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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래과거시제
배명훈 지음 / 북하우스 / 2023년 3월
평점 :

P. 20~21 기계들은 일을 잘했다. 어마어마하게 많이 만들어내고 아무대가도 받아가지 않았다. 아예 퇴근을 안했다. 사람들은 점점 할 일이 없어졌다. 다 예상했던 일이지만 수순대로 모두가 일자리를 잃었다. 지역 랜드마크라고 할 만큼 거대한 공장에도 사람은 대여섯이 될까 말까 했다. 인간은 거기에서 나오는 잉여 소득을 잘 나누어 행복하고 여유롭게 즐기기만 하면 됐다. 이론은 그랬다. 그런데 문제가 있었다. 사람들이 곧 취미마저 잃고 만 것이었다. 미술이나 음악 같은 예술 활동도 의미가 없어졌다. 기계는 작곡도 잘했다. 가슴이 시리도록 아름다운 음악을 분당 이천 곡쯤 만들어내 수 있었다. 소설도 시도 그림도 다 그랬다. 창작은 이제 무의미했다. 세상에는 좋은 게 차고 넘쳤다. 누가 엉성한 작품 하나를 더 보탰다는 소식은 뉴스거리도 되지 않았다.
P. 298~299 회사에서도 지하임은 그런 사람이었다. 늘 부지런하게 사무실 여기저기를 헤집고 다니는 친구. 직접 가서 확인하고 무슨 일이 생기면 언제든 맨 먼저 현장에 가 있는, 흔히들 말하는 발로 일하는 전문가. 그래서 같이 일하는 동료들까지도 금방 활기차게 만드는, 기분 좋은 존재감을 지닌 이. 지하임의 부친이 살려내기로 한 것은 지하임의 그런 존재감이었을 것이다. 저런 경이로운 질주를 10년 넘게 보아온 부모라면 자연스럽게 도달할 수 있는 결론이었다. 안세미 씨는 끝내 동의하지 않았지만. 지하임은 한사코 자신을 부인하는 안세미 씨에게 무력시위를 하듯 달리고 있었다. 남아 있는 내가 따님의 본질이 아니어서 미안합니다. 뇌가 아니어서 죄송해요. 두 다리일 뿐이어서. 어쨌거나 나는 살아남아버렸고, 이 두 다리로부터 새로운 삶이 시작되었어요. 상체를 차지한 나는 나대로 인생을 살아갈 거고 당신에게 발이 묶이고 싶지는 않아요. 나느 이제 어디로든 갈 수 있거든요. 하지만 나는 당신을 두고 떠나지 않을 거에요. 이 보잘것없는 절반의 존재로부터, 나는 지하임이 되었거든요. 그리고 이제는 자신 있게 말할 수 있어요. 지하임이 남긴 절반은 그렇게 보잘것없는 존재가 아니었다는 사실을. 보세요! 이렇게 굉장하잖아요. 이게 지하임이라고요. 나를 어떻게 받아들이시든...이라는 의미가 담긴 매우 과격한 항변.
9편의 SF소설이 단편으로 수록되어 있다. 작가노트를 통해 이 작품을 쓴 이유에 대해서도 알 수 있었다.
미래를 상상하는 건 어렵지 않지만 구체적으로 그려나가는 건 어렵다. 하지만 이런 소설을 접할 때마다 그 소설이 머릿속에 그려지면서 그 속에서 내가 살고 있다는 느낌을 받게 되어 새롭기도 하지만 두렵기도 하다. 하지만 이런 소설을 접하고 상상하면서 미래를 먼저 경험해보기 시작하면 그런 두려움도 점점 사라질거라고 생각된다.
작가의 북토크를 잠시 들을 기회가 있었는데 이 작가의 다른 작품도 궁금해졌다.
SF영화나 소설을 좋아하는 사람이라면 반드시 읽어보길 추천해본다.
* 도서를 제공받아 읽고 솔직하게 작성하였습니다.