야생의 숨결 가까이 - 무너진 삶을 일으키는 자연의 방식에 관하여
리처드 메이비 지음, 신소희 옮김 / 사계절 / 2024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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야생성. 작가 리처드 메이비가 2년여를 앓던 우울증의 긴 터널에서 벗어나며 발견한 가치이다. 하지만 오해 없길. 그가 되찾은 ‘야생성’은 미개발되거나 오지로 남겨진 특정 장소들을 의미하지 않는다. 야생성은 그가 인용한 콜레트의 정의, ‘꿈꾸는’ 장소이다. 어딘가를 점유하고 있는 물리적 공간이 아닌 인류가 되찾아야 할 정신의 능력이다.

작가가 인용한 소로의 문장. ‘우리 자신의 한계를 넘어서는 것을, 우리가 돌아다니지 않을 곳에서 자유로이 풀을 뜯는 생명체를 목격해야 한다.’ 현대인은 과연 감각할 수 없는 어딘가 다른 장소에, 다른 존재들이 살아 숨 쉬고 있는 것을 상상할 수 있을까 온대의 우리는 냉대의 아무르 표범이 사냥하는 모습을 눈 감고 목격할 수 있을까. 그의 생존을 믿을 능력이 있을까.

저명한 식물학자이자 자연 작가인 리처드 메이비는 심각한 우울증에 앓는다. 어느 날 그는 수 십 년 동안 모아왔던 장서들, 그가 써왔던 책들을 낯선 사물처럼 바라보는 자신을 발견한다. 글쓰기는 그가 사물을 보는 방식이었다. 본능이었다. 사물을 인식하는 본능에 오류가 생긴 것이다. 이 자각을 계기로 그는 자신의 정신 상태가 건강하지 않다는 것을 인정한다. 그는 식물적 후퇴의 과거를 뒤로 하고, 식물적 전진의 시간으로 나아간다. 친구들의 우정 어린 도움과 연인 폴리의 사려 깊은 보살핌, 그리고 그의 새로운 보금자리 ‘이스트 앵글리아’ 그 곳의 찬란한 자연은 그를 서서히 회복시켜 준다.

이 책 ‘야생의 숨결 가까이’는 정신적 위기를 자연의 치유력으로 극복하는 개인의 서사를 저만치 넘어선다. 저명한 식물학자로 리처드 메이비는 과학자의 시선으로 자신의 과거, 병력, 현재를 냉철하게 서술한다. 동시에 그는 투병과 회복 기간 동안 머물렀던 장소들의 생태계를 세밀하게 관찰하고 기록한다. 그 기록의 결과가 이 책이다. 과학자인 동시에 자연 작가로서 글을 써온 그의 글은 유려하기 이를 데 없다. 과학자의 정밀한 시선과 비판적 안목, 그리고 다정하고 따스한 정서가 문장에 배어있다.

공유지의 상실, 현대에도 막강한 합리주의와 계몽주의의 생태학적 폐해, 생태계에서 인간의 위치와 역할, 인간과 비인간의 관계, 기후 위기, 인간 중심주의, 생물종 다양성 감소, 산업형 농축산업, 전쟁과 생태계, 미디어에서의 자연 재현의 문제, 공유지의 실험 등등. 책을 관통하는 작가의 고민들이다. 식물학자로서, 그리고 한때는 자신 소유의 숲에서 공유지의 부활을 실험했던 사람으로서, 그리고 자연과의 최소한의 소통마저 불가능했던 질병을 앓았던 사람으로서, 인간을 포함한 생태계를 바라보는 리처드 메이비의 시선은 날카롭다. 생각하지 못했던 많은 질문들과 곱씹어야 할 의문들을 남기는 책이다. 지구를 생각하는 이들이라면 이 책 한권에서 복잡한 생태 이슈들을 끊임없이 발견하게 될 것이다. 소개되고 인용되는 책들과 작가들 또한 더 없이 풍요롭다. 함께 읽기 좋은 책이다.

책에는 그가 막 떠나온 영국 남동부 칠턴의 숲지대, 그가 이제 막 도착한 이스트 앵글리아 늪지대의 생태계가 손에 잡힐 듯 그려진다. 여기에 시대와 장소를 초월한 사상가, 과학자, 문학가, 여러 장르의 예술가의 연구들과 작품들, 그리고 오래전부터 내려오는 신화, 민담, 일화, 향토사들이 자연에 대한 그의 사유를 확장시키며 인용된다. 자연 묘사는 사실적이며 무엇보다 아름답고 이야기들은 흥미롭다. 포도꽃이 필 때면 잘 숙성된 와인에도 갑자기 탄산 거품이 생기는 이유는? 난 이 이야기가 너무 좋다. 달 표면에 영원히 토끼가 살게 된 이유의 중국 버전은? 등등 이 책 덕분에 알게 된 이야기들이 많다. 정말 재미있다.

해야 할 하루 일과를 모두 마친 후, 가장 편안한 시간에 이 책을 아껴 읽었다. 노란 스탠드 불빛 아래서 나는 작가, 그리고 세 마리의 고양이와 함께 칼새, 흰턱제비, 검은머리흰죽지, 검은다리솔새를 기다렸다. 어떤 날은 두루미의 춤을 보려고 수풀을 헤치며 돌아다니고, 쇠물닭과 회색기러기를 피해 날아가는 백로를 보았다. 구별조차 어려운 다채로운 난초들과 사초들의 싱그러운 여름 축제에 넋이 나가기도 했다. 매혹적인 구애의 춤을 추는 유령 나방을 목격하기도 했다. 셀 수도 없는 다양한 동식물의 생의 한 순간들을 작가의 시선을 통해 만끽했다. 그 자체로 충만한 순간들이었다. 매일 밤 한 권의 책이 생태계의 찬란한 순환 속으로 나를 초대한 것이다.

리처드 메이비는 셀본(그가 한때 머물렀던 곳이다)의 명물인 1500살 수령의 주목 나무가 강풍에 쓰러지자, 작은 토막을 간직했다가 조각가 친구에게 준다. 조각가 친구는 그 주목 토막에, 새를 조각하기로 한다. 잘라진 주목의 균열과 틈새에 맞춰 새가 조각되면, 주목 토막은 그 새들의 둥지가 되는 것이다. 나무의 결에 따라 탄생하는 새, 그 새들의 은신처인 나무, 그것들을 연결해주는 예술가. 이 상상력. 보이지 않는 존재들의 숨결을 감지해내고, 그것들을 연결하는 상상력이야말로 리처드 메이비를 회복시켰던 ‘야생성’이 아닐까.

주목 나무가 쓰러졌을 때 수백 명의 사람들이 조의를 표하기 위해 셀본을 찾는다. 그들은 주목 토막을 나누어 간직한다. 목공예 작가들은 셀본의 주민들을 위해 그릇과 걸상을 만들어 준다. 마을 사람들은 쓰러진 나무 둥치 옆에 잘라낸 주목 가지를 심는다. 이 모습들을 보면서 리처드 메이는 생각한다. 주목 나무에 어쩌면 1500년 동안 주민들의 숨결에서 나온 분자가 포함되었을지도 모른다고. 주목 나무는 세상의 고른 숨결 그 자체라고. 여기서 더 나아가 작가는 생각한다. 인간과 비인간들이 서로 나누는 숨결처럼 우리의 마음은 개인이 소유하는 것이 아니라 서로 공유하는 하나의 장이라고. 작가의 이 상상의 능력 혹은 통찰력이야말로 우리가 회복해야할, 우리를 살릴 ‘야생성’이라 할만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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