내 인생의 한 시기에 내 주변에 모여 거친 별자리 모양을 이룬 경험들, 사물들, 문화적 산물들의 집적에 관한 것이다.”


한 작가의 삶을 통과하고, 그를 형성한 경험과 예술 작품을 살펴보는 것은 흥미롭다. 작가가 직접 그것들을 썼다면 더욱. 작가 자신이 이전에 그가 “알던” 삶이 “끝나가는 것”을 체감하는 시기에 썼다면 더더욱. 과거의 기억과 경험이 전혀 다른 방식으로 추체험되는 길 끝의 시간. 흘러간 시간에 별들 같이 박힌 그 경험들을 노년에 이른 제프 다이어는 이 책에 기록했다. 자극과 영감을 주었던 스포츠, 음악, 문학, 철학, 그림, 사진, 영화. 그리고 스포츠맨들과 예술가들. 이 모든 것들의 시간과 함께 작가의 시간도 함께 흘렀다. 시간은 경험의 빛과 파장을 변화시킨다. 이 책은 그 변화들에 대한 기록이다.


(흥미로운 글쓰기 작업이다. 노년에 이른 자신을 통과했던 사람들, 경험들, 예술 작품들을 정리해보기. 어쩌면 너무 방대해서 시작조차 어려운 일이겠지만, 생각나는 대로 적다보면 자신의 물살을 만들어 흘러가는 것이 글쓰기가 아니던가. 제프 다이어의 이 책은 그 작업의 방법과 의미에 대해 많은 영감을 준다. 일단 시작하기, 힘 빼기, 우회하기, 머물기, 보내주기, 맞이하기. 이 책이 보여주는 제프 다이어의 회고 방식은 자유분방하다.)


예술 작품과 그 예술가의 삶을 따라가다 보면 반드시 마주치게 되는 절벽, 시간의 벼랑. 모든 변화들이 수렴되는 하나의 소실점. 제프 다이어의 기억과 문장도 그 하나의 소실점으로 향한다. 예술가의 황혼과 자신의 황혼. 그리고 그가 이 책을 집필할 당시의 코로나 봉쇄가 상징하는 문명의 황혼. 이 책은 작가 개인과 천재라 불리는 예술가들과, 문명에 길게 드리워진 저묾의 징후들. 빛이 사위어 가는 그 석별의 풍경에 대한 이야기이기도 하다.


벼랑 끝에 매달린 이들 앞에 단 두개의 선택지처럼 보이는 버티기와 그만두기. 다양한 예술가들의 삶을 들여다본 제프 다이어는 전한다. 퇴락과 일몰의 의미 그리고 버티기와 그만두기의 이유와 방법이 얼마나 다채로운 스펙트럼 안에 놓이는지를. 누군가에게는 이른 나이에 석양빛이 스미고, 누군가는 노을 속으로 스스로 걸어 들어간다, 어떤 이는 쇠락을 부정하고, 어떤 이는 준비한다. 누군가는 그만두었다가 돌아오고, 누군가는 말년에 처음으로 ‘발견’된다. 가장 찬란하게 뒤늦게 도착한다. 그리고 “어떤 사람들은 사후에 태어난다.” (니체, 작가 인용) 그 찬란함과 쇠잔함, 절망과 환희, 아이러니의 순간들이 이 책을 수놓고 있다.


쇠락과 노쇠에 접어든 삶을 사색하는 이 책은 무거운가? 그럴 리가. 60대란 나이를 분명하게 의식하지만 제프 다이어가 아닌가. 어떤 작가들은 늙지 않는다. 그렇게 보인다. 자신의 자신의 노화를 묘사하는 문장에서조차 푸릇한 기운이 느껴지는 것은 왜일까. 그 전작들이 새긴 감각의 청춘이 독자에게 너무 깊게 각인된 걸까. 왕성한 호기심, 집요한 관찰력, 작가로서의 성실함, 그리고 엄청난 기억력, 마치 평행 우주 속 자신의 젊은 시절을 동시도 살고 있는 듯한 기억력. 그리고 무엇보다 솔직함과 열정. 그리고 유머, 유머. 이 모든 것을 숨길 수 없었던 이 책은 그러니 재미있다. 혼자 계속 “쿡”, “쿡”하며 읽게 된다. (예를 들면 이런, “‘한 권 작가’의 두 번째 책이 갖는 목적은 자신이 여기까지라는 일종의 확인 사살을 하는 것이다” 하필 그 예로 나오는 작가가 내가 친애하는 작가지만, 정말 후추 같은 유머다.)


이 책의 처음부터 끝까지 작가와 동행하는 예술가들이 여럿이지만 작가가 (가장) 내적 친밀감을 느끼는 것처럼 생각되는 이는 니체다.(내 생각) 작가는 니체의 문장들을 여기저기 출몰시킨다. 그때마다 웃고, 고개를 끄덕이게 된다. “우리 모두의 공통점 중 하나는 바로 오직 나만이 니체를 이해한다고 주장하는 것이다.” (이런 식이다. 안 웃을 수가!) 그렇다. 작가는 작가대로, 나는 나대로 이해한다고 착각하기를 멈추지 않는 니체. 웃기고, 슬프고, 반짝이고, 번뜩이는 니체. “가장 심오한 정신은 가장 경박한 정신이어야 한다.” (니체, 작가인용) 이렇게 경박하고 심오한 문장을 누가 또 쓸 수 있을까.


작가의 문장들과 화음을 이루는 또 한명의 작가를 소개하자면 필립 라킨. 작가는 필립 라킨의 유머를 언급하며, “유머 감각에는 웃기는 것 이상의 의미가 있으니, 바로 그것은 세상과 관계 맺는 방식이자 세상을 바라보는 관점”이라고 쓴다. 솔직하고, 엉뚱하고, 유쾌한, 그러다 돌발적인 도약으로 한 방의 킥을 날리는 제프 다이어야말로 유머라는 고난이도의 서커스로 세계를 돌파해가는 사람이다. 그것도 무심하게.


“존재하는 것 자체만으로도 최소한의 노력이 필요하다. 아이러니하게도 하고 있는 다른 일이 적을수록 존재 에 더 많은 시간과 노력을 쏟게 된다.” 얼마나 정확한 통찰인가? 버티기도 어렵지만, 그만두는 것도 어렵다. 버티기 위해 그만두고, 그만두기 위해 버티기도 한다. 존재의 품은 이래저래 많이 든다. 버티고, 그만두는 것처럼 ‘보이는’ 각자의 내면의 삶을 타인이 어떻게 상상할 수 있겠는가. 버티는 것처럼 보이는 누군가가 실은 포기 상태일 수도 있고, 생 자체를 버티기 위해 어떤 이는 무언가를, 혹은 모두를 놓아버린다.


제프 다이어가 언급했듯이 “더 큰 맥락 안에서 자신을 파악할 줄 아는” 내적 성찰은 모든 이들에게 할당된 재능이 아니다. 작가가 예를 든 마이크 타이슨처럼 버티기와 그만두기 자체보다 내적 성찰이 우선이다. 자기의 현재 실존 상태를 어디까지 통렬히 꿰뚫을 수 있을까. 버티든 그만두든 자기를 어떻게 설득할 것인가. 그 결과를 어떻게 받아들이고 실행할 것 인가.


이 책의 클라이막스는 수없이 많지만, 우선 <버닝맨 페스티벌> 참여기와 니체와 베토벤의 연관성에 관한 글이 인상적이다. 읽어들 보시라. 아름답고 톡 쏜다. “우리는 꿈과 같은 존재이므로, 우리의 미약한 인생은 잠으로 둘러싸여 있으니”(셰익스피어,<폭풍우>중에서) “나는 비어 있는 것이 아니다, 나는 열려 있어.” (토마스 트란스트뢰메르 < 미완의 천국>중에서). (이런 아름다운 인용이 계속 이어진다.) “음악은 그 자체의 중력 법칙으로부터 벗어나 무중력 상태에 도달하기 위해 몸부림친다. 이 때 중력의 일부는 바로 이런 몸부림에 의해 만들어지는 것이다.” 이런 통찰이 책 여기저기에 반짝인다. 몸부림치지 말지어다. 그것이 너를 지상에 묶어둘지니. 어떤 비상을 위해선 버티기를 멈추고, 그만두어야 한다. 그 순간 삶도 음악이 되는 건가?


도어즈의 <끝The End>로 시작한 이 책은 수많은 장르의 음악들을 경유해 베토벤의 현악사중주로 마무리 된다. 작가의 문장에 이런저런 이유로 설득당한 나는 음악을 찾아 듣기에 바빴다. 작가가 탐독한, 읽다가 던져버린, 나중에 다시 집어든 문학 작품들 또한 정말 방대해서 그 중 일부를 찾는데 시간을 보냈다. 정말 많은 음악과 책이 등장한다. 제프 다이어의 박학과 다식에, 예민한 감성과 촘촘한 사유에 놀라게 된다. 그는 음악도 책도 때가 있다고 말한다. 그가 너무 일찍 혹은 너무 늦게 경험해서 좋았고, 억울했던 그의 지극히 사적인 예술사가 펼쳐진다. 이 또한 이 책이 안겨주는 즐거움이다.


“나는 큰 목표나 야망, 꿈같은 것을 가져 본 적은 없지만 아주 많은 자잘한 계획, 잔꾀, 취미, 관심사들로 늘 분주했기 때문에 더 원대한 목적이 없다며 아쉬워하거나 더 고상한 위안을 찾으려 하지 않았다.” 이 책은 이 문장의 진위를 확인시켜 준다. 이 책도 여전한 관심사로 분주하다. 제프 다이어의 여전한 청춘의 비밀은 이 분주함일지도 모르겠다.


제프 다이어의 이 책과 그의 문장은 잘 구워진 크래커 같다. 적당한 소금과 밀가루가 잘 배합된 바삭한 크래커. 짭조름하고 씹을수록 단맛이 나는 크래커. 그래서 손이 계속 가는 크래커. 제프 다이어는 천재들의 삶과 황혼을 통해 ‘삶’이라는 뜨거운 감자를 이야기한다. 누구도 비껴갈 수 없는 그것. 땀과 휴식, 눈물과 웃음, 고통과 환희, 승리와 좌절, 권태와 유희, 회한과 안식으로 반죽된 그것.


작가는 니체가 농담과 성찰 사이를 분주히 오간다고 적는다. 싱거운 유머 속에 페이소스가 짙게 깔린 이 책도 역시 농담과 성찰로 분주하다. 이 책은 필멸하는 인간의 공평한 운명에 대한 오마주이다. (너무 깊게 알아버려 외롭고 불행했던 니체에 대한 오마주로도 읽혔다.) 최후의 승자는 모든 것을 지극히 무관심하게 관장하는 무심한 시간이다. “가장 무거운 무게”(니체, 작가 인용)를 지닌 “끝을 맞이하는 상황”, “예술가의 마지막 작품”, “얼마 남지 않은 시간”을 이야기하면서 피식피식 웃게 만드는 그의 화법이 좋다. 눅눅하지 않고 바삭해서 좋다. 짭조름해서 좋다.


P.S.) 니체가 틀림없이 반했을 것이라고 이 책에서 제프 다이어가 장담한 작가, “에스키모가 눈을 알 듯” 남부 캘리포니아의 바람을 아는 그 작가의 책이 국내에 어서 번역되기를 바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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