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에밀리 디킨슨 시 선집 ㅣ 을유세계문학전집 126
에밀리 디킨슨 지음, 조애리 옮김 / 을유문화사 / 2023년 5월
평점 :
에밀리 디킨슨 시 선집
/ 에밀리 디킨슨
/ 조애리 옮김 / 을유문화사
오늘 에밀리 디킨슨의 시 선집이 도착했다.
얇은 그녀의 시집을 읽어오며 언제나 갈증을 느껴오다
이리도 묵직한 시집을 접하니 그 동안의 목마름,
또 앞으로 한동안의 목마름을 해소해 줄 아주 커다란 잔의 청량한 물을 5월의 테이블 위에 올려놓은 듯 기분마저 청량하다.
에밀리 디킨슨에게는 고립과 은둔이라는 꼬리표가 자주 붙는다.
이 꼬리표에는 세간의 관심과 편견이 동시에 담겼다.
집 밖에 나오지 않는 사람의 편협함, 고집, 세계와의 불화.
외출을 하지 않는 사람에 대한 편견은 대략 이런 것이다.
하지만 과연 그들은 정말 외출을 하지 않을까.
외출에는 다양한 방식이 있는 걸 모르는 시선들이야말로 편협한 건 아닐까. 어떤 이들은 그들만의 방식으로 외출한다.
분주히 외출한다. 멀리 떠난다.
야행, 그들만이 찾는 시간대의, 그들만의 장소로의 산책,
일년 내내 계절을 감지하는 예민한 시선으로 떠나는 창밖으로의 외출. (사각형의 그 작은 창으로 어떤 이들은 매일 우주와 만난다. 그 우주와의 만남은 지구라는 행성의 신비로운 만남으로 이어진다 ) 우정을 나누는 이들에게 보내는 편지라는 형식의 보다 더 간곡한 외출, 그리고 무엇보다 시라는 형식으로 자신안에, 그리고 결국 타인의 마음에 지워지지 않는 길을 내는 한 생에 걸친 외출.
분주하고 산만한 외출을 고의로 삼가하는 대신,
그 고의적인 머무름을 통해 간직할 수 있었던 고도의 집중력과 섬세함으로 그것이 마음으로 난 길을 따라가든, 물리적 세계로 난 길을 따라가든 은둔자의 한 번의 외출은 세계와의 유일무이한 만남이 된다. 그런만큼 그 외출은 세계와의 진실한 대면의 순간으로 빛난다. 순간이 영원이 되는 농밀한 접속인 셈이다.
어쩌면 그녀야말로 외출의 천재일지도 모른다.
형식적인 친교를 위한 외출을 거의 하지 않는
하지만 내가 매일 찾는 산책로의 하늘, 나무와 풀, 하천, 새들,
작은 벌레들, 물고기들, 돌, 그리고 사람들 ..
그 구석구석의 주인들을 누구보다 섬세하게 아는 나는,
그 길에서 우주와 세계의 경이로움을 알게 된 나는,
십년 넘게 다닌 그 길의 내일이 매일매일 궁금한 나는
에밀리 디킨슨에게 오래전부터 우정을 느껴왔다.
그녀의 시들이 좋다. 어떤 이들이 고립과 은둔이라고 말하는 에밀리가 '선택한' 삶의 방식을 이해한다.
이렇게 우정을 느끼는 그녀의 시들을
페이지가 줄어드는 아쉬움을 덜 느끼며
당분간 마음 놓고 읽을 수 있다니 두꺼운 이 책이 반가운 이유다.
표지의 사진은 그녀가 시를 쓴 창가 앞의 테이블이라고 한다.
저 테이블앞 의자에 앉아 창밖으로 들어오는 빛의 변화를 온 몸으로 느끼며 시를 썼을 테지. 시를 쓰다 자주 몸을 일으켜 창 밖의 나무들과 하늘의 변화를 오래도록 지켜봤겠지.
책을 펼치자 마자 나온 페이지가 시인에 대한 시이다.
시인은 멸망한 이웃 종족에게서 엄청난 장미유를 짜내는 사람이라니, 예전에는 우리도 그런 능력이 있었다니,
그런데 우리는 그런 능력을 자각하지 못하고
끊임없는 가난에 시달리고 있다니,
시간을 초월한 자신의 부에 대해 의심하지 않고,
도둑을 맞아도 손해를 보지 않는 시인이라니,
누가 그녀를 세계와 불화하는 괴팍한 고집장이라고 할 수 있을까. 이렇게 유머러스하고, 따뜻한, 사랑뿐인 사람에게 말이다.
( 이 글은 도서제공으로 쓰여졌지만 지극히 개인적인 글입니다.
좋은 기획으로 멋있는 책을 세상에 내놓은 출판사를 응원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