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끝나지 않은 일 ㅣ 비비언 고닉 선집 3
비비언 고닉 지음, 김선형 옮김 / 글항아리 / 2024년 4월
평점 :
어떤 책들은 한 사람의 지성과 정서에 지워지지 않을 영향을 남긴다. 너무도 당연한 이 사실은 당연한 만큼이나 신비로운 일이다. 가벼운 종이 위에 새겨진 잉크 활자가 한 사람의 마음 안으로 저벅저벅 걸어 들어가 그 사람과 내밀한 한 생을 함께 한다는 이야기이니 말이다. 모종의 내통과 연애, 배신과 전쟁을 치루면서.
이 에세이는 비비안 고닉이 문자로 건축된 또 다른 세계, 독서에 첫 발을 내딛은 순간부터, 그 미로 같은 궁전의 수많은 언어의 길들을 거쳐, 그만의 건축 설계도, 즉 그만의 글쓰기, 일인칭 저널리즘(personal journalism)을 세공해가는 과정을 담고 있다.
비비언 고닉은 마르크스와 국제 노동 계급을 절대적 가치로 신봉하는 좌파 집안에서 자랐다. 얼마나 흥미로운지! 사회적 불평등을 향한 열렬한 저항부터 시작해 그녀의 성장 과정은 낱낱이 정치적 삶이었다고 그녀는 회고한다. 독서 또한 그랬다. 그에게 독서는 단 하나의 목적에 복무하는 것이다. ‘통제할 수 없는 외부의 힘’에 얽혀드는 주인공의 행보를 통해 드러내는 대문자 L로 쓰인 Life, 그 삶의 압력을 느끼려고 그는 책을 읽어왔고, 읽는다.
그리고 또 한 가지, 중요한 이야기. 여성 해방 시위 취재를 권유하던 동료에게 ‘여성 해방 쪽이 뭔데?’라고 되묻던 그녀가 일주일 만에 ‘완전히’ 전향하게 된 통찰의 순간, 그리고 이후의 의식과 삶의 변화 과정이 에세이에 기록됐다. 이어 그의 고백이 이어진다. 고닉은 흥분에 들떴던 해방과 연대의 전선, 그리고 정치적 분석과 이데올로기, 열렬한 수사와 엄정한 현실 여기저기에서 이론과 실천이 불일치하는 분열된 개인, 그 자신을 발견한다. ‘검증되지 않은 확신’이라는 무인지대는 모순적이고 편협한 독선, 고립으로 그를 이끌고 있었다.
세계와의 불화와는 또 다른, 자기와의 불협화음이라는 이 절체의 위기. 비비언 고닉은 ‘내면의 번뇌라는 드라마가 그 우주에서 펼쳐지기 시작했다’라고 그 시기를 회고한다. 그악스러운 열패감과 좌절, 좌절. 그는 통찰만으로는 아무것도 해결 할 수 없음을 똑똑히 깨닫게 된다. 하지만 이 깨달음을 삶에 적용시킬 당사자 또한 온전히 자기 자신이다. 그는 이 두 번째 자각을 안톤 체호프의 언어로 대신한다. ‘타인이 나를 노예로 만들었(을지 모른)다 해도, 나 자신을 쥐어짜서 내 안의 노예근성을 한 방울 한 방울 뽑아내야 할 당사자는 바로 나였다’(25)
그는 다르게 읽기 시작한다. 읽었던 책들을, 특히 소설들을 다시 꺼내, 다르게 읽는다. 그렇게 다시 펼쳐든 문학의 무대에서 상연되는 중심 드라마는 천 갈래, 만 갈래로 찢기고 분열된 자아상들의 미스터리였다. 그 미스터리는 주인공들을 무지와 두려움, 수치심으로 질식시키고 있었다. 문학은 거울에 비친 고닉의, 우리의 삶이고, 문학 속 인물들은 우리 자신들이다.
반복하는 다시 읽기를 통해 고닉은 글 속에 내재한 힘의 원천 또한 발견한다. 이 힘은 분열하는 자아들이 빠져있는 균열을 봉합하고 갈증을 해소하는데 이정표가 되어 주는데, 그 힘이란 바로 인간의 ‘상상’이다. 하지만 이 상상의 힘은 통합된 실존이라는 업적을 지향하지 않는다. 작가는 문학이 견인하는 상상력이란 통합된 실존을 향해 발버둥 치는 인간에게 각인된 분투의 기록이라고 말한다. 에세이 초반에 작가가 썼던 통제할 수 없는 삶의 압력을 버텨내는 문학 속 인물들의 Life를 이끌고 가는 궁극의 힘, 그것은 바로 상상력이었다.
비비언 고닉은 여전히 대문자 Life, 삶의 압력을 느끼려고 ‘읽는다.’ 마찬가지로 그는 독자가 그가 겪은 대로 경험하고, 그가 느낀 것을 체감하기를 바라며 ‘쓴다.’ ‘읽기’와 ‘쓰기’는 같은 욕망의 다른 이름들이다.
삶의 ‘통제 불가능성’ 앞에 우리는 얼마나 자주 아연실색하는가. 번번이 고개를 숙이는가. 하지만 우리에게는 다행히도 ‘책’이라는 것이 있다. 비비언 고닉이 발견했듯 ‘책’ 속에는, ‘문학’ 속에는 삶의 압력에 압사당하지 않으려고 여전히 분투 중인 인물들이 살고 있다. 우리도 비비언 고닉처럼 우리 어깨가 짊어지고 있는 세계의 무게를, 삶의 무게를 느끼려고, 체감하려고 읽는다. 언제고 다시 읽는다.
이어지는 장들은 비비언 고닉에게 대문자 Life와 상상력들, 그리고 많은 영감들을 느끼해준 책들에 관한 이야기란다. 자기에게서 시작한 글쓰기는 들뜨지 않는다. 비비언 고닉의 글들이 그렇다. 그가 맞닥뜨렸던 현실, 지금 처한 현실에서 시작한 시선은 겉돌지 않는다. 이 날렵한 관점의 안정감 덕분에 그의 글은 재치와 유머로 여유를 잃지 않는다. 친애하는 작가의 그것도 ‘책’에 관한, ‘읽기’와 ‘쓰기’에 관한 에세이라니. 내가 제일 좋아하는 장르이지 않은가. 거기에 ‘다시읽기’라니. 뒤이은 장들이 궁금하다.
출판사의 티저북 제공으로 개인적으로 읽고 쓰인 글입니다.
‘내 경험으론, 인생 초년에 중요했던 책을 다시 읽다 보면 긴 의자에 누워 정신 분석을 받는 느낌이 들 때가 꽤 있다.’ - P9
독서는 머릿속 가득한 혼돈으로부터 우리를 구원하며 순수하고 온전한 안식을 허한다. 이따금, 책 읽기만이 내게 살아갈 용기를 준다는 생각이 든다. - P11
나는 통제할 수 없는 외부의 힘에 얽혀드는 주인공의 행보를 통해 (짜릿하게) 그 모습을 드러내는 대문자 L로 쓰인 Life, 그 삶의 압력을 느끼려고 책을 읽었다. - P13
나는 깨달았다. 일하는 인간이라는 자아 관념을 일차적으로 떠올리지 못하는 무능력, 이제 보기 그것이 바로 여자라는 존재의 핵심적 딜레마였다. - P20
그들이 헤치고 나아가는 삶의 행보는 내가 언감생심 꿈꿀 수 있는 삶과는 결정적인 단절이 있거니와 어느 한구석 닮은 데도 없는데, 독자로 살아온 일평생 나는 그 남자들과 동일시해왔던 것이다. - P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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