에밀리 디킨슨 시 선집 을유세계문학전집 126
에밀리 디킨슨 지음, 조애리 옮김 / 을유문화사 / 2023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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에밀리 디킨슨 시 선집 / 에밀리 디킨슨 / 조애리

이번 을유문화사에서 출판된

에밀리 디킨슨의 시 선집을 읽으며

오랜만에 감동스러운 경험을 했는데

그건, 어떤 시집을 읽으며

시인의 영혼 안으로 내가 깊숙이 들어갔다 나온 듯한

실로 귀중한 느낌이다.

에밀리 디킨슨의 시 선집을 읽고 난 후,

그녀의 마음 속 정원에 난 많은 길들을

며칠에 걸쳐 하염없이 걷다 나온 기분이다.

매일의 정원을 바라보다가, 매일의 자연을 응시하다가

정원이 된 사람, 자연이 된 사람.

그녀가 에밀리 디킨슨이다.

그녀의 시집에는

사랑의 속성, 사랑의 아픔, 사람의 힘,

슬픔과 상실 그리고 그리움의 여러 얼굴들,

외로움과 고독, 분노, 두려움...

그리고 탄생과 죽음을 둘러싸고 있는 여러 감정들.

인간이 겪는 거의 모든 감정들이 녹아있다.

그 감정들이 자연의 언어에 실려 표현된다.

꽃, 노을, 새, 벌, 새벽, 일출, 정오, 석양, 달과 태양, 불꽃, 숲, 나무...

그녀의 시어와 언어의 리듬은

그녀가 눈앞에 펼쳐놓는 자연에 그대로 스며들어 녹아있다.

그래서인가,

그녀가 말하는 슬픔이나 고독, 외로움, 두려움.

누군가 어둡다고 말하기도 하는 이런 감정들은

부정적이고, 어두운 에너지에 머물지 않는다.

오히려 에밀리 디킨슨은 슬픔이나 고독, 이런 감정들에서

많은 가능성을 발견해 내고, 이러한 감정들이

기쁨이나 환희로 변용될 수 있는 에너지를 가지고 있음을

시로 보여준다.

자연의 변화가 그렇듯 슬픔과 고독이 영원하지 않다는 걸,

그것들이 기쁨과 조화처럼 삶의 조건이라는 걸 그녀는 받아들인다.

혹여 그 슬픔이 지상에서 해결되지 않는 것이라 해도,

시 속의 그녀는 언제나 슬픔을 바라볼 수 있는 거리와 힘, 여유를 갖고 있다.

(‘슬픔의 기병대를 지휘하는 사람이 더 씩씩하다는 것을 안다 p26)

오랫동안 여러 감정들에 규정되어진 특정 이미지와 정서에

매몰되지 않으려는 시인의 의지.

그것이 죽음이라 해도, 삶에서 일어나는 사건이나 상황에

휘둘리지 않겠다는 의지를 견인할 수 있는 건,

우주와 자연에 대한 시인의 오랜 통찰의 선물일 것이다.

인간이 겪는 수많은 감정들을 그녀의 시어로 추체험하면서

그것들이 견딜 수 있는 어떤 것,

다른 세계로 나아갈 수 있는 커다란 가능성의 창이 되는 것,

즐겨야 하는 어떤 것으로 변화되는 것을

그녀의 시를 읽으며 지켜보게 된다.

시인의 힘이란. 시의 힘이란.

에밀리 디킨슨의 종교는 자연이다.

그녀가 섬긴 자연의 사제들은 새, 귀뚜라미, 벌, 꽃, 돌, 어둠, 햇살.. 이다.

자연의 풍요로운 존재들은 언제나 그녀 주위에서

고결한 찬송가로 미사를 집전중이다.

이런 이유로 그녀의 많은 시들은 환희와 기쁨으로 반짝인다.

그녀의 시를 읽고 난 후

새삼 인간의 영혼 안에는 얼마나 광대한 바다와 하늘이 펼쳐져 있는지

생각하게 된다. 이 넓은 우주를 마음에 품고 살며,

나는 얼마나 그 구석만을 헤매며 살고 있는지.

그녀의 시에는 죽음이 유독 많이 등장한다.

가까운 이들의 죽음, 역사 속 인물들의 희생,

아주 구체적으로 상상되어지는 자신의 죽음까지.

그런데 아이러니하게도 그녀 시 속에 이 죽음들은

삶을 더욱 삶 답게 재생시킨다.

그녀의 시 속 죽음은 삶의 채도를 한껏 높여주고

삶의 윤곽을 더욱 또렷하게 해준다.

그녀에게 죽음은 생의 감각을 일깨워주는 것이다.

따라서 삶 속에서 일상적으로 명상되어야 할 것이 된다.

그녀의 음성으로 듣는 죽음은

삶의 절정과 삶의 대담한 진실들을 전면에 드러내주는 빛이다.

그녀가 열어젖힌 죽음의 창으로 세계를 내다보면

삶은 생명, 기쁨, 환희로 충만한 장소가 되고,

지상의 생명들은 셀 수도 없는 가능성 속에 던져진 존재들이 된다.

죽음의 시선으로 바라본 삶은

‘조그만 손을 쫙 펴서 천국을 모으는 p157’ 복된 것이 된다.

에밀리 디킨슨은 열렬히 우주와 자연을 묵상하는 사람이다.

그런 만큼 열렬히 인간의 삶을 사랑한다.

그리고 인간의 삶을 우주와 자연의 질서 안에 통합시킨다.

우주와 자연의 섭리 안에서 인간의 종교와 법은 참으로 초라한 것이 되기도 한다.

조악한 종교와 관습, 제도에 갇힌 존재들에게

그녀가 발견한 광활한 섭리의 언어들은 얼마나 해방감을 주는지.

석양의 아름다움이 인간이 가진 가난한 색채분류 언어로는 설명이 불가능하듯이,

인간의 생명과 삶을 억압하는 어떤 종교와 제도는 결국 실패하게 될 거라는 걸 그녀는 시로 말하고 있다.

어떤 시집을 읽는다는 건

그 시인의 영혼 속에 내가 깃드는 거라는 걸,

또한 그 시인이 나의 영혼 안에 깃드는 거라는 걸,

이 일이 이렇게 아름다운 사건이라는 걸,

참으로 오랜만에 다시 느끼게 준 소중한 시집이다.

인간에게는 영혼과 마음이 있다.

이 진실을 기쁘게 되새겨준 시인,

그녀는 에밀리 디킨슨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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